길을 잃은 사람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둘이 잘 맞고 서로를 잘 이해하는 관계라면 최고겠지만 말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 같다. 그게 배려고 센스라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반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서 나도 행복해지는 그런 관계를 추구하는 것 같다.
모두가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99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못해주면 평가절하되니까.
한국에서는 다수가 공감하는 정서가 있다 보니 그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다행인 것 같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잘했다 못했다의 경계가 어느 정도는 통용되는 기준이 있으니 보편적인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안 하는 것으로도 중간은 가는 듯... 맞나?
그런데 정반대 방향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사랑 표현의 방식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싶어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장소를 소개해주고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공유했으면 좋겠는 그런 마음.
물론 사랑하는 마음이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나뉠 수도 없고, 둘 다 아우르는 그런 감정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둘 다 맞다. 뭐가 더 낫고 뭐가 더 잘 맞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테고 각자가 원하는 게 있거나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장점만 보다가도 단점 하나 때문에 결국 헤어질 수도 있고, 단점이 수도 없이 많은데도 장점 하나로 커버칠 수도 있으니까.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색깔이 없으니 매력 떨어질 수도 있고, 취향도 많고 구체적이라 내가 원하는 것과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보면 내게 맞춰주는 사람의 배려심에 다시 한번 반할 수도 있고, 상대가 좋아하는 구체적인 것이 있다면 선물 주거나 칭찬하는 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 편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취향 덕분에 나의 견문을 넓힐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 아휴. 사랑하는 방법에는 정답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걸 주는 것? 상대가 좋아하는 걸 주는 것? 다 사랑하니까 주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느냐. 아무튼 그래도 내가 이렇게 머리 쓰며 고민하는 이유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어서 그렇겠지ㅠㅠ
그런 의미에서 남편(포함 시댁 가족)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이다.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상대의 어떤 행동이라도 그것은 개인의 선택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어찌 보면 정말 대단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살아오면 저런 쿨병(?) 냉혈한(?)이 자연스러워질까? 심리상담가인 어머니가 키우셨으니 미국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독립적인 케이스인 것일까?
자신의 자유와 권리, 자신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기본인 남편은 상대의 자유와 권리, 인정과 존중을 해준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내가 상처를 받았어도 자신의 자유는 자유고, 상처를 받은 나의 감정도 존중해주고, 왜냐 그것은 나의 선택이니까. 나의 자유의지이니까.
그 대신 내가 힘들고 괴로워할 때 조용히 동요나 자장가 캐롤을 불러준다. 내가 내 감정을 스스로 해소할 수 있도록.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것일까? 어릴 때 부모님이 그렇게 위로해준 것일까?
사실 한 개인이 상대의 신념이나 행동을 바꾸려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내가 본 드라마나 내가 겪은 사람에 한에서는,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꾸며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며, 그것도 못하면서 무슨 연애나 결혼을 하냐고. 그런 자발적인 희생이 자연스럽고 나만큼 상대도 희생한 것을 아니까 서로 고마워하며 위해주며 사는 그런 모습을 생각했는데. 남자라면, 연장자라면, 남편이라면, 어른이라면 뭐뭐 해야 한다는 생각도 결국 강요였던 것일까? 누군가를 틀에 맞춰서 바꾸려는 욕심이었을까?
그냥 내가 나 스스로를 희생했으면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없으니 내가 견디기 힘든 것일까? 그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나? 나는 남편에게 맞춰서 남편이 원하는 것을 주는데, 남편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니 우리 관계는 모두 남편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누가 생각해주나 내가 원하는 건 신경도 안 쓰나 하면서. 내가 원하는 걸 나도 모르면서. 내가 원하는 삶은 대체 무엇일까?
최근 부의금을 내며 밀려든 생각들
부의금을 얼마 정도가 적당한지 팀장님께 여쭤보니, 카드, 편지, 꽃, 부의금 모두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것이며 절대 강제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에서는 홀수 금액으로 내고, 액수는 만 원 단위, 친하면 얼마 이상 등등 비공식 규칙에 더하여 경조사 참석도 어느 정도는 의무적이라 정해진 만큼 하면 쉬웠는데. 막상 모든 의무를 벗어던지고 진심이 가는 만큼 하려니 얼마를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됐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목적지만을 지나치게 갈망한 나머지 우리는 모두 길을 잃은 게 아닐까.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만 남은, 진심이 생략되고 형식만 남은 건 아닐까? 결혼식, 장례식, 제사, 명절, 김장 ... 의무가 의미를 앞서갈 때 진심보다 금액이 먼저일 때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어떻게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남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닐까? 결국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들은 표현조차 못하게 된 것 같다. 진심 어린 마음이 거절당할까 봐 아니면 비웃음거리만 될까 봐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게 된 것 같다. 손절당할까 봐, 예의가 아니니까, 맘충이 될까 봐, 거지 취급받을까 봐... 그런데 그런 마음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아닌가? 돈이 더 우선인가? 마음을 돈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건가? 마음만으로 충분할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는 '자격'이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절대적이다.
