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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Sep 26. 2021

3. 미국 공무원 에피소드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은 이전에 한국에서 일했던 사무실들과 비교하면 정말 정적이다. 내가 맡은 일 한정이지만, 큰 행사도 없고 출장도 없고 회식도 없고 별 사건사고도 없고 심지어 외근 조차 없다. 일도 옛날 사무실보다 많지도 않고 무난하고 평탄하다. 단순하고도 매번 똑같은 업무의 연속. 안정적이고 상당 부분 예측 가능하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 정말 최고의 조건일 수도 있고, 투잡을 뛰기에 정말 좋은 환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직업이 없는 나에게는 너무너무 심심하고 하루하루가 길지만 말이다. 직급이 낮아 큰 프로젝트 성 일을 하지도 않고 그냥저냥 있는다. 도움이 되는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다.



1) 여성은 위대하다.


내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상념은 여성은 정말 위대하는 것이다. 여성의 본능적인 특징, 예를 들어, 모성애, 보살핌, 챙김, 배려심, 세심함, 신경써주기 등등 정말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어머니, 아내, 여자 친구, 누나나 여동생까지. 그들의 사랑을 받는 대상은 정말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민원 응대 일을 하는데, 70세의 노모께서 50세의 아들을 위해 이것저것 해주려고 하신다던지, 2030 세대에도 남편을 위해, 아이의 아빠를 위해, 이리저리 알아봐 주며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한다던지, 정말 세심하고 꼼꼼하게 챙겨주는 여자들이 많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 나의 편견으로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은 뭔가 독립적으로 자기 살길 알아서 찾아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모성애는 정말 국경도 없고 전 세계 공통인가 보다.


그런데 조금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무실에서는 본인이 아닌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대신해주려는 경우가 있다. 어머니와 방문하거나 아내/여자 친구와 방문해서 실제 나쁜 놈(?)은 거만하게 뒤에서 그냥 의자에 앉아있고,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반성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도 모를 정도이다. 다른 사람이 괜히 이리저리 전전긍긍 위층 갔다가 왔다가 다른 사무실 왔다 갔다 고생한다. 에궁, 오히려 이게 그 사람에게 좋은 건지 도움이 되는 건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을 해서,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에 잡혀가거나, 1-2년은 기본으로 시간을 잡아먹는 법원 일처리까지 따라다니면서 해주고, 최대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보증도 서주고, 온갖 정성으로 그를 보살핀다. 그 와중에 자기 일도 해야 되고 아이도 키워야 되고 하루가 너무너무 바쁠 것 같다. 진짜 어떻게 그렇게 다 할까 싶을 정도이다. 정말 오죽하면 다시 이런 나쁜 일에 휘말리지 않게 이 사람이 내 곁에 있을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천 번 만 번 이해는 간다.



2) 한 사건에는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해석이 있다.


옛날에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한 일. 물론 나는 서류 정리만 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수년 전 폭행죄로 집행유예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그 유예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고(?) 못하고(?)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결국 피고인 사망으로 종결된 사건.


그 폭행이 있었던 시점에서 무슨 일 때문에 싸움이 났는지, 피해자나 가해자가 어떤 상태였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경찰 조서에 적힌 내용도 전부는 아닐 테니. 결국 신고를 받았고 사건이 접수되었고 누군가는 법으로 정해진 책임을 다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호적에 빨간 줄 그어진 사람도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 절친한 친구, 평판 좋은 이웃일 수도 있다. 범죄자라는 오점으로만 낙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부고 소식란에는 한 세상을 함께 살아왔던 개인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 한 사람을 잃은 유족들의 절절한 슬픔이 적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인생을 어느 한 시점의 사건으로만 평가하는 것도 감히 불가능하고, 인생을 살면서 어떤 나쁜 길로 빠졌다가 나왔다고 해도 돌아 돌아 전체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했던 좋은 일은 좋은 일로 남아야 하는 것도 맞으니까. 아닌가... 어떤 사람이 잘못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다른 선행들도 의미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고 다들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 어느 누구도 속단하지 않기. 이 사건의 서류를 정리하면서 그 잠깐 동안 내가 느낀 교훈이다. 나에게는 철천지 원수라도 누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나에게 아무리 상처 준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는 상처 받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다면적인 모습이 그 사람의 부정적인 사실도 긍정적인 사실도 모두 그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나도 그럴 것이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3)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도 좀 오래된 일이다. 코로나 규정 위반으로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있었고 실제로 잡혀서 벌금을 내거나 추방당하는 사례가 꽤 있었다. 내가 이 사무실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뉴스만 보고 저거 일 제대로 하는 건가 의심했을 듯했는데, 실제로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보니 진짜 일을 하기 한다. 뭔가 영화나 미드를 보는 것 같아 신기했다.

