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이냐 노조냐 2) 회사는 회사, 나는 나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한국에 사는 것이 지옥 같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사회라는 의미라고 한다. 내가 이민을 결심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헬조선 탈출을 축하했었다. 그런데 솔직한 의견으로는 나는 한국이 전혀 나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대 의견도 정말 많겠지만 말이다.
나는 한국이 유토피아라고 천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그렇게 악조건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온 것도 헬조선 탈출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한국이 헬조선이라면 나는 그냥 하나의 지옥에서 또 하나의 지옥으로 이사 온 것일 뿐이다.
선진국은 적은 노동과 높은 인건비, 더 높은 세금과 좋은 복지 등등 되게 살기 좋아 보이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살기 좋은 나라 상위권에 있는 몇몇 유럽 국가들은 실제로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국보다 나을 게 없다. 오히려 굉장히 기본적인 것도 안 돼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도 월세나 물가는 이렇게 높고 국민보험도 없고 복지혜택은 적으면서 세금은 이렇게나 많이 떼어간단 말이야? 한국과 비교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냥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민자라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민권자들도 그닥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이곳은 일반 근로자에게 법으로 정해진 휴가나 병가, 점심시간, 쉬는 시간, 출산휴가, 육아휴직도 없다. (14-15세의 아동에 한해 5시간 근로 시 30분 휴식 보장 외) 전부 회사 재량. 자리를 비우지 않고 30분 이내로 점심을 먹는 것은 가능하나 30분 이상의 점심시간을 가지면 무급, 5분-20분 이내의 휴게시간은 인정. 그래서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때우고 밥 먹으면서 일하는 모습이 당연한 거였다. 그 사람들이 일이 너무 바빠서일 수도 있지만 점심시간이 없으니 책상에서 대충 먹고 치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뉴스에서 본 내용은 어떤 근로자가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고도 출산휴가 자체가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 산후조리도 못하고 며칠 만에 복직했는데 수술부위가 터져서 실려갔다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도 있고, 출산휴가가 없어서 퇴사하거나 복직했는데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얘기도 정말 많다. 너무 많아서 그게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물론 대기업이나 공무원직은 다르겠지만 전부 거기서만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국이나 은행 기타 사무직 또는 일용직 같은 경우에도 시급 받아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경우도 많고 그럴 경우 오히려 더 법의 보호가 필요할 텐데 그런 환경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아쉽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정말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반면에 적어도 한국은 법에 적혀있지 않는가. 이 법만 보면 한국은 정말 근로자의 천국이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왜 헬조선에 살고 있을까. 법대로만 하면 천국인데! 이렇게 버젓이 법에 적혀있는데! 왜 법이 지켜지지 않을까? 어쩌다 우리나라가 헬이 되었을까? 외부에서 보면 정말 희한한 현상이다.
-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
- 1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
- 1년간 80퍼센트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의 유급휴가 또는 1개월 개근 시 1일의 유급휴가
- 여성 근로자가 청구하면 월 1일의 생리휴가
- 임신 중의 여성에게 90일 출산휴가, 1일 2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하는 경우 이를 허용
- 배우자의 출산을 이유로 배우자 출산휴가를 청구하는 경우에 10일의 휴가
- 인공수정 또는 체외수정 등 난임치료를 받기 위하여 난임치료 휴가를 청구하는 경우에 연간 3일 이내의 휴가
- 자녀를 양육하기 위하여 1년 이내의 육아휴직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법으로 세세하게 정해놓은 것 자체가 그만큼 원래 보장받아야 할 연차조차 자유롭게 쓸 수 없으니 이렇게까지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허태균 박사님의 어쩌다 한국인이라는 강의에서 한국사회는 종종 사회경제적 수준에 비해 준법의식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심리를 설명해주셨다. "규칙이나 규정에 상관없이 한국인들은 상황에 맞는 주체적 판단을 내린다. 법을 어긴다기보다 더 나은 판단을 주체적으로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 개개인들을 보면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님에도 한국 사회에 비리, 범죄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만 따르기에는 한국인들은 너무나 주체적인 사람들이다."
