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보다 더 무서운 것 (6)
목요일, 비자 갱신을 마치고 게임센터에 갔다. 올림픽을 보며 탁구를 치고 싶다 생각한 지 어언 2개월 만의 일이었다.
30분간의 재미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바로 다음 날, 다른 현에 있는 그 게임센터에 또 가고 말았다. 뭘 알고 치는 것은 아니지만 공을 따라 몸을 날리다 보면 여기가 올림픽 결승전. 라켓에 공이 닿을 때의 쾌감, 탁구공이 네트를 넘어 건너편 진영에서 경쾌하게 튀는 소리도 매력적이었다. 땀이 비 오듯 했지만 더워서 흘리는 땀처럼 끈적이지 않고 아주 산뜻했다.
"몸을 움직인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기분 좋은 일이구나. 아, 시에서 운영하는 체육관 있잖아. 거기서 탁구대 빌릴 수 없을까?"
집에 와 저녁을 먹으면서도 탁구 생각으로 즐거운 금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누와의 전화를 끊은 뒤에도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남편은 묘하게 시누 편을 들었다. 나는 이런 남편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 자기 어머니의 행동에 느낀 불쾌감을 참다 참다 처음으로 고백했던 내게 '에이,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닐 거야'라고 두둔했던 했던 그때가 그랬다.
나는 이제 와서 시누와 잘 지내볼 생각은 없다. 실망을 거듭하면서 내게 있어서 시누는 '혼인관계로 주어진 어쨌든 나의 가족'이 아니라 '남편과 유전자 나눠가진 남'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가 내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납득하고 말고 와는 별개로 내 부의 감정을 그녀에게도 나눠 들게 하고 '이 사람은 그런 걸 싫어하니까 이제 그러지 말아야겠다'란 생각이 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데 남편은 희망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자에게 한번 분노를 터뜨리고, 저쪽이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하면 아 그래? 일부러는 아니구나 하고 뜨거운 화해의 악수와 함께 앞으로의 관계개선을 꿈꾸는 듯했다.
이제 겨우 이해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시누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 시누를 만나기에 앞서, 우리 둘의 입장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시누의 결혼피로연에 갈 생각이 없다는 말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왕래를 할 수 없어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우리 부모님은 나중에 뵈러 갔다. 그때 시어머니가 '유이노 (結納, 함 비슷한 것) 대신에' 라며 들려 보낸 선물용 과자는 그녀가 퇴직할 때 회사에 남긴 선물 정도의 것이었다. (슈퍼에서 파는 마른안주는 완전히 논외다.) 우리 부모님께 함 대신이라고 전하기도 부끄러운 그 개떡 같은 것들을 받아 들고 나오는데 현관 앞에서 본인 선물 사 오라고, 난 안티에이징 화장품이 좋더라 하며 돈을 주셨다. 우리 부모님 드리라고 준 선물 가액보다 더 컸다. 무시를 해도 정도가 있지. 집에 오는 차 안에서도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나 진짜 어이없는데 지금."
"미안. 그 아줌마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돈 더 보태서 좋은 사케 사가자."
일본으로 돌아온 뒤, 우리 부모님께서 주신 선물을 들고 시댁에 갔다. '마음에 드시게 잘하고 왔냐?'는 시아버지 말에 시모가 '결혼했는데 무슨 그런 걸 따져'라고 대답했다. 당신 아들내미를 직접 만나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건 우리 부모님이 판단할 일이지 시모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받은 선물에 감사하단 말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했다.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나 싶은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낳고 키운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무례해도 될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데 당당히 그러니 더 참을 수가 없다. 당신들이 아들 부모가 아닌, 딸 부모일 때, 따님의 결혼에는 어떤 태도를 보일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줘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오늘 저쪽 부모님이랑 상견례야. 두근거려♡ 동생한테 문자라도 한통 넣어주렴'
아침 7시 반, 아침 댓바람부터 보고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의문의 메시지를 아들에게 보낸 시어머니는, 이후 딸의 결혼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어째서인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남편은 '그냥 말하는 걸 까먹은 거 아닐까?' 라지만, 말 떠벌리는 거 좋아하고 저렇게 신나 하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 만나면 아들 타박이나 하던 시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들떴는지 '넌 하나뿐인 여동생이 신부가 되는데 소감이 어떠냐?'며 감상을 요구했다. 남편은 그냥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11월, 시누는 결혼피로연을 연다고 한다. 몇 개월 전부터 가족 상견례에 부를 것이라고 예고의 예고를 해대더니, 정작 때가 되자 아무런 양해도 없이 '이날로 정했는데 출근해야 해서 안되지? 그냥 물어만 본거야.'라고 쌀쌀맞게 말하던 시누는, 이번엔 어찌 된 일인지 오빠의 일정을 꼬치꼬치 물으며 오빠도 참석할 수 있는 날을 고르려 하고 있다.
원래 결혼식 안 할 거라던 사람이었는데, 신랑 쪽 부모님이 '딸 보내주시는 부모님이 원하신다면 식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시고, 그 이야기를 전하니 신부 쪽 부모가 식은 해야 한다고 밀어붙여 간소한 피로연을 열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엔 양가 가족이 모여 인사하고 밥 먹는 자리라 했는데 알고 보니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중간에 오이로나오시(お色直し, 신랑 신부가 피로연 도중에 의상을 갈아입는 것) 같은 프로그램까지 있어, 소규모에 주례만 없을 뿐,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것이었다.
나와 남편도 결혼식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하지 않았다. 허례허식이라 생각한 부분도 있고, 남편 얼굴의 수술흔 때문에 우리 친척들이 남편에게 상처가 될 말과 시선을 보낼 것도 싫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정말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결혼식을 하길 원했다. 남편의 부모님은 우리의 결혼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도, 우리 부모님의 의사를 물은 적이 없다. 의사는 고사하고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영상통화로 상견례를 대신하면서 '나이도 비슷하니 애들 상관없이 우리끼리 친구가 되어 여행도 다니며 친하게 지내요. 요즘 핸드폰 번역기도 잘 되어있어요 허허' 하며 내 속 타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우리가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시모에게 전화를 걸으라 했다. 남편 말고 내가 하라고. 엄마는 나 대신 사위 앞에 맛있는 반찬 그릇을 다 밀어주며 원래는 딸한테나 하던 건데, 사위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네 하고 웃었다.
시누의 결혼은 그 집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우리 부모님의 대비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시누 자신의 행동도 별로라 그녀의 결혼은 나로 하여금 그들을 더욱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고, 알게 모르게 내 부모에게는 불효를 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런데 내가 걔네 엄마 아빠가 눈물 찔끔하고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신랑 부모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어찌 맨 정신으로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안 갈래. 남의 경사에 가서 시작부터 끝까지 울다 올 것 같아."
분해서.
남편의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