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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21. 2024

여름 날림 요리, 일본 라멘풍 냉소면

충전기 꽂아놓고 노트북 쓰고 있으면 슬슬 자판 부분이 따뜻하게 달궈지는 것이,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여름인가 보다. 이렇게 더워지면 요리를 만들 생각만 해도 기력이 뚝 떨어지는데. 저녁은 그나마 낮보단 선선하고, 나보다 더 더운 시간을 보냈을 우리 아들(이라 쓰고 남편이라 읽는다) 생각하면 에휴, 고생하고 왔는데 그래도 밥은 제대로 먹여야지 하고 주방에 서게 되지만, 혼자 있는 낮에는 내 끼니 때우자고 공들여 뭘 하기가 싫다.


그래서 요 일주일간, 점심은 차가운 면요리를 먹는 일이 많았다. 더위도 식힐 수 있고, 준비에도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요리는 귀찮지만 한 가지만 쭉 먹으면 질릴 것 같아, 냉면, 소바, 우동, 소면으로 그 나름의 바리에이션도 즐기고 있다. 예전에 같은 기숙사에 살던 아이가 '여름엔 소면만 먹고 산다'할 때 어떻게 그러고 사냐고 기함한 적도 있는데 내가 이렇게 되다니. 역시 사람 일 알다가 모를 일.


아, 입맛도.  

 

갓 삶은 소면


나는 서른이 넘고 나서야 소면을 먹게 됐다. 아주 어렸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가끔 다른 고명도 없이 간장과 설탕을 넣은 소면을 먹이곤 했는데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 꽤 오랜 시간 소면을 먹지 못했다. 간장은 간이 돼라 넣은 것이고, 설탕은 아이들이 좋아하니 넣었겠지만 내 입맛은 예나 지금이나 아재라 그 짜고 단 묘한 맛이 아주 고역이었다. 먹다가 몇 번 헛구역질을 하고 이후로 소면이라면 기겁을 하게 되었다. 차라리 다진 마늘이라도 넣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비슷한 트라우마 음식으로는 눌은밥에 설탕 뿌린 것이 있는데, 나한테 그렇게 설탕을 먹이려던 할머니는 팥죽에는 소금을 뿌려주어서 설탕 넣은 팥죽을 먹어보기 전까지는 쭉 팥죽도 싫어했다. 할머니와 손녀의 입맛은 슈퍼 엇갈림.


그래도 아직까지도 소면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소면 뿐 아니라 종종 어떤 음식을 보면 할머니를 자연스레 떠올린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있다는 것은 때론 큰 위안이 되는데,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 금방 만날 수 없는 한국 땅 어딘가에 살아계실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옅은 희망이 생긴다.


스프

뒤늦게야 잘 먹게 된 소면은 따뜻한 온면도 좋지만, 더운 날에는 찬물에 헹구어 김치와 낫또를 올려먹거나 오이지 넣고 비빔소면을 해도 좋다. 2분이면 뚝딱 삶아진다는 것도 좋다.


며칠 전엔 인스타에서 라멘풍 냉소면 레시피를 보고 약간 응용해 만들어 봤다. 소면으로 만드는 라멘이라 소우라멘이라나. 어감이 영 생소해 입에 붙지 않지만 별 재료도 필요 없고, 후루룩 뚝딱 만들 수 있어 둥지냉면, 냉소바, 츠케우동과 함께 나의 여름 점심메뉴 사대천왕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여름의 가스불 앞이 고역이신 분들께도 살짝 공유해 본다.


<만드는 법>


1. 그릇에 토리가라스프(치킨스톡) 반 스푼 (가득), 쌈장 반 티스푼, 참기름 약간, 물과 얼음을 넣고 잘 저어 섞는다. 소면을 담아야 하니 물은 조금 적게 붓는다. 조미료의 양은 각자 취향에 맞게 간을 보며 가감하면 좋을 듯.


2. 끓인 소면은 찬물에 씻어 식히고, 만들어 둔 스프그릇에 담은 뒤, 물을 조금 더 부어 간을 맞춘다.


3. 잘게 썬 파, 참깨를 위에 솔솔 뿌려주고 비밀스럽게 삶고 있던 삶은 계란을 반 딱 갈라 올려준다. 취향에 따라 김도 꽂고, 차슈도 얹어주면 더 라멘스러운 모양새가 되는데 없어도 상관없다.


끝.

차암 쉽죠.



원래 레시피는 왜간장과 다진 마늘을 넣어 따뜻한 물을 부어 온면으로 먹는데, 스프를 찬물로 만들고 다진 마늘이 없어 쌈장을 넣었더니 약간 칼칼해져서 아주아주 연한 탄탄멘 느낌이 난다. 간장이나 소금을 베이스로 하면 쇼유라멘, 시오라멘 기분을 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토리가라스프로 고깃국 베이스맛을 내고 마늘과 미소, 참기름은 풍미를 살리는 역할인 것 같아 나중에 토리가라스프, 불린 미역, 말린 새우, 간장, 참기름을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밥을 말아보았는데 이 역시 미역국에 밥 말아먹는 느낌도 났다. 숙취 때문에 힘들 때 유용할 것 같다. 오늘도 이렇게 날림요리 스킬이 하나 더 늘어나는구나.



그런데 아무리 여름이래도 이것만 줄곧 먹으면 야채가 좀 부족해질 것 같은데... 가만 보자, 시금치나 숙주나물을 참기름에 무쳐 올리면 어떨까. 아니면 데친 청경채라던가? 아, 잠깐잠깐. 이러다 10분 컷 날림요리가 아니라 진짜 라멘 하나 끓여내게 생겼다. 부족한 야채는 별도로 보충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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