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이 Sep 26. 2021

5. 헬조선 밖의 세상 (2)

3) 그러면 옷은 누가 벗나요? 4) 직원도 사람이다

3) 그러면 옷은 누가 벗나요? 



내가 느낀 이 직장의 특징은 모든 업무가 need to know basis라는 것이다. 딱 내 업무 내 직급에 필요한 만큼만 알려주고 더 이상 말해주지 않는다. 이게 딱히 비밀로 숨긴다기보다 어떤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업무를 하게 되면 내가 책임을 지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각자의 직급에 해당되는 만큼만 알려주는 것.


내가 한국에서 일할 때에는 상급자 대신 결제나 서류에 직인을 찍는 경우도 공공연하게 많았다. 내가 담당하는 업무에서 (상급자까지 결재가 된 상태인데) 어떤 오류나 실수가 나중에 발견되면 무조건 내 잘못이었고 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고객님을 쫓아가서라도, 어떻게든 내가 고쳐놔야 했었다. 아니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런데 이곳은 타 부서와 협력하는 경우 무조건 팀장을 통해서 전달되며, 대결은 상상도 못 하고, 내 직급에서의 실수는 내 책임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업무를 확인하는 절차를 만들고, 상급자가 직접 수기로 사인해서 결재하고, 기한을 충분히 갖고 일처리를 한다. 실수가 있어도 고치면 되고 시간이 없으면 기한을 미루면 된다.


이곳에서는 정상적으로 업무가 진행되면 항상 잘했다고 고맙다고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준다. 부끄럽지만 그럴 때마다 당연한 일을 한 거긴 하지만 아주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실수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업무 과정을 사전에 파악하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대안을 마련해놓고 실행한다. 전체 시스템이 한국보다는 덜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안에서 새는 구멍이라도 밖에서는 안 새도록 이렇게 저렇게 막아보려고 노력은 정말 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실 내에서도, 외부기관과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 같다. 이곳은 각 기관마다 그리고 그 기관이 전부 정부기관이나 비슷한 업무를 하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물론 각 기관의 독립적이고 자체적인 시스템을 존중하고 해당 업무에 특화된 업무처리 방법이나 능력을 맞춤형으로 개발할 수도 있겠다. 각 기관별로 유착관계나 부정부패, 비리 등을 예방하기도 보안유지를 할 수 있기도 하고, 전체적인 업무가 하나의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분산되어 큰 사건 사고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각 기관으로 업무가 이전될 때마다 새롭게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 방식이다. 그에 따른 단점도 있다. 통일성도 떨어지고, 각 기관마다 새로운 번호를 부여해서 관리하므로 사건의 연계성이나 정확도도 덜한 것 같다. 게다가 매번 새롭게 케이스를 만들 때 들어가는 시간은 정말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듯. 그러니 적어도 2-3주씩 넉넉하게 아니면 17주씩 기다리라고 하니. 한국의 선진 시스템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인 이게 얼마나 불편한지도 모를 수도 있다. 비자나 재판 등 안 그래도 복잡한 절차를 처음 겪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답답하고 힘든 여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은 주민등록번호 하나로 거의 모든 개인정보를 다 얻어낼 수 있다. 신분증, 등본, 운전면허, 출입국 조회, 체포/수감기록, 학교 생활기록부, 건강보험 내역, 통신정보, 인터넷 사이트 가입이력, 은행조회, 재산/신용조회 등등등 게다가 통신사 가입 시 법원에서 명령받은 경우 위치추적 기능까지 전부. 가족관계 증명서 학생 제적부 등 민원 24에서 클릭 몇 번이면 뽑히는 우리나라 행정 만세. 연말정산도 클릭하면 끝. 한국에서는 외국인의 비자 신청, 갱신, 변경 등 온라인으로도 신청 가능하게 구축해놓았고 신분변경하는데 빠르면 며칠 만에 승인 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통합시스템으로 한 번에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정말 좋으나 개인정보 항상 잘 보호되지는 않는다는 단점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비효율적인 업무 때문에 민원 처리가 아주아주 느리다. 면허증도 실제 카드를 받는 데 최소 3주는 걸리고 세금 환급도 실제 돈을 받는데 최소 한 두 달은 걸리고 무슨 서류를 떼야하는 경우에도 1-2주는 기본으로 걸리고 비자나 영주권 등 이민 관련 업무도 1-2년에서 10년까지도 우습게 걸리는 것. 그리고 그냥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또 실수가 적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 직원의 실수로 재난 안내 문자 발송 시스템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주 전체에 BALLISTIC MISSILE THREAT INBOUND TO HAWAII. SEEK IMMEDIATE SHELTER. THIS IS NOT A DRILL. (탄도미사일 하와이로 접근 중. 즉시 대피처 찾을 것. 훈련 상황 아님)이라는 문자를 보내버린 사건이 있었다. 곧 재난 안내 문자가 실수로 발송되었다는 사실을 긴급하게 안내하였고 티비나 라디오로도 방송이 되었지만, 그 당시 주민들은 완전 충격과 공포에 빠져서 엄청난 혼란이 빚어졌다고 한다.