고용주 판단에는 육아휴직 쓰는 근로자에게 월급 주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동료 입장에서 누군가가 휴가를 사용하면 그 업무가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상사의 판단에서 기선 제압해서 신입직원이 까라면 까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고용인의 입장에서 월급을 받으니 안되면 되게 하라는 모토로 말도 안 되는 마감기한에 맞춰야만 한다고 느낄 수도 있고,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야근도 다들 하니까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학습해버렸을 수도 있고...
인터넷에 올라온 고민 사연 중,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의 사장님이 10분 먼저 와서 오픈 준비하라는 지시가 부당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댓글들이 10분 정도는 매너 아니냐, 10분 먼저 출근해서 일할 준비하고 있는 게 당연한 거야 라고 하는 것! 아니 쩌어기 어디 먼 나라에서는 출근길에 업무 메일을 확인하는 것도 근무로 인정하고 수당을 달라고 항의하는데, 왜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거에 더해서 자. 발. 적. 으.로. 10분 20분 더 추가해서 무급으로 일을 더 해주려고 하는 걸까?
매일 10분 먼저 나올 필요가 있다면 근무시간을 9-6가 아닌 8:50-6로 변경해야 하는 게 법에 맞는 것 아닐까? 마지막 손님이 6시까지 계시다가 나가서 정리해야 할 일들이 남았으면 근무시간을 6시 가아니라 6:10까지로 변경해야 맞는 것 아닐까?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서 주체적으로 무급 노동을 제공하려 하는가? 정 때문에? 다들 그래서? 그게 옳은 일이니까? 내가 손해인 일인데, 대체 누구에게 옳은 일이지? 그게 어떻게 옳은 일이지 위법인데?
내가 두 달 정도 아르바이트했던 곳은 9시-4시 까지 영업이라면, 8:30까지 출근 4:30 퇴근이었다. 법적으로 정해진 휴게시간이나 점심시간은 없었지만 점심도 탕비실까지 왔다 갔다 하느라 허겁지겁 20분 이내에 끝내야 했지만 적어도 무급노동을 시키지는 않았던 것. 그리고 무급으로 강제로 일을 시키면 미국 노동자들은 참지않긔. 개인의 권리와 선택이 중요한 나라에서 소송까지 가는 건 일도 아니다.
법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주체적인 판단으로 인해 사회가 굴러가는 것 같다. 만약에 법이 강해서 억울한 일 없이 강제노역 없이 공명정대하게 판단해준다면 약자들도 당당하게 법대로 하라고 하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에서 작은 일이라도 하나하나 옳은 방향으로 고쳐간다면 그렇게 우리나라도 살만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개척해나가는 데 굉장히 뛰어난 것 같다. 같은 상황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서 상황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맨 처음 헐 미국에는 법으로 출산휴가도 안정해져 있단 말이야? 애도 못 낳겠네 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아 정해진 출산휴가 기간이 없으니 1-2년 쉬고 와도 복직할 수 있는 건가?라고. 정말 Thinking outside the box인데 저 박스가 대체 무슨 박스이길래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그리고 실제로 출산 때문에 일을 못했다가 복직하게 해달라고 소송을 걸거나 부당해고라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경우도 뉴스에서 봤었다. 자세한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기 위해 다양한 규정을 넣어서 채용 시 계약서에 사인하고 시작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각 회사마다 상황이 다르고 각 개인 마다도 상황이 전부 다를 것이다. 노조가 있는 곳은 확실히 노조가 제 역할을 하고 회사도 노조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에서 하루 8시간 근무 중 점심시간 45분 + 쉬는 시간 20분, 한 달 만근 시 유급 병가 14시간 유급 휴가 14시간, 가족 관련 휴직 (출산, 간병 등) 160시간을 쟁취(?) 해낸 것을 노조의 굉장한 성과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노조 덕분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건강보험, 안과나 치과보험을 포함하여 생명보험과 연금보험 등 다양한 보험 혜택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운이 좋게도 우리 회사는 남녀차별 없이, 불이익 없이, 원칙대로, 노조와 회사가 동의한 대로 잘 지켜지고 있다. 새로운 안건이 나올 때마다 노조도 회사도 최대한 서로의 입장을 수용하고 그들의 협상안을 모두 공개하고 전체 회원이 참여하는 투표에 부치는 그런 방식으로 여전히 맞춰나가고 있는 것이다.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면 대체 뭐가 나을까?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법조차도 없어서 통상적으로 하는 관례를 따르는 것? 아니면 법이 없으니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드는 것? 어디가 더 살기 좋을까? 뭐가 맞을까?
