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한 지 7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해되는 우리의 차이점들
남편에게 간병받는 방법이라니
와이프가 아픈데 당연히 남편이 간호해줘야지!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간병받는 사람이 어떻게 간병해야 하는지도 알려줘야 하나?
이게 옛날의 내 의식의 흐름이었다. 내가 아프면 (자주 아픈 것도 아닌데!) 남편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나는 아프니까 짜증만 늘어 더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집안일 보이면 알아서 좀 해 놓을 순 없어?
옆에서 귀찮게 하지 말고 차라리 혼자 내버려 둬.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러다 보니 나는 아플 때 차라리 혼자 앓는 편을 택했고, 남편은 그런 나의 선택을 존중(^^) 해 주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니었기에, 나의 원망은 고스란히 남편에게 갔다.
네가 대체 하는 게 뭐냐고!
이러려고 나를 미국으로 오게 했냐고!!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긴 하냐고!!!
이럴 거면 대체 왜 결혼했냐고!!!!!
그 뒤에는 남편에게 계란국을 끓여달라 부탁했다. 물에 계란 풀어서 끓이면 되는 간단한 퀘스트를 남편은 누워있는 나에게 계속 물어봤다.
물이 먼저 끓으면 계란을 넣어? 계란은 몇 개나 들어가?
소금 간은 얼마나 해? 파는 얼마나 넣어?
이 정도면 다 끓은 건가? 어디에 담아 줄까?
안 그래도 힘든데 질문 폭탄에 부글거리던 나는 남편에게 나오라고 그냥 내가 해 먹는다고 일부러 그러냐고 화를 냈지만, 남편은 순수한 표정으로 나에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잘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랬어.
이제 만드는 방법을 알겠으니까 다음부터 내가 만들어 줄게.
그렇게 겨우겨우 남편 봇에게 계란국이 추가됐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간호란, 죽을 끓여서 호호 불여서 먹여주는 것? 찬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는 것? 침대 맡을 지키며 체온이나 상태를 확인해주는 것? 약국에서 약을 지어와서 물과 함께 먹여주는 것?
예전에 사무실 직원분께서 물어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병문안 갈 때 죽 말고 뭘 줄 수 있냐고. 드라마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전부 죽을 준다고.
아플 때 죽을 챙겨주는 게 정석이었던 나에게는, 남편이 죽만 챙겨줘도 감동받았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남편 식 간호에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못하는 척해서 앞으로도 안 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내가 답답해하며 스스로 하길 바라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남편이랑 사는 평생 동안 아파도 간호 한 번 제대로 못 받아 보는 걸까? 결국 남편은 아무것도 못하는 웬수덩어리로 전락하여 나중에는 큰아들이라고 부르는 루트를 밟는 걸까? 그게 내가 원하는 결혼생활일까? ㅠㅠ
남편이 한 말을 표면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잘해주고 싶어서 알려달라는 거라고 했으니 내가 잘 알려줘야지. 친절하게~ 차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알려주고 실습도 시켜주고 기회를 많이 많이 줘야지~
옛날에는 남편이 알아서 해주길 바랬다면, 이제는 내가 바라는 게 있으면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게 됐다.
남편이 센스 있게 나를 위해 해 주겠지? >_<
남편이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해주기를 바라! >_<
남편이 이러 이렇게 해주는 게 사랑의 증거라고 >_<
이런 깜찍한 생각은 버리고 현실적으로 바랄 수 있게 됐달까.
나는 아프니까 따뜻한 국을 먹고 싶어. 어디 음식점에서 도가니탕을 사다 줘.
나는 아플 때 죽이 먹고 싶어. 한인마트에서 오뚜기 전복죽을 사다 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레모네이드가 먹고 싶어.
이렇게 구체적으로 주문을 넣으면 사다 주긴 하니까. 일단 그것으로 다행이다. 한글을 모르니 사진으로까지 알려준다. 그러면 마트에서 전화가 온다.
마트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매대에 있는 이 종류밖에 없대. 어떤 걸 사갈까?
까다로운 남편 유기농 브랜드만 먹는 남편을 위해 나도 마찬가지로 컨펌을 받고 남편이 주문한 식료품을 사다 주기도 한다. 선 사진 보고, 후 컨펌받고 구매. 애써서 사 와도 자신이 원하는 브랜드가 아니면 어쩌고 저쩌고 비교 분석하시니 컨펌받고 사는 게 나도 편하다.
옛날에 들었던 결혼 수업에서, 현실적으로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을 남편에게 기대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것 같다.
나는 남편의 능력치 밖의 행동을 기대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한국인처럼 아플 때 당연히 죽을 챙겨주는 간호 같은 거. 나에게는 당연한데 남편은 존재도 모르는 그런 일들을 기대하고, 남편은 영문도 모른 채 나의 실망 어린 눈빛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지금은 남편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부탁하고, 고맙다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해줄 수 있는 일. 남편의 능력이 되는 일. 남편에게 바랄 수 있는 현실적인 일.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는 동안 먹을 걸 제대로 못 챙겨 먹게 되어
1. 블럭국과 사골국을 남편에게 사달라고 주문했다.
사골국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2. 파를 사 와서 잘게 썰어달라고,
3. 밥을 한 솥 해서 소분해 냉장고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남편은... 나 한국 마트 간다고 인사 한국 마트 가서 전화 한국 마트 다녀와서 설명 주저리주저리
밥을 할 때에도 쌀 몇 컵 넣어? 진짜 두 컵 다 먹을 수 있겠어? 양이 엄청 많을 텐데 잔소리 잔소리
밤늦게까지 자기 일 이거 저거 하다가 오밤중이 돼서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파를 썰어놨다. 그리고 자다가 도마 소리에 깬 아픈 나에게 굳이 굳이 그 눈물을 보여주며 너를 위해 파를 썰었다고 알려줌 ㅋ
옛날 같았으면 나 아픈 거 안 보이냐고 어떻게 사람이 배려를 하나도 모르냐고 벌컥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나도 달라졌다.
