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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14. 2024

갑작스러운 여름의 시작은 냉소바와 함께

어제 '여름이 오면 다육이 물뿌리개를 어디다 치워버려야지' 운운하는 문장을 썼다. 여름이 바로 다음 날 오픈 예정인 줄도 모르고. 아니, 35도까지 올라갈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몸도 머리도 35도가 어떤 거였는지 잊어버리고는 아, 덥겠네, 창문 활짝 열고 다육이들도 밖에 오래 내놓지 말아야겠다, 만 생각하고 말았다. 이제야 작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밤낮 할 것 없는 따뜻하고 눅눅한 공기,

잠깐 창가 근처에 서 있었다고 금세 따끔따끔해지는 팔,

마를 새가 없는 뒤통수, 그리고 뜨거운 발바닥.


바로 지금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며 초장부터 이렇게 급발진하기 있기, 없기?

있기,라고 깔깔대는 사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으, 더워.




그래, 오늘은 아침부터 이상한 날이었다.


9시도 전에 청소와 빨래를 모두 끝마치고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막 노트북을 켠 찰나였다. 어디선가 유리병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쓰러지는 굉음이 들리더니 이어서 중년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소리가 하도 크고 가까워 밖을 내다보니 도로에 이상한 모양새로 멈춰 선 닛산 노아 운전석에서 50대 남성이 비틀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경찰차가 사이렌을 크게 울리며 달려오고 한참을 현장을 정리하고는 운행 불능상태의 노아는 렉카가 와서 끌어갔다.


자극이래 봐야 제비가 집 짓는 정도의 평온한 동네에 아침 댓바람부터 불온한 무드가 조성되었다. 인근 주민들도 저마다 집 밖으로 나와 현장을 보며 속닥거리고,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커튼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공권력 제복인들이 자아내는 사건감이 갑자기 찾아온 여름 더위와 맞물려 흉흉함이 배가 되었다.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뭐가 있었는지, 오전 중에 서너 번이나 사이렌이 연달아 울렸다. 종일 마음이 심란했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밖에 나가보았는데 생각보다 큰 사고였던 듯했다.


전봇대

옆에서 튀어나올 길이 없는데 어떻게 철제 울타리가 무너지고 저 위치의 전봇대까지 들이받은 걸까. 전봇대 윗부분은 용케 전선에 매달려 있는데 다행히 전기는 끊기지 않았다. 가뜩이나 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오늘 정전까지 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운전 연습하던 길이기도 해서 남다른 위기감도 든다. 어쩌다 저런 사고가 난 걸까. 께름칙하지만 어쨌든 인명피해는 없으니 다행이고, 나도 당분간은 핸들을 쥐지 말자.


냉소바

여느 때처럼 이 근방만 어슬렁 거렸을 뿐인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심신이 피곤하다. 입맛도 없어 아침부터 얼음 넣은 녹차만 마시고 있었는데 오늘은 금요일이니 이쯤 되어 뭔가 먹어야 한다. 오늘은 퇴근길의 남편이 '뭐 필요한 거 있어?' 하고 물어볼 것이고 나는 거기 내가 마시고 싶은 술 이름과 '나머지는 너 먹고 싶은 거' 라 대답하거나, 그 전화통화에서 안주를 결정하고 재료와 술을 사러 가는 것이 요 몇 주간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점심은 뭘 먹어두는 것이 토요일 아침에 괴롭지 않을 것이다. 


뜨거운 걸 먹고 싶지 않아 차가운 소바를 만들기로 했다. 팔팔 끓는 물에 소바를 넣고는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다가 가끔씩 가서 뒤적이기만 해도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익은 소바는 흐르는 찬물에 씻어 식히고, 냉장고에서 멘쯔유와 물, 얼음, 텐카스, 잘게 썬 파, 와사비를 꺼내 한 그릇에 탈탈 부어 넣었다. 차가운 것일 텐데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쩐지 미적지근하게만 느껴지는 면과 멘쯔유를 다 들이마시고 나서야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땀도 멈추고 묘한 불안감도 잦아들었다.


내일부터는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없을 것이라 한다. 얼음도 떨어지지 않게 더 자주 얼리고, 밤에 베고 잘 얼음베개도 냉동실에 넣어두어야겠다. 올여름은 참 요란하게도 시작되었다. 엊그제 다육이들에게 활력제를 미리 주어서 다행이다. 오랜만의 냉소바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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