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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May 19. 2022

내가 꼰대인가? 우리가 자문하는 이유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분노하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분노하는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수호


해외 거주기간이 길어지면서 매 순간 깨닫게 되는 점이 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


표면적이고 이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우리가 행사해야 할 구체적인 상황들과 대응방식을 접하면서 그 중요성을 깊게 통감한다.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아, 저렇게 대처할 수도 있구나.

아, 저렇게 행동할 수도 있구나.

아, 내 권리를 주장해도 되는구나.

아, 나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기본권. 인간의 존엄성. 당연하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보장받아야 할 권리.


개인의 자유,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선택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이 되는 원칙.


그리고 그 권리의 중요성. 그 권리가 상징하는 사회 근간에 대한 의미.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 지켜낸 우리의 권리.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권리.


우리가 마땅히 '행사'해야 할 그 권리와 자유. 그리고 수호해야 할 그 권리와 자유.




누가 꼰대인가?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사람이 꼰대라고 나는 정의한다. 그리고 꼰대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나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꼰대를 허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적인 의미로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기성세대를 속되게 말하기도 하지만, 사고방식을 갖는 것 만으로는 문제 삼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생각의 자유는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지켜줘야 하니까.


다만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협박한다면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이다.




관계중심의 한국사회에서는 나의 권리와 자유보다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우선시하게 되는 것 같다. 자발적으로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분위기, 암묵적인 규칙이 되어버렸을까?


우리가 스스로에게 나도 꼰대인가? 의문을 갖는 것도 역시 나의 가치관이나 의사보다는 타인의 또는 군중의 판결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평가를 수용한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판사로 만들어 주었는가? 그들의 의견이 내 의견보다 고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타인에 의해 그렇게 가볍게 바꿔버리는가?


꼰대는 이러 이런 사람이고 당연히 꼰대는 형편없고 악질적인 인간이다 이런 식으로 권선징악 흑백논리로 펼쳐지면, 저 사람이 잘못이니까 저 사람을 고쳐놔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혹시나 나도 꼰대인가, 주변인에게 혐오받는 사람이 되어버렸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 그래서 요즘 애들은 왜 이러지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내가 틀렸나? 내가 뭘 고쳐야 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건 내가 꼰대인가? 보다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출처 : 블라인드




사람의 모든 감정은 옳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단순하게 아, 나는 이런 감정이 드는구나... 하고 알아채면 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화가 나거나 서운한 감정이 든다면 그 원인을 찾아볼 필요는 있다.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감정을 해소한다면 불필요한 갈등이나 언쟁을 사전에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규의 행동이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나는 그런 혜택을 누리지 않았는데 (누릴 수 있었지만 회사를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했는데) 신규는 계속 휴가를 내기 때문이다. 규정에 있고, 과장님의 결재를 받았으면, 사실 신규의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지만 신규의 공백에 업무량이 늘어서 내가 피해를 본다고 느껴진다면 내가 꼰대인가? 보다는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질문해보자.




다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는 신입이 말 걸기도 싫을 정도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사실 신입의 입장에서 더 나은 곳을 찾아가는 건 당연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나는 몇 년 동안 이 회사에 근속하면서 열심히 일해왔는데 나의 노력이 무시당한 것처럼 느껴졌을까? 어쩌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다 잘 살고 있는데 우리의 삶이 평가절하된 것처럼 느껴졌을까?


나의 업무 중 하나인 신입 교육조차 해주기가 싫다면... 내가 꼰대인가? 보다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질문해보자.




신사적인 분노


우리는 지나치게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이용당한다.


신규가 휴가를 썼거나 신입이 이직해서 업무가 많아지는 것이 불만이라면 엄밀히 따지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업무 분배를 제대로 하고 공석을 채우는 것은 상사나 회사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 불필요하게 높은 책임감에 압박받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나의 업무를 잘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솔직히 직원 하나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가게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동안 많은 사무실에서 밀려드는 업무에 직원을 갈아 넣어 회사를 돌렸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갈리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내가 해외생활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사람들이 화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물론 또라이는 어디에나 있지만 말이다)


기차나 버스가 늦었을 때는 기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회사에게 더 효율적인 운행 시스템을 요구한다. 제품이 망가졌을 때에도 상담사나 수리 기사에게 화내지 않고 회사에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보면 말단 직원에게 고객 갑질하는 것보다 차라리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여기 책임자 불러줘 상사와 이야기할게 하는 게 오히려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뭔가 반대가 되었다. 업무는 평사원에게 가중되고 그 업무로 인한 책임 역시 평사원에게 미뤄져 꼬리 자르기 식으로 희생되는 경우도 많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월급이 높아질수록 일도 책임도 더 많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휴가를 내는 신규가 더 얄미워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본다면, 신규의 휴가를 결재해주는 과장님께 또는 부장님께 건의드려 대책회의를 하고 내부규정을 다시 만들 수도 있는 것이고, 초과근무는 허가받은 경우에만 할 수 있도록 하거나, 신규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 모두 자유롭게 연가를 쓸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악용사례가 쌓이고 공론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조금 더 합리적이고 평등하게 바뀔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단 한 명이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그런 불합리한 상황이 더 많이 언급되고 불만이 제기돼야 한다.


강약약강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았으면 좋겠다.