오경보를 발령한 직원은 해고됐고, 비상관리국 국장 역시 사태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고 한다. 국장이 책임지니 다행인 건가. 이 사건은 당시 북한의 핵 미사일 공격을 가상한 첫 대피훈련이 실시된 지 한 달도 안돼서 벌어진 일이었고, 그 실패를 교훈 삼아 3년 뒤 신뢰할 수 있는 긴급 경보 발령 개선 법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실수를 통해 발전하는 것은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지만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린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한국 같으면 정말 빨리빨리 해결됐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고 하지만 한국에도 사건사고가 많아서 어땠을지는 알 길이 없겠지.



4) 직원도 사람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한국은 업무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곳은 직원에게 더 중점을 두는 것 같다. 마인드가 손님이 왕이다! 보다는 직원도 사람이다 이런 느낌이다. 예를 들어 인력 감축이나 업무 증가로 인한 개인이 처리해야 할 일의 양이 많아지게 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일에 맞춰서 사람을 갈아 넣어 어떻게든 마감일에 맞춰서 정말 불가능한 일을 기적처럼 해낸다면, 여기는 한 사람이 업무시간에 맞춰서 할 수 있는 업무량 +/- 휴가나 병가 등 사용하는 기간에 맞춰서 업무 마감일이 늦춰지게 된다.


만약 신입사원이 수습기간에 일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경우라면 공부하는 시간에는 업무를 주지 않는다던지, 근무시간 내에 복습을 할 수 있도록 또는 새로 받은 업무를 정리하고 확인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일을 받는 시간을 조정하여, 예를 들어 카운터에서 일한다면 그 카운터를 일찍 닫고 일처리를 할 수 있도록, 정시 퇴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단적인 예로 실제 요즘 코로나로 인해 위생과 방역이 강조되면서 체온 검사나 물품 소독 등의 업무가 필요하다면, 9시-6시 근무시간인 경우, 한국에서는 9시에 정시 오픈할 수 있게 어느 정도 일찍 출근해서 준비하는 것을 기본이라고 생각하거나 본인 업무에 더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반적이라면, 이곳은 소독이나 체온 검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채용하거나 청소 인력을 늘리거나 해서 계약서에 적힌 원래 업무량보다 크게 늘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곳은 거의 모두 예약제로 진행된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숫자의 고객을 응대하며 최대한 예약자에게 집중해서 맞춤형 서비스로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고 그 시간 동안 고객이 충분히 알고 싶은 것을 또는 해야 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기에 그 한정된 시간에 예약하려는 사람은 많으니 예약을 잡는 데만 몇 달이 걸린다. 한국은 가면 바로바로 처리해주지만, 어떻게 보면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빨리빨리가 정상이 돼버려 이것저것 미리미리 공부하고 알아보고 가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래서 내가 질문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답답해한다거나 내가 조금만 어리바리하면 바로 짜증 섞인 응대를 한다거나 나에게 신경 써주는 시간은 단 몇 분도 없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미국에서 내가 조금 놀랐던 게 땡스기빙 데이 식사는 거의 두세 달 전부터 예약해야 주문이 가능하고 밸런타인데이 예약도 몇 주 전부터 해야 되고 할로윈 크리스마스 준비도 몇 달 전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만디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부지런을 떤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아예 내가 현금을 싸들고 와도 주문을 안 받아주기 때문이다. 내가 이민 와서 어차피 여기서 오래 살아야 한다면 이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받아들여야 할 것.


사람을 갈아 넣어 마감일을 맞추고 일을 속전속결로 진행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애초에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받고 기한을 넉넉하게 잡아서 진행하는 것이 나을까? 많이 벌지만 빡센 직장이 나을까 적게 벌지만 편한 직장이 나을까? 민원인들에게 응대를 할 때에도 사담을 나누면서 사람 자체에 관심을 보이고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것저것 도와드려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기다리는 사람이 밀려있으니 필요한 업무 위주로만 신속 정확하게 빨리빨리 처리해드리는 게 나을까?


우리나라 화장품 가게 혼자 볼게요 바구니처럼 우리 사무실에도 방문객들이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을 번호표라도 뽑아서 알게 해 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5. 헬조선 밖의 세상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