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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n 05. 2024

그 팬케이크가 유달리 맛있었던 이유

그런 날이 있다. 이제까지와 똑같이 했을 뿐인데 유독 '어, 괜찮은데?' 싶은 날.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을 먹고 뒤늦게 '내 남편과 결혼해줘'를 보고 있는데, 화면 안에서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는 걸 보니 달다구리 생각이 났다. 마침 핫케이크 믹스와 두유가 있던 것이 떠올라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아침에 미소시루를 만드느라 쓴 된장 머들러가 나와있어, 큰 대접을 꺼내 믹스가루와 계란, 두유를 붓고 거품기 대신 그걸로 휘휘 저었다. 눕혀두었던 것이라 그런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오는 두유는 설탕이 들어간 조제두유다. 팬케이크가 더 달아질 것 같지만 매일 먹는 것도 아니니 가끔은 괜찮겠지.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면 된다.


"치이익"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국자로 반죽을 떠 올리자 벌써부터 먹음직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부침개 굽는 기분도 난다.


그런데 오늘따라 팬케이크가 너무 잘 구워진다. 수플레 믹스를 쓴 것도 아닌데 폭신폭신 예쁘게 부풀어 올랐다. 구멍이 보글보글 올라와 뒤집었더니 어쩜, 색깔도 먹음직스럽다.



'가루 몇 그램, 우유를 몇 미리 넣으세요'라고 쓰여 있다 해서 계량컵과 주방저울로 재어가며 굽지 않는다. 한 요만큼? 이 정도? 눈대중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반죽의 상태는 항상 제각각. 팬케이크뿐만이 아니라 모든 요리가 그렇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맛을 재현할 수 없는 요리도 있다. 오늘의 팬케이크도 그럴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잘 구워진 팬케이크.



잠깐 다른 반죽을 한국자 새로 떠 넣는 사이, 더 달으라고 남편이 꿀까지 뿌렸다. 그런데 기름도, 화력도 똑같은데 오늘은 왜 이렇게 폭신 거리고 예쁘게 구워졌을까. 우유가 아니라 두유를 써서 그런가? 아니면 거품기 대신에 쓴 된장 머들러가 반죽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나게 한 걸까?


유독 맛있게 구워진 팬케이크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낮에 출출해져서 두유를 마시려고 따랐다. 컵에 떨어지는 기운이 뭔가 묵직했다. 

두유를 오래 눕혀둬서 그런 줄 알았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은 뭔가 촉이 와서 마셔봤더니, 와 이런 세상에. 시큼하다. 냉장고 안에 너무 오래 둔 것이다. 팬케이크가 보기 좋게 부풀었던 것도,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던 것도 '발효(라고 쓰고 상했다라 읽는다)'된 두유를 써서 그런가 보다. 맛있는 신김치로 끓인 맛있는 김치찌개처럼? 아니 근데 이 시큼한 두유가 들어갔는데 팬케이크는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그리고 왜 배탈이 나지 않았지? 양이 적어서 인가. 아니면 평소에도 유통기한 간당간당한 걸 알뜰살뜰 먹어치워 와서 내성이 생긴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부부가 나란히 비극의 일요일을 맞이할 뻔했다. 이상하게 완벽했던 그 팬케이크가 설마 독을 품고 있었을 줄 그 누가 예상했을까. 역시 뭔가가 아무 이유 없이 잘 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사 모든 일에는 뭐든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상한 두유가 들어간 퍼펙트한 팬케이크처럼, 때론 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뭐가 갑자기 잘 될 때에는 나 잘났다 자만하지 말고, 뭐가 잘 안 풀릴 때에는 다짜고짜 난 왜 이러지 자학하지 말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유를 찾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뭐지, 이거 마치 팬케이크 먹고 한번 죽었다 깨어나서 인생 2회 차 된 느낌인데, 갑자기.


변명하자면, 평소 두유는 잘 마시지 않아 뭘 잘 몰랐다. 시골에서 직접 짠 들기름을 냉장고에 오래 넣어두면 병 바닥에 뭐가 가라앉는 것처럼 두유를 따랐을 때 흘러나오던 액체와 푸딩 사이의 그 울컥거림도 단지 그런 종류의 현상일 거라 생각했다. 뭐든 냉장고에 넣어두면 며칠 정도는 괜찮아, 하고 넘어가던 나의 안일함에 도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곧 여름이 온다. 냉장고 속 재료관리에도 신경 써야지.




"뭐야? 뭐 할 말 있어?"

"일요일에 먹은 팬케이크 말이야."

"응, 그게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남편은 아직 그날의 진실을 모른다.

내가 당신에게 먹인 그 맛있는 팬케이크는 실은 상한 두유로 만든 것이었다고 고백하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내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고,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지 않는가. 다음에는 신선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팬케이크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속죄하리라. 미안해, 여보. 호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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