MBC <후플러스> 대한민국은 쉬고 싶다 편




변한 것처럼 보이는 한국


나는 한국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또래 친구들도 또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여전히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애초에 부당한 일이 없었으면 가장 좋겠지만... 만약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우리의 미래에 어느 방향으로 갈지 커다란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중요하다.




결혼한 친구는 시댁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지만, 사전 사후에 남편에게 이 요구들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알린다고 한다. 친구도 남편도 어른의 뜻을 거스를 의사는 없지만, 이게 부당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는 데 의의를 둔다고.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럼 그냥 남편에게 죄책감만 심어주는 것 아닐까? 남편에게 부담 줘서 남편이 알아서 나에게 잘해주길 바라는 걸까? 차라리 처음부터 부정적인 사건을 안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친구는 그게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 문화가 한국 전체에 너무나도 만연해서, 그리고 나이 드신 어른들은 절대 안 바뀐다고.


그리고 하는 말, 너희 시댁은 외국인이라 다르겠지...




하지만 시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 땡스기빙에 집에 와라 너 생일파티랑 같이하자~ 크리스마스에 당연히 올 거지? 여름휴가는 시댁에서 가족이랑 보내는 게 우리 집 전통이다~ 내가 직접 들은 말.


처음에는 열심히 며느라기 했지만 우리 남편의 한마디에 나는 손을 놓았다. "나는 네가 좋아서 하는 줄 알았어! 싫으면 하지 마!"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다 해주고 나서 남편한테 불평불만하면 무슨 소용일까? 애초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이런 불만도 안 생겼을 텐데


그러다가 우리 며느리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머 얘, 나는 그런 시어머니 아니다! 요즘 누가 며느리 부리려고 하니? 난 절대 안 시켰는데 며느리가 알아서 다 해줘~ 이런 말 들으면 얼마나 기가 찰까. 그럼 어머니 친구가 또 자신의 며느리한테 누구는 뭐도 한단다 하면서 악순환이 계속되겠지 ㅎㅎㅎ


내가 나 스스로를 존중해줘서 아무리 부당한 상황에서도 나의 권리를 잊지 않고 행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했으면.




<며느라기> 부엌으로 갈지 현관문으로 갈지 내가 정한다. 내 두 다리로 걸어나간다.




잘못된 책임론


우리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강해 여전히 너와 나의 경계가 맞물려있는 것 같다. 법 보다는 사회적 통념이, 사생활보다는 우리의 '정'이 우선일 때도 많아 보인다.


예전에 화제 되었던 빈곤 포르노 사건(기사: 허락 받아야 하는 가난, 주제넘지 않은 행복)이 있다. 기초생활수급 아동이 비싼 돈가스를 먹는다고, 후원 아동이 20만 원짜리 패딩을 원한다고 분노했던 사건.


내가 낸 세금으로, 내가 낸 후원금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도 들어본 말이다. 제가 낸 등록금으로 월급 받으시잖아요~ 내가 낸 세금으로 너 월급 주는 거잖아~


하지만 납세는 국민의 의무이다. 민원인이 세금을 냈다면 국민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야 한다. 그는 성실한 납세자이다 끝.


그리고 나는 내가 일한 노동의 댓가로 월급을 받는다. 나도 국민으로서 세금 낸다. 끝.


그리고 그 세금이 어떻게 쓰는지는 정부의 몫이다. 세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 간다면 그것은 정부가 세금 운용을 잘못한 탓이지, 일개 공무원 한 명에게 화풀이가 가다니... 내가 그렇게 영향력 있어 보였을까.




고령화 사회에서 국민연금이 고갈될 정도면 국민연금에 화가 나야 하는 것이지, 노인에게 분노가 가면 안 된다. 출산율 저조하다고 세금 낼 사람이 없다고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 일이 아니다. 줄어드는 납세자 수와 출산율 등을 고려하여 잘 투자하고 운용하는 것까지가 정부의 책임이니까.


우리가 할 일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정당한 투표권을 행사해서 바른 정치인을 선출하는 것까지 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복지 수혜자들에게 화가 나는 건 정말 분노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른다는 강약약강의 반증이다.




출처 : 트위터




누울 자리들의 반란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다는 말, 이 옛말이 진리다. 저 사람이 발을 뻗는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누울 자리를 주지 않아야 한다.


부모에게는 이래야 해. 상사에게는 이래야 해. 이런 생각이 오랜 시간 굳어져서

자식에게는 이래도 돼. 부하직원에게는 이래도 돼. 하는 합리화가 되는 것 같다.


시어머니가 불행했다고 며느리까지 불행해야만 할 의무가 있을까? 상사가 젊은 시절 근무환경이 어려웠다고 부하직원까지 어려워야만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힘들었지만 너는 행복하게 살아라 해줄 수 없을까?


나는 못 했지만 너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라! 너의 젊음과 청춘을 즐겨라!!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좋은 배우자/부모가 되어주어라!!! 이게 젊은 시절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 텐데 왜 타인에게 해주지 못할까?




우리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필요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각박해지니까...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조금이라도 느리다고, 조금이라도 틀리다고 배제되어 버린다면 안타까우니까... 다들 분노에 차서 복수와 처벌이 미덕이 돼버린 것 같다.


우리는 정말로 서로를 혐오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진심은 다른데 상황이 그렇게 가는 것뿐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용서와 관용으로 공존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을까?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화나게 하는가?




그 기회를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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