화낼 수 있는 자격, 상처 줄 수 있는 자격, 비난할 수 있는 자격, 먼저 지랄을 했으니 나도 지랄해도 된다는 자격, 결혼식 하면서 친구를 거를 수 있는 자격, 축의금이나 부의금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 노후준비나 경제적 지원이 준비되어 있어야 임신이나 출산 육아할 수 있다는 자격, 자녀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줬으면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자격...
그 분노, 그 한, 그 억장이 무너지는 감정, 그 서러운 마음... 어떤 말로도 표현 못할 그런 느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나를 지탱해주고, 그 반응을 내가 통제하고 나를 같은 급으로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그런 자존감이 필요한 것 같다.
모든 감정은 타당하고 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든 감정은 옳으며 올라오는 감정을 통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런 감정을 알아채고, 인정하고, 이해하고, 충분히 느끼고, 그러고 나서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건강한 방식으로 건전한 방식으로 나의 존엄성을 해하지 않는 방법으로. 표현을 우아하게, 말로 대화로 대처하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객관화는 참 어렵다. 피해자가 되는 것은 쉽다. 남 탓을 하면 되니까. 나의 행동에 나의 선택에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 따돌림이나 괴롭힘 한 번 안 당한 사람 없고, 가정의 불화나 사회적 부조리 한 번 안 겪은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 사회가 전부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되찾고 자신의 상처를 되돌아보며 치유하는 것은 정말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너무 과거에만 파묻혀 과거에 무엇이 잘못되었고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누구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고 속속들이 분석해 봤자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사과를 받아도 현재는 바뀌는 것이 없었고, 나는 여전히 상처 받은 그대로의 나였다.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은 사과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또다시 상처 받게 되었다.
상처 받은 건 나지만 상대도 상처일 수도 있다. 미안하다고 했는데 뭘 더 바래? 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자신은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이 의도한 바는 선의 었으니 자신을 가해자라고 생각 못할 수도 있고. 물론 그 사람 입장에서는 다 맞는 말이다.
결국 내가 이겨내야 할 일이다. 회피하던 해결하던 치유하던 성숙해지던 내가 할 일이지 남이 고작 사과 한 마디 한다고 아물 상처가 아니었다. 그래, 나는 운이 좋아서 그 사람과 대화도 했고, 글로 내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어쩌면 어느 누구는 말뿐인 사과라도 간절히 원할 수도 있고 곪아 터진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공포, 의무감, 강제된 행동이나 타의에 의한 양보, 자신의 선택이 아닌 강요된 방식밖에 모르는 경우에는 타인에게 호감이나 호의를 표현하는 방식도 비슷하게 가는 것 같다.
공포심으로 자녀를 교육하거나 체면으로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면 반발심이 드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축의금이든 부의금이든 지원금이든 돈으로 사람을 흔드는 것도 무리 아닐까? 내가 한국 정세를 너무 몰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현실 파악 못하고 사랑이니 꿈이니 진심이니 쫓아가는 걸까? 내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해서 돈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일까?
죽고 나서 유산 상속한다며 며느리 부려먹는 부모를 누가 진심으로 효도하고 싶을까? 군대로 공포정치를 한다면 누가 진심으로 충성할까? 배부르게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돌봐주면서 이끌어야지, 마구잡이로 숨통을 휘어잡고 조이면 누구라도 탈출하고 싶지 않을까?
어쩌면 그 방식밖에 몰라서 그러는 걸까? 제대로 된 위로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타인을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다면, 제대로 된 진심을 표현받은 적이 없다면, 그 새로운 경험에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살아남기 바빴던 전쟁통에 태어난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 잘 키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안 굶기고 밥만 챙겨줬거나, 학교는 보냈다 하면, 돈 벌어오라고 내쫓지 않았다면, 부모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지금 시대가 바뀌어서 촉감놀이며 정서발달을 챙기지만 옛날엔 그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현재를 사는 우리가 더 많은 고민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넓은 세상을 보며 더 발달한 기술과 발전한 사회 높아진 시민의식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주변에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러기 싫어도, 물들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한 평생을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이었으면 그 사람은 자기가 부정적인지도 모른 채, 계속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가족에게 사회에게 친구에게 부정적인 말에 노출되었다면 어쩔 수 없이 나도 비슷하게 되는 것 아닐까?
정말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상대의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는 실정이다. 내 마음을 더 단단히 먹어야 하겠지만... 또 서로 받아들이는 게 다르니까 상대가 아무 악의도 없이 한 말에 내가 흔들리듯 내가 무심결에 하는 말이 상대에게 상처일 수도 있다. 대체 뭐가 옳을까?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할까?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데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ㅠㅠ 주변 사람은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고 익명의 사람과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누구 관심 있는 분 없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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