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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반지를 거기 두고 오던 날

by 김이람

오랜만의 방문이다. 여긴가? 저기서 꺾던가? 길도 가물가물해 지도맵에 기대어 찾아갔는데, 목적지 근방에 들어서자 일순간에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그때 그대로다. 변한 것이 있다면 우리 두 사람과 제 빛을 많이 잃은 결혼반지 한쌍뿐.


"여기 맨날 밀리고 거리도 먼데 왜 이 길로 온거야? 집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었어야지."

"아니야. 어디로 가든 다 똑같아. 거기서 거기라고."

"오, 그럼 구글 맵으로 거리 재봐서 다르면 어쩔래?"

"다르면? 할복할게."

"아니 말하는 거 봐. 할복이라니. 누가 일본인 아니랄까봐."

"누가 일본인 애니랠까봬~"

"딱 기다려라. 오늘 집에 가자마자 구글맵이다."


집을 나서자마자 시작된 잔소리, 모르쇠, 으름장, 살벌한 농담.

'그때의 우리'에겐 분명 없었던 것들이다.




내 손에 반지가 끼워진 것은 결혼 후 일 년 가까이 흐른 뒤였다. 평소 액세서리를 잘하지도 않고,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뚝뚝 꺾던 손마디에는 어차피 결혼반지 같은 거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없이 살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남편이 첫 친정 방문 한 달 전쯤, 갑자기 반지를 맞추러 가자고 했다. 결혼식도 안 했는데 반지라도 끼워서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또, 한쌍의 물건을 나눠가지고 죽을 때까지 -이혼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곁에 두는 것도 근사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잠자코 뒤를 따랐다.


반지가게 점원의 예쁜 손톱들은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쇼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냈다. 반지들은 다 엇비슷해 보였고, 한번 사면 평생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더 고르기 어려웠다. 우린 미의식이 상당히 어긋나 있구나 하는 것도 새삼 알게 됐다. 제일 마지막 쇼케이스에서 극적합의에 이른 반지 한쌍은 운명적인 끌림이었을까, 꼭 이 안에서 고르고 말겠다는 집념의 결정이었을까. 점원이 '전부 보시는데 2시간은 걸리실 거예요'라고 했을 땐 아니 무슨 반지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도 아니고, 라 생각했는데 이미 1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반지 입고일은 내년 1월 중순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엔 12월에 가는데. 남편의 옆얼굴을 슬쩍 살펴보니 그 역시 오늘 계약하면 다다음 주 정도엔 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우리가 뭘 이렇게 모른다, 그치, 하는 눈빛을 주고받고 가게를 나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끼우지 않은 손을 마주 잡고 한국에 다녀왔고, 새해가 되고 나서야 한쌍의 반지를 받았다.




작은 주차장이 딸린 새하얀 반지가게는 3년 후에도 여전히 들어가기 머뭇거려졌다. 브런치에는 잘도 쓰면서, 커플로 보인다거나, 뭐 그런 알콩달콩한 그런 것들이 여전히 좀 부끄럽다. ...라고 쓰고 나니 어쩌면 그 부끄러움의 원천이 그런 곳을 드나들기엔 내가 너무 늙어있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가게로 들어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터였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들을 빼서 거치대 위에 놓고 보증서를 건넸다. 직원은 내용을 확인한 뒤, 다음엔 2월 초에 오시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반지 구입 후 3년 이내에 일회 한정으로 무료 세척과 재가공을 해준다 하여 온 것인데 솔직히 그냥 이 자리에서 슥슥 하고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 3개월이나 걸린다니. 그사이 2025년이 2026년이 될 예정이라 반지 없이 지내야 할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는 친절한 점원 옆을 차로 스치며 고개를 까닥 숙이는데 반지 없는 내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끼고 있던 것도 아닌데 약간 허전하기도 하고, 묘하게 강탈당한 듯한 느낌도 든다.


항상 근처 어딘가에 있던 반지가 곁에 없다는 것만으로 이런 기분이 들다니. 애써 기분을 풀어보려 포지티브 한 단어들을 머릿속에 늘어놓아 본다.


새해,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각오, 새로운 시작, 반짝반짝 새로 닦아져 온 반지.

그리고 거기에 헌 남편과 헌 부인,

낡아가는 우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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