고마워 덕분에 나도 사골국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됐어
나 속이 안 좋은데 이렇게 준비해줘서 고마워
앞으로 며칠 동안 네가 만들어준 국 먹으면 다 나을 것 같아
당신이 최고야! 내 인생 최고의 남편이야! >_<
그리고 이렇게 해주는 남편에게 고맙고 고마웠다.
남편은 여전히 계속 물어본다.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더 필요한 거 없어?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해?
옛날 같으면 알아서 좀 하면 어디가 덧나나 꼭 내 말을 거쳐서 해야 하나 불만이었지만, 지금은 물어보면 바로 알려준다.
남편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들도 말해준다.
마사지해줄까?
등을 쓰다듬어 줄까?
안아줄까?
노래 불러줄까?
과일 깎아줄까?
옛날 같으면 차라리 뭘 그렇게 물어보나 생색내고 싶은 건가 그냥 해주면 되는 걸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바로 대답한다.
그리고 나를 돌봐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나의 장족의 발전.
작년에 내가 백신을 맞고 앓아누웠을 때 남편이 나를 간호해준 증거물이다. 가족 중에 처음으로 백신을 맞게 되어 남편은 나름 만반의 간호를 해줬다.
남편이 생각하는 간호는 죽 대신 오트밀이었는지, 매 끼니 잘 못 먹는 나를 위해 오트밀에 과일과 꿀을 타서 만들어주었다.
비타민 섭취는 과일로 해야 한다는 남편의 철칙에 따라 많이 아팠을 때에는 생과일을 갈아 스무디를 만들어주고, 오렌지를 직접 짜서 (!) 오렌지주스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각종 과일을 깎아서, 심지어 바나나나 귤, 자몽도 껍질을 까서, 챙겨줬다.
남편이 어렸을 때 아프면, 어머님께서 바쁘셔서 물에 타 먹는 비타민제나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영양제를 챙겨 주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인위적인 맛이라 본인은 꼭 음식으로 영양분을 섭취하는 게 좋아졌다고...
물론 다 정말 지극정성이었고 너무너무 고마웠는데, 당시의 나는 그냥 따뜻한 죽 한 그릇, 뜨거운 국물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트밀은 목으로 안 넘어가고 주스는 너무 찼고 과일은 맛있었지만 다 토했다 ㅠㅠ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걸,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입맛이 커서도 이렇게나 크게 남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때 계란국을 만들어 달라고 처음으로 부탁했다.
하지만 이때 나는 남편이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말로만 대충 넘어가는 게 아니라 진짜 행동으로 보여준 남편에게 고맙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남편이 백신을 맞을 때 똑같이 오트밀이랑 유기농 과일이랑 유기농 주스랑 바리바리 사다 날라줬다.
우리 연애 때, 아픈 나를 뒤로하고 친구들과 축제에 가서 너무 재밌다며 사진을 보내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내가 아픈데 축제 가서 놀고 싶냐고 아픈 사람은 생각도 안 하냐며 화를 냈었고, 남편은 축제에 못 간 나를 위해 사진으로라도 즐기라는 좋은 의도로 보낸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아프면서 그때 남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곧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남편. 준비할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지고 회사 복장에 맞는 옷도 준비해야 하고... 그 새로운 시작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내가 진심으로 바라게 된 것이다.
내가 아프다고 남편도 몇 날 며칠을 죽상을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남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남편도 영위할 수 있어야 하니까. 내가 아프다고 해서 남편도 병자가 돼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를 간호하는 게 남편의 전부가 되면 안 되니까.
남편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나가는 게 내가 정말 원하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남편이 나를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간호해줬다는 진심이 나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이 상황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자기 일만 생각하는 남편이 얄미워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남편은 쇼핑몰에서 셔츠와 바지를 잔뜩 사와 침대에 누워있는 내 앞에서 패션쇼를 열고 이 옷들이 세일하는 데 얼마나 싸게 잘 샀는지를 자랑까지 했다. 그리고 나도 그 이야기를 힘겹지만 재밌게 들어줄 수 있었다.
나는 알약을 2-3일 연속으로 먹으면 꼭 토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물약으로 바꿔도 며칠 더 먹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토한다. ㅠㅠ 미국 약이라 그런가 그냥 몸에 안 받나 생각만 할 뿐, 병이 있거나 한 건 아니라 약을 먹었다 말았다 하며 버텼다.
이런 이유로 영양제를 포함한 약을 일절 안 먹는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다. 아프다 그러면 꼭 약 챙겨 먹으라는 위로를 받고, 설마 하면서 나이 들면 이 영양제는 꼭 챙겨 먹어야 한다고 추천해주거나, 심지어는 이건 좋은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선물로 받기도 했다. 물론 모두 좋은 마음에서,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해준 말일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 준 첫 사람이다. 비타민을 젤리로 사 오고, 영양제 종류도 가루로 된 걸 찾아준다. 그래도 알약을 먹어봐 괜찮을 거야 라는 강요의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토하는 걸 직접 봐서 그럴지도, 아니면 특이한 알러지를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많은 환경에서 자라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니 나도 참 편했다.
마찬가지로 정말 특이해 보이는 남편의 자잘한 습관 idiosyncrasy 들을 나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줘야지. 그리고 항상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표현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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