그 당시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특이하게 느껴졌던 사건이 있었다. 6개월 추방 명령받았던 한 피고인이 집행유예 종료일을 2주 남기고 뜬금없이 하와이에 돌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공항에서 잡혀서 우리 사무실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니, 왜 하필 지금 오셨지? 며칠만 더 있다가 오시면 사견 종결 후라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대체 왜?! 정말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나로서는 이 사람이 왜 그랬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간혹 가다가 비슷한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사자의 선택이니 내가 감히 이해나 판단을 할 일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냥 오고 싶어서 온 것이다. 그분은 노숙인이셨는데 본토가 너무 추워서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하셨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재판일에 참석해야 하는 줄 알고 실수로 입국했다고 하셨다. 아니면 그냥 추방명령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왔을 수도 있고, 그냥 알고도 신경 안 쓰고 왔을 수도 있다. 자신의 선택인 거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니까.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까지 전부 그 사람이니까. 존중받아야 할 그 사람의 결정이고 그 사람의 선택, 그 사람의 인생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법은 꼭 지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사회의 크고 작은 규칙들이나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사회적 통념이나,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전통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런 규칙에는 모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나 무조건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나는 그것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믿고 FM으로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냥 그거를 지키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 개인의 선택이 법으로 보호되는 범위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들이고, 만약 현행법에 저촉되는 일이라면 책임을 지면 된다. 그리고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반성하고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법을 존중하며 살면 참 이상적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권, 자신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사람들도 품어내는 것도 사회와 국가의 역할일 수도 있다. 전부 추방시키면 그 사람들은 어디 가서 살며 전부 사형시키면 남아있는 사람이 있으려나.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으니까 말이다. 기회를 충분히 주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사람을 믿어주는 것이다.



4)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이건 내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있었던 일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정신질환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의 피고인은 치료명령 등을 받게 되는데 한동안 노숙생활을 하면서 치료를 받지 못한 분이 사무실에 오신 적이 있었다. 그분의 상태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강박적으로 큰소리로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그분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고 계속 소리 내서 웃고 계셨으며 부산하게 손짓 몸짓을 하며 계속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분이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는 중에 시야에 내가 보이니 그분께서 하는 생각을 말씀하시는데, 저 사람은 중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중국인? 일본인? 중국인? 아냐 아냐 일본인 같이 생겼는데? 그래도 중국인일 수도 있어 얼굴을 잘 봐봐 이런 식으로 계속 말씀하셔서 내가 그분께 저는 한국인이에요~ 대답해드리려고 했는데 바로 눈을 피하시며 나를 쳐다본다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말씀하셔서 다시 자리에 앉았더니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르는 사람이 앉았다. 중국에서 왔나? 일본에서 왔나?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다가 다른 거로 넘어가셨었다.


아무래도 대화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라서 상대가 반응하면 피하는 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질환인데 노숙하시는 분께서 길에서 무서운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는데 안전에 상당히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아무튼 그분도 그 분만의 세상에서 참 힘들겠다 싶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게, 그리고 이게 나에게 충격적인 이유는 나는 이런 상황을 처음 봤기 때문, 딱 일주일 뒤, 그분께서 다시 사무실에 방문하셨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분은 사회복지사, 보호관찰관, 의사 선생님과 재활센터 등등등 각 분야의 다양한 담당자들의 도움을 받아 약물치료를 포함한 여러 치료를 받고, 훨씬 더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과 옷차림으로 아주 정중하고 조용하게 행동하시며 대기하는 동안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셨다.


나는 그분의 상태가 더 나아졌는지 나빠졌는지 모른다. 그분이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더 좋아하시는지 치료 후의 자신의 모습을 더 좋아하시는지도 그 분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이전의 생활방식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으셨을지, 그 이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으셨을지도 알 길이 없다. 그저 타인에게 보이는 것은 어느 한 모습이겠지만 실제로 그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 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웃고 있던 모습이 행복해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그분이 행복하게 지내실 수 있기를 바랄 뿐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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