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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10. 2023

그걸, 어째서 네가?

하루종일 몰랐다니

오늘은 생각이 많아져서 개점휴업을 하려고 했다.

대신 혼자 있는 낮시간에 이것저것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종종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생각해 낸 나 말고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했다.  


그렇게 기다렸던 남편이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그를 붙들고 아까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을 잊어버릴세라 일장 브리핑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덥고 끈적여 당장이라도 물줄기를 뒤집어쓰고 싶었을 남편은 싫은 내색 하나 않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의 입장에서는 알듯 말듯한 이야기들에, 가끔 가다 일본어도 막혀 띄엄띄엄하는 이야기가 답답할 법도 한데 인내심 좋게 끝까지 듣고 그 나름의 어드바이스도 해 주었다.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이야기라, 이쯤 하면 됐다 싶어 슬슬 그를 풀어주려고 했다.


"고마워.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샤워부터 해"

"응. 씻고 올게"


남편은 자신의 왼손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손에 물이 닿을 일이 있을 때 말고는 결혼반지를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그는,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반지부터 빼서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다. 나 역시 처음엔 그랬지만, 요즘처럼 날도 더운데 반지까지 하고 있으면 더 덥고 괜스레 손가락이 무겁게 느껴져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반지를 끼지 않은지 어언.....


"엣?!"


마지막으로 반지를 낀 것이 언제인지를 되새겨보고 있는데, 남편이 뭔가에 놀란 듯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유를 묻는 내게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어디서 많이 본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평소 반지를 하지도 않는데 결혼반지를 맞추는 것이 허례허식 같다 느낀 나와 달리, 남편은 '결혼식도 안 하는데 커플 아이템으로 반지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겠냐', '남자의 결혼반지는 어른의 증표이자, 사회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액세서리'라며, 결혼반지를 동경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하고 반지를 보러 간 것이 작년 11월. 장장 2시간에 걸쳐 매장을 한 바퀴 도는 반지 투어가 다 끝나갈 무렵, 남편이 원했던 스트레이트 디자인과, 내가 원했던 꼬임매듭 스타일이 딱 맞게 절충된 반지를 발견했다. 그 길로 속전속결 주문에 들어갔다.


나는 손가락 마디를 꺾는 버릇이 있어 여자치고 손가락이 굵은 편인 반면, 남편은 뼈마디만 두껍고 반지가 끼워지는 부분은 정말 가느다래서, 나와 남편의 반지는 0.5호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디자인도 다이아가 있고 없고의 차이밖에 없어, 얼핏 보면 어떤 게 누구 반지인지 잘 모를만하긴 하다. 나는 언제나처럼 테이블 위에 반지를 방치해두고 있었고, 남편은 아침 먹은 그릇 설거지 한다고 잠깐 빼 두었다가 출근시간에 쫓겨 대충 이건가, 하고 손에 잡히는 걸 끼우고 나갔을 것이다.






"그럼 하루종일 몰랐어?"

"응."

"반짝반짝하는데도?"

"응."


아니, 사람이 이렇게나 관찰력이 없을 수가 있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데,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적반하장 눈을 흘긴다.


"근데 반지를 여기 올려만 두고 하루 종일 한 번도 손에 안 끼운 거야?"

".... 샤워나 하러 가셔"


아무래도 우리 집은 여자랑 남자가 반대인 것 같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 지금 4시간 정도 줄곧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

9시간 동안 의도치 않게 결혼반지를 약탈당한 뒤, 갑자기 반지의 소중함을 느끼고 잘 챙기고 있는 사람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냥 손가락에 보관 중이다. 안일하게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가 또 내 것을 끼고 나갈까 봐.


보라, 오늘은 어찌어찌 들키지 않고 넘어갔지만, 언젠가 드디어 회사 동료가 눈치채고, '어 그거 여자 반지 아니야?' 하고 물어봤을 때, 뭐라 한단 말인가. '아, 와이프 반지를 하고 나왔네' 하고 대답할 남편도, 남자 손가락에 버금갈 정도로 굵은 손가락의 소유자임이 만천하에 드러날 나도, 부부가 일타이피로 부끄러워질 것이 뻔하다. 당분간은 잘 챙겨야겠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건 소용없어도, 소가 다시 돌아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개점휴업 하려 했는데 글감 고마워,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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