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오케에 갔다가 무심코 리모컨의 '이력' 버튼을 눌렀다. 그 방에서 노래를 부른 다른 이들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볼 수 있는 기능이다. 다음에 예약할 노래가 금방 떠오르지 않을 때, 남들은 뭘 불렀지 살짝 커닝을 한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한국 노래 이력을 눌러보고 싶었다. 20년 전의 내가 뜻도 잘 모르는 일본 노래를 띄엄띄엄 부르던 그때처럼, 지금 일본에선 누군가 케이팝 가수를 동경하며 한국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함에.
그런데 거기서 낯익고도 낯선 이름들을 발견했다. 조용필, 이선희, 조하문, 다섯 손가락. 나보다 한 세대 위에 더 익숙할 것이고, 대다수의 일본인에게도 낯선 이름일 것이다.
통계상으로는 이 지역엔 나 말고도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60여 명 정도 살고 있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지만 분명 그중 하나가 여기 왔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방, 이 기계로 누군가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은 언제였을까. 바로 어제 일수도, 5년 전 일수도 있지만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어 잠시나마 애환을 풀어보려 부른 것임에는 분명하다.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누군가가 남기고 간 흔적은 왠지 모르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마킹도 떠올랐다. 강아지가 산책 중에 전봇대 아래를 킁킁대다 남긴 한줄기 흔적. 그것이 개들에겐 SNS 활동과 비슷한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지. 직접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그야말로 '무슨 개소리야'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알 것도 같다.
남편이 부르는 애창곡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고 고개를 끄덕끄덕 박자를 맞추어주면서도, 내 손가락은 꾹꾹 어떤 노래를 찾아 예약버튼을 눌렀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노래를 부르는 내내 생각했다. 오늘 내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가 남긴 노래의 흔적에서 작은 위안을 느꼈던 것처럼, 이 흔적이 알맞은 때에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