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이제까지와 똑같이 했을 뿐인데 유독 '어, 괜찮은데?' 싶은 날.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을 먹고 뒤늦게 '내 남편과 결혼해줘'를 보고 있는데, 화면 안에서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는 걸 보니 달다구리 생각이 났다. 마침 핫케이크 믹스와 두유가 있던 것이 떠올라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아침에 미소시루를 만드느라 쓴 된장 머들러가 나와있어, 큰 대접을 꺼내 믹스가루와 계란, 두유를 붓고 거품기 대신 그걸로 휘휘 저었다. 눕혀두었던 것이라 그런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오는 두유는 설탕이 들어간 조제두유다. 팬케이크가 더 달아질 것 같지만 매일 먹는 것도 아니니 가끔은 괜찮겠지.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면 된다.
"치이익"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국자로 반죽을 떠 올리자 벌써부터 먹음직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부침개 굽는 기분도 난다.
그런데 오늘따라 팬케이크가 너무 잘 구워진다. 수플레 믹스를 쓴 것도 아닌데 폭신폭신 예쁘게 부풀어 올랐다. 구멍이 보글보글 올라와 뒤집었더니 어쩜, 색깔도 먹음직스럽다.
'가루 몇 그램, 우유를 몇 미리 넣으세요'라고 쓰여 있다 해서 계량컵과 주방저울로 재어가며 굽지 않는다. 한 요만큼? 이 정도? 눈대중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반죽의 상태는 항상 제각각. 팬케이크뿐만이 아니라 모든 요리가 그렇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맛을 재현할 수 없는 요리도 있다. 오늘의 팬케이크도 그럴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잘 구워진 팬케이크.
잠깐 다른 반죽을 한국자 새로 떠 넣는 사이, 더 달으라고 남편이 꿀까지 뿌렸다. 그런데 기름도, 화력도 똑같은데 오늘은 왜 이렇게 폭신 거리고 예쁘게 구워졌을까. 우유가 아니라 두유를 써서 그런가? 아니면 거품기 대신에 쓴 된장 머들러가 반죽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나게 한 걸까?
유독 맛있게 구워진 팬케이크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낮에 출출해져서 두유를 마시려고 따랐다. 컵에 떨어지는 기운이 뭔가 묵직했다.
두유를 오래 눕혀둬서 그런 줄 알았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은 뭔가 촉이 와서 마셔봤더니, 와 이런 세상에. 시큼하다. 냉장고 안에 너무 오래 둔 것이다. 팬케이크가 보기 좋게 부풀었던 것도,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던 것도 '발효(라고 쓰고 상했다라 읽는다)'된 두유를 써서 그런가 보다. 맛있는 신김치로 끓인 맛있는 김치찌개처럼? 아니 근데 이 시큼한 두유가 들어갔는데 팬케이크는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그리고 왜 배탈이 나지 않았지? 양이 적어서 인가. 아니면 평소에도 유통기한 간당간당한 걸 알뜰살뜰 먹어치워 와서 내성이 생긴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부부가 나란히 비극의 일요일을 맞이할 뻔했다. 이상하게 완벽했던 그 팬케이크가 설마 독을 품고 있었을 줄 그 누가 예상했을까. 역시 뭔가가 아무 이유 없이 잘 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사 모든 일에는 뭐든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상한 두유가 들어간 퍼펙트한 팬케이크처럼, 때론 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뭐가 갑자기 잘 될 때에는 나 잘났다 자만하지 말고, 뭐가 잘 안 풀릴 때에는 다짜고짜 난 왜 이러지 자학하지 말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유를 찾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뭐지, 이거 마치 팬케이크 먹고 한번 죽었다 깨어나서 인생 2회 차 된 느낌인데, 갑자기.
변명하자면, 평소 두유는 잘 마시지 않아 뭘 잘 몰랐다. 시골에서 직접 짠 들기름을 냉장고에 오래 넣어두면 병 바닥에 뭐가 가라앉는 것처럼 두유를 따랐을 때 흘러나오던 액체와 푸딩 사이의 그 울컥거림도 단지 그런 종류의 현상일 거라 생각했다. 뭐든 냉장고에 넣어두면 며칠 정도는 괜찮아, 하고 넘어가던 나의 안일함에 도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곧 여름이 온다. 냉장고 속 재료관리에도 신경 써야지.
"뭐야? 뭐 할 말 있어?"
"일요일에 먹은 팬케이크 말이야."
"응, 그게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남편은 아직 그날의 진실을 모른다.
내가 당신에게 먹인 그 맛있는 팬케이크는 실은 상한 두유로 만든 것이었다고 고백하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내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고,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지 않는가. 다음에는 신선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팬케이크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속죄하리라. 미안해, 여보. 호호..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