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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채워질 크리스마스이브를 준비하며

by 김이람

저녁식사를 일찌감치 마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문 닫기 전에 가게 세 군데를 돌아야 하니 마음이 바쁘다. 양말도 없이 구멍 송송 뚫린 슬리퍼를 신었는데 추울 겨를도 없다.


요구르트 물기 거르면 크림치즈처럼 된대. 거기에 이번에 수확한 견과류랑 꿀을 섞어 크래커 위에 올려먹는 거야. 마실 건 설탕이랑 레몬즙, 시나몬 가루를 넣고 데운 야매 뱅쇼로 하고.


그동안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들을 교환하는 차 안은 크리스마스이브 만찬이라는 미션을 받아 든 흑백요리사 팀플전 회의 못지않게 진지한 공기가 흘렀다. 전채로는 냉동실의 데친 브로콜리에 올리브오일과 콘소메를 뿌리고, 그릭요구르트 카나페로 상큼함과 씹는 맛을 더하자. 메인은 닭봉으로 만든 후라이드 치킨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라자냐 한 접시. 한국 경양식 샐러드의 정석인 케첩과 마요네즈 드레싱을 끼얹은 잘게 썬 양배추도 추가요. 첫 잔은 따뜻한 뱅쇼, 후식은 그냥 먹고 싶어서 사둔 백앙금이 든 이마가와야끼. 거의 희대의 과학기술 -전자레인지와 냉동식품- 을 활용할 거라 크게 손이 가는 것도 없고 재료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평소와 다른 느낌'에 가슴이 뛴다. 괜히 테이블도 크리스마스처럼 꾸며보고 싶어 백엔샵도 기웃거리고 싶어지고. 그렇게 밤마실은 어제와 그제, 이틀짜리로 체급을 키웠다.


평소대로라면 보글보글 끓인 나베에 더운물을 탄 소주로 몸을 녹이고 있을 시간. 차를 몰고 나가는 외출도 보통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장건강, 다이어트, 시간의 유효활용,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봤을 때 아무 날도 아닌 날에 술을 마시는 건 그만두자는 데에 극적 합의에 이른 우리 집은 '다음 날이 휴일인 날 (일반적으로는 금, 토)에만 술을 마시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딱 일주일 째다. 그리고 그 일주일 째에 크리스마스가 왔다. 일본은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니라 약간의 고민이 생겼다.


"여보, 너 크리스마스에도 안 마실 수 있어?"

"에이, 그날은 예외로 해야지. 특별한 날이잖아."

"그건 그래. 교회는 안 가더라도 아기 예수의 탄생은 축하해야지."

"너 기독교야?"

"몰랐어?"


술 없는 저녁상. 매일 반주를 마시던 사람들에겐 어딘지 모르게 맹숭맹숭하게 흘러가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래서 한주의 한가운데에 있는 크리스마스이브를 평일금주의 해금일로 지정했다. 날이 날이라 핑계도 좋고 (예수님 생일 전날에 왜 지들끼리 먹고 마시는가, 는 차치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식재료를 사러 다니는 밤마실을 끼워 넣으면 '어, 술 안 마셔도 뭔가 재밌고 뿌듯해. 금주는 좋은 거구나'라고 우리 뇌를 속여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밤마실은 꽤 근사했다. 칠한 음악을 틀고 달리는 길은 사실 5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마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 듯한 탈일상의 기분을 맛보게 해 줬다. '원래는 술을 못 마실 날'에 '마셔도 된다'는 해방감 역시 어우러져, 크리스마스이브와, 이브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이제 겨우 일주일 짼데 고것도 절제라고. 내가 체감하는 시간이 질감이 달라지다니 희한한 일이다.


때때로 '인위적인 틈'도 만들어 봄직한 것 같다. 매일 무의식 중에 행하고 느껴왔던 것들을 의도적으로 결핍시킴으로 채워졌을 때의 가치가 보다 선명해지는 느낌이랄까. 밀고 당김, 식단조절과 치팅데이, 있음과 없음, 금주와 과음(응?), 달이 동그래졌다 다시 이지러지듯,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삶. 그 사이의 간극이 있어야 비로소 채워짐도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슬슬 꽉 채워질 크리스마스이브 만찬 준비를 시작해보려 한다. 꼬마전구를 천장에 매단다거나 크리스마스틱한 빨간 접시를 사는 것은 관뒀지만 (갑자기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양모펠트로 산타모자를 쓴 쬐끄만한 눈사람을 만들어볼 생각이다. 근데 이제 막 꺼낸 참인데 남편 오기 전에 끝마칠 수 있을까. 일단 시작해 봐야지. 매년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지만 올해는 역시 좀 다르다. 시간이 더 지나도 반짝반짝 필터를 단 풍경으로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 같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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