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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가 정해졌다

by 김이람

수년 전의 공과금 납부상황을 관서에 증명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청의 증명서로는 정확한 납부일이 나오지 않아 편의점에 내고받은 영수증이 꼭 필요했다. 어제오늘 것도 아니고. 황당한 요구였지만 돈이 오고 간 흔적이나 신분 서류는 시간이 지나도 모아두는 버릇이 구명의 동아줄이 됐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외국에서 더부살이 중인 나는 나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새끼. 고맙고 기특한 나 새끼. 어화둥둥 나 새끼.


공과금 납부 영수증은 거실 책상 위 서류더미 사이 어딘가에 끼워져 있을 터였다. 막상 각 잡고 찾으려니 귀찮아 제출을 이틀 앞두고서야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돕겠다는 남편을 물리고 콧노래를 흐흥 흐흥 하며 클리어 파일 하나를 펼쳐보았다. 몇 년 전 생일에 갔던 식물원 입장권과 영화 '안녕 할부지'의 티켓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추억이 방울방울. 좋았다. 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근 3시간을 영수증의 행방을 둘러싼 사투를 벌였다. 온 집안의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열어보고 주머니도 전부 손을 넣어 종이조각이 없는지 확인했다. 내가 본 서류 파일들은 남편과 더블체크, 다시 더블체크의 더블체크까지 하며 10년 전의 영수증까지 찾아냈다. 하지만 정작 이번에 필요한 것은 모서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남편이 책상 정리했는데 그때 버린 거 아닐까? 그는 낡은 칫솔과 함께 말짱한 칫솔 스탠드까지 한꺼번에 내다 버린 전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의심의 눈초리를 읽었는지 남편이 한국어로 '아니야! 챵나!'라고 반박했다. 챵나, 가 '참나' 인지 '짜증 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억울한 표정이 그의 결백을 입증했다.


제1 용의자가 용의 선상에서 지워지고 나니 남는 것은 나였다. 이 집에서 남편 빼고 유일한 인간. 뭐,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사이, 얼핏 생각하긴 했다. 처음부터 '보관 중'이라는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이 영수증이 손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설마 이거 없다고 무슨 일이 생기려고. 이제 이런 거 모으지 말아야지'하고 마음먹었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미 한참 전에 쓰레기 수거차의 분쇄기에 갈가리 찢겨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 작은 종이쪼가리의 허상을 쫓아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영수증 모으기를 그만두려고 결심했을 때, 나는 이렇게 될 것을 상상이라도 한번 해보았을까. 귀찮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눌렀던 선택버튼이 오늘의 이 사단을 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화둥둥 나 새끼였던 내가, 삽시간에 어리석은 나 새끼가 됐다.


"여보, 이제 더 안 찾아도 돼. 이만 들어가서 자."

"그럼 어떻게 하려고?"

"없는 건 없는 거니까 있는 그대로 반성문이라도 적어내야지. 납부일자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아이고 내가 죽을죄를 지었사옵나이다아, 살려주세요..."

"............."

"그래도 한 번만 더 보고 잘게. 먼저 쉬어."

"미안, 먼저 잘게."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을 먼저 침실로 보내고, 혼자 남아 더욱 싸늘해진 거실에서 시려오는 어깨를 주무르며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후회? 아니. 후회는 실체가 있는 것에 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지 이미 삼 년도 넘은 것을 '에휴, 잘 두었어야 하는데' 하는 말을 얹어보는 것도 무용한 일이다. 다만 허무했다. 삼 년 동안이나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 여겼던 것도, 이 건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며 적지 않은 돈과 시간, 감정을 소모한 것도. 영수증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애만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일철 하나를 다시 펼쳤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더.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나를 믿고 싶었다. 아까처럼 비닐 페이지 안에 든 것들을 전부 끄집어내어 접힌 것들은 다시 펴고, 한 장 한 장 다시 살펴보았다. 미련을 부리느라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몇 장쯤 넘어갔을까. 뒷면만 보이는 영수증이 하나 눈에 띄었다. 크기도 얼추 '그것'과 비슷했지만 그런 영수증에 한두 번 속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까도 이런 게 있었던가. 반신반의하며 꺼내어 뒤집어 보았더니 그렇게 찾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 세상에. 이게 왜 아까까진 안 보였을까. 제일 먼저 보기 시작한 파일이 이거였는데! 어안이 벙벙했지만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기쁨보다도 방금 전에 '어리석은 나 새끼'가 되어버린 과거의 내가 다시 '어화둥둥'으로 격상했다는 것이 더 기뻤다. 그래, 내가 이걸 버렸을 리가 없지! 그렇게 안이하게 결정했을 리가 없어!


너무 기쁜 나머지, 영수증을 찾느라 차게 식은 몸을 온수매트에 의존하여 잠을 청하던 남편을 깨웠다. 찾았어! 찾았다고!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서도 잘됐다, 정말 다행이야 라던 남편은 다음 날 영수증에 햇빛을 쬐이며 '성스러운 영수증' 사진을 찍어 보낸 내게 '宝物ww(보물ㅋㅋ)'이라고 답신했다.


그래, 이건 보물이다. 약간의 해프닝은 있었지만, 과거의 내가 서투른 선택은 하지 않았었다는 증거이자 지금을 더 신중히 살아야겠단 깨달음을 줬으니 보물 맞지. 아니, 그냥 보물이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가보로 하자. 이 영수증은 김 할머니가 2025년 추운 어느 겨울날, 온 집안을 뒤지며 찾아낸 영수증으로... (중략) 너희들도 매일 주어지는 선택들을 허투루 생각하지 말고 미래에 지게 될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며....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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