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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11. 2023

빈정 상했을 땐, 단 것을 먹자

아침부터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남편이 역린을 건드렸다. 사람은 제 도시락 만든다고 키친을 종횡무진하고 있는데, 세월아 네월아 슬로모션으로 시리얼을 떠먹으며, 핸드폰 스크롤조차 아주 천천히 여유를 즐기는 도시락 먹을 사람의 저 모습. 주부로 끌어 앉혀지기 전까진 나도 치열하게 살아봐서 알지만, 아침 시간이 저렇게 여유로울 일인가? 게다가 집에서 나가기 10분 전이다. 여유로울 수도 없는 시간. 얼른 먹고 출근 준비를 마저 하던가,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돌을 것 같아 그러는 거면 옆에 착 와서 저 들고나갈 아이스커피라도 만들던, 제 도시락 만드느라 잔뜩 널브러져 있는 조리도구라도 씻어보던가 할 것이지. 1부터 100까지 나를 종년처럼 부려먹으려 저러나 싶어 빽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평소엔 하던 것도 하필 기분 삐끗해 있을 때 철저하게 안 하는 건 또 뭐냐.


결국 싫은 소리 한마디 하고, 출근시켰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그런 거 아니야~' 하며 웃는 낯이었지만 아니긴 개뿔. 퉤퉤, 웃는 낯에 침 뱉어주마.

가뜩이나 오늘은 9시에 집을 나서는 날이라, 보내자마자 집안일하고 뭐 하고 하면 컴퓨터 앞에는 10시나 되어야 겨우 앉아볼 수 있다. 그간 미루어 두었던 연애시절 이야기를 써보자고, 어제 그렇게 결심하고 잤는데, 그런 훈훈한 이야기를 쓸 만큼, 오늘은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남편 탓일까?

나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에 쫓겨가며, 내 입에 들어갈 것도 아닌,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갈, 그렇다고 대단할 것도 없는 도시락을 땀 흘려 가며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이 무언가와 겹쳐 보여서 그런 건 아닐까?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한자 두자 정도 쳐봤지만, 겹쳐 보이던 무언가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아 아예 노트북을 접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2인용 소파라 다리가 삐죽 삐져나오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한 3시간을 누워서, 게임을 했다가 멍하니 있다가 또다시 게임을 했다가 뉴스를 읽다가, 한참을 안정을 찾지 못하다 벌떡 일어났다. 단 거, 단 거를 먹어야겠다. 달다구리 속 탄수화물이 심신을 안정시키고 머리도 휙휙 돌아가게 해 줄 거야.


싱크대의 서랍을 열었다.





핫케이크 가루가 있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컵케이크를 만들었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이제 핫케이크 가루는 없다. 대신 서랍 한쪽 구석에서 전분을 발견했다. 카라아게(*일본식 닭튀김)나 탕수육 만들 때 자주 써서 우리 집엔 전분이 항상 구비되어 있었기에, 작은 냄비를 꺼내 전분과 우유, 설탕을 넣고 가스불에 올려 휘휘 저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포지티브 하게, 네거티브 하게, 다시 포지티브 하게, 왔다 갔다 하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가급적 아무 생각 않고 눈앞의 이 하얀 국물만 휘적휘적 휘저어보려고 노력했다.



우유에 녹은 설탕과 전분가루였던 그것이 조금씩 몽글몽글 해져올 즈음에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캉말캉하게 뭉쳐진 반죽은 찬장에서 놀고 있던 플라스틱 통에 부어 모양을 만들며 식히고, 다 된 우유떡은 칼로 서걱서걱 잘라주었다. 사실은 찐득찐득했지만, 기분 좋게 한 번에 서걱서걱 잘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다 자른 우유떡 위에 설탕과 소금을 섞은 콩가루를 뿌리고, 다시 위에 꿀까지 뿌렸다.

떡 만들 때도 설탕, 그 위에 콩고물에도 설탕, 그 또 위에는 꿀.

평소 이렇게까지 이중 삼중으로 달게 해서 먹지 않지만 오늘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철없는 남편도 용서하고, 별 거 아닌 거로 급발진했던 나도 용서하고, 그렇게 용서를 다 끝내고도 탄수화물이 머리에 좀 남아있다면, 쪼랩인 나라도 조금은 생산성 있는, 글의 'ㄱ'냄새라도 나는 걸 써볼 수 있지 않겠는가.


달고 고소하다


요 근래, 은연중에 슬펐던 일이 있다.

이제 막 긴 여행을 떠나려고 역에 갔는데, 역장이 '너한테 줄 기차표는 없다. 아! 손님! 여기예요, 여기서 무료 기차표 배포 행사 합니다! 기차표 무료로 받아 가세요!' 하며, 나를 밀쳐내고 뒤에 지나가던 '그의 손님'에게 기차표를 양손으로 쥐어주고 있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일이 있었다.


내 표가 없는 이유는 있겠고, 그 이유 역시 나에게 있을 터이나, '뭐야, 내가 기차만 있는 줄 알아?' 하고 역장 눈앞에서 아이폰14 프로 맥스를 꺼내 '김비서, 데리러 와' 하고 리무진을 기다려야 멋있는데, '아, 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하고 괴나리봇짐에 고이 넣어두었던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웃챠, 그럼 이제 출발해 볼까?' 하며 무릎 왼쪽 아래 카메라 앵글에 V사인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하찮고 초라한데, 또 한편으론 굴하지 않는 그 모습이 귀엽, 아니 구엽기까지 해서 내 이 '구여움'을 모두가 알아주십사 하고, 모처럼 흡수한 탄수화물 빨로 지금 이런 글을 싸지르고 있는 것이다.


'왜 저런 사람한테 기차표를 주나요' 하는 의견도 십분 이해가 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닌 '왜 저런 사람'에게 기차표를 주는 이유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중도론은 잠깐 놔두고,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저런 사람' 쪽에 더 가까울 텐데, 기차표를 받은 저런 사람은 되지 못한, 기차표를 못 받은 저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베일에 싸인 모종의 이유로 기차표를 못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텍스트 과잉 시대에 쓸데없이 부지런하기만 한 쓰레기 양산자 판정을 받은 것 같았다. 선택받지 못한 소외감 보다도, '넌 서버 데이터나 야금야금 갉아먹는 쓰레기 양산자야. 하하하하하 ^^' 판정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난 진짜 구여운 사람인게, 그 와중에 '이래서 그랬나?' '저래서 그랬나?' '그럼 이렇게 하면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아이디어 운운 하는 글을 썼는데 (기승전 남편이 내 결혼반지 끼고 나간 이야기가 되었지만) 하루종일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하면 잘되겠지? 아니야... 그런다고 잘 될 것 같으면 이미 잘 됐었어야지... 아니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반인걸! 아니야... 잘 되는 사람은 그것보다 더 빨리 잘 돼..., 이중인격 모노드라마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도, 이번 일은 이번 일대로 내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굳건히 해 줄 하나의 계기가 되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쌓인 부의 감정은 외면하고 마냥 건설적으로만 생각하려 했더니 마음에 모가 난 모양이다.


그래도 탄수화물 먹고, 이거 이만큼 쓰고 나니, (처음엔 화가 났는데) 마음이 평화로워져 오는 걸 느낀다.

그것이 비록 오롯이 단 것이 주는 심신의 안정은 아닐지라도,

잊지 마, 기분이 별로일 땐 단 것, 탄수화물을 먹자.

좋은 글은 못 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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