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뜯어보지 않아도 뿜어져 나오는 불온한 기운. 아니나 달라. 물가와 주변 시세 상승을 이유로 이번 계약 갱신 때 집세를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도쿄에서는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것 뿐일까. 수요가 많은 대도시도, 새로운 설비를 단 것도 아니다. 이 집이라는 틀 안에서 보내는 시간의 질에는 변함이 없는데 주변 시세나 물가가 무슨 영향을 끼칠까. 어째서 〇월 〇일을 기점으로 이 공간은 더 큰 값어치를 하게 되는가. 아리송해하면서도 집주인 의사에 어쩔 도리가 있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도장을 찍은 게 2년 전 일. 매번 이러면 곤란한데. 반복되려는 역사 앞에서 이사를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린 이 집을 꽤 좋아했다. 첫인상도 그랬지만 여기서 나와 남편은 같이 춤추고 싸우며 여긴 뭉툭하게, 또 저긴 뾰족하게, 그렇게 서로를 다듬었다. 그사이 나는 남편이 추진력은 없는 대신 모나거나 까탈스럽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고, 남편은 내 빡침의 원인을 '아, 내가 뭘 잘못했나 보구나' 하고 자신에게서 찾게 되었다. 볕 잘 드는 거실에서 쓴 글은 책이 되기도 했다. 우리 집이지만 우리 소유의 집은 아닌 곳.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야 하는데도 트레이싱지에 그린 듯한 2년 전의 우리, 3년 전의 우리가 번번이 발목을 붙들었다. 마냥 행복하게 웃는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랬다.
더 고민해 볼 새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계약서가 도착했다. 이사에 대비해 벽에 묻었던 얼룩을 지우고 행거도 치우며 약간의 정리모드에 들어가 있었는데도 결단을 내리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하고, 이사비용을 고려하면 거기서 거기라 우리는 결국 이 집에 남기로 했다. 찜찜하게 오른 집세는 '추억값'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도장을 찍지 못하고 머뭇대던 어느 날. 우연히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보고야 말았다. 앞 동 빈 집 월세가가 전보다 내려가 있는 것을. 모든 조건이 우리 집과 완전히 같았던 집이다. 우리가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더 저렴해진 그 집 월세를 본 순간, '추억값'이란 예쁜 말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비리와 부정의 다른 말이 됐다.
이사 가자. 이대로 호구가 될 순 없어.
변심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관리회사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계약서 도착 확인 겸 계약의사 확인이었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남편이 '다른 동 집세는 오히려 내려갔던데 우리만 올라서...' 하고 운을 띄우니 관리회사 사람이 인상 보류와 인상폭 조정 중 어느 것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보류요." 담당 영업사원에게 전달하여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계약 갱신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계약에 대해서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다음날 아침 10시, 올 것이 왔다. 이제부터 온갖 이유를 들어 다른 동의 월세를 낮추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우리 집 월세는 올릴 수밖에 없는 연유를 구구절절 늘어놓겠지. 거기에 홀랑 넘어가선 안된다. 우리는 제비가 둥지 짓고 집 뒤 밭에서 노린재가 날아와 베란다에 뭘 널을 수가 없어 불편하다고, 그러니 월세를 현상유지해 달라고 아주 단호하게, 그러나 반드시 착하게 -싸가지 없이 굴면 그냥 나가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말하자!
"희망하신 대로 기존 계약과 동일한 내용으로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금액부를 정정한 계약서를 다시 보내드릴 테니 검토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근데 우리 집은 제비랑 노린재가 온다니ㄲ.... 어...?
"정말이요? 괜찮으세요?"
미처 시뮬레이션하지 못한 돌발상황에 남편이 갑자기 쥐가 되어 고양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쥐가 뭘 더 캐물을까 봐 빠르게 네, 문제없습니다. 서류는 다음 주 중 도착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자기가 쥐인 걸 깨달은 쥐는 고양이 마음이 바뀔까 네, 네, 하고 얼른 전화를 끊고 부부는 얼싸안았다.
"동결이다!"
말해보고 볼 일이다. 약간의 실랑이는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일본의 임대법이 세입자에게 유리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100엔이라도 올릴 줄 알았다. 어쩌면 다른 동의 공실상황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정말 이상하다. 기뻤던 것도 잠시. 마음 한편에 이내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혹시 재작년에도 인상에 동의하지 않았으면 맨 처음 월세값으로 쭉 살 수 있었을 지도?'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만 멍청하게 집세 올렸던 건가?'
'즉, 우리는 이미 호구 잡혀 있던 것?'
인간의 상상력은 독일까, 축복일까. 그런 '혹시'를 생각하다 보니 아까의 희열도 조금 밍밍한 맛이 되어버렸다. 보류가 아니라 주변 시세에 맞추어 인하를 주장했어야 하나. 그럴 거면 왜 올리려 했냐고 물어본다던가. 뭐라고 해야 덜 자극적으로, 그러나 더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었을까.
"쯧쯧, 만족할 줄 모르는 안타까운 사람 같으니. 그런 거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
끝없이 아쉬워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혀를 찼다. 기쁨은 있는 그대로를 즐겨야 한다나. 뭐. 맞는 말이다. 다른 세입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도 없지만, 혹시 그들이 첫 번째 갱신에서 'NO'를 말했고 그래서 우리보다 더 괜찮은 값에 살고 있었다 해도 그건 그 사람들이 빠르게 마음먹고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낸 값이다. 우리는 이번 차례에 그 값을 받은 것이고 나는 그저 지금 주어진 좋은 일에 최선을 다해 기뻐하면 된다. 그냥 받아들였으면 늘어났을 고정비 (또는 이사비용)을 말 한마디로 세이브할 수 있었고 우리는 이 공간에서의 추억을 조금 더 오래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