연초에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코로나 때문에 밀렸던 일을 몰아서 하느라 넘쳐서 쌓였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느꼈던 점은 여기는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는 것 같다. 여기서도 물론 개인차는 있다. 나는 초스피드로 업무 절차를 자동화 간소화해서 나 혼자서 두배 세배 일을 할 수 있도록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를 밀어붙인다. 화장실도 참고 불안한 마음에 조급해져서 계속 일을 하게 되는 것. 나는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고자 야근을 한다고 집에서 일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야근=추가 수당이므로 허가를 안 해준다고 해서 출근을 한두 시간씩 일찍 해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한테는 그게 당연했다. 일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 안되면 되게 하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무슨 말이냐면 한국에서는 뭔가 업무가 쌓이면 나도 그렇고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이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일이 쌓이면 미루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내 업무는 내가 처리하고 여유가 있으면 다른 사람의 업무도 도와주고 상부상조로 서로를 위해 함께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말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여기서는 업무 자체가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철밥통이라 그럴 수도 있다. 시간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업무를 모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계속 계속 밀려 쌓이고 쌓이는 업무는 나중에 시간 날 때 팀장이 재분배한다던지 언젠가는 누군가가 할 것이라 스트레스받지 않고 여유롭게 생각하는 것. 나와 같은 업무를 보는 어떤 동료는 팀장님께 바로 가서 나는 지금 몰려오는 일을 다 못하니 이 업무와 저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분배를 하거나, 근무시간 8시간 중 2시간은 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주지 마세요 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것. 그리고 그 동료는 출근은 거의 매일 일찍 하는데 와서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출근시간까지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한다.
이 동료는 정말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맞다 일을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초반에는 왜 일을 다 안 끝내지? 얘가 안 하면 나한테 다 넘어올까 봐 불안 불안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을 안 한다고 해서 남은 일들이 내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없다. 안 해도 되고 다른 방법을 찾아도 된다.
이것도 못하냐 가 아니라 너는 이 정도 할 수 있구나 우리 업무에는 이만큼이 더 요구되는 업무를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고 그동안은 업무 분배를 다시 정해줄게. 나는 왜 이것도 못할까 나는 왜 이거밖에 안될까 가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해 업무시간에 집중하면 이만큼 할 수 있구나 자신의 능력치를 정확히 알고, 근무시간 내에 최선을 다해 일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휴가나 병가도 자신의 권리라고 당당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아프면 일을 못하는 것은 당연. 그런 공백을 처리하라고 팀장이 있는 것이다.
나는 직원 중 하나로 이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이지 내가 없다고 이 회사가 망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만약 내가 없다고 회사가 안 돌아갈 정도라면 그 회사가 이상한 것. 어느 한 직원이 공석이어도, 교체되더라도, 실수를 하더라도, 그런대로 굴러가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회사의 의무인 것이다.
무슨 일처리를 이렇게 하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면들이 있었는데 그것도 다 개인의 일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당연히 잘할 것이라는 또는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