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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ug 25. 2023

금토일 가계부 지출항목의 '파'가 의미하는 것

살림 노하우도 없고, 이게 주부인가 백수인가 가물가물한 나지만 주부로서 유일하게 딱 하나 잘한 것, 잘하는 것이 있다면, 가계부를 적는 것이다.


요즘 세상엔 영수증을 스캔하면 자동으로 촤라락 입력해 준다는 어플도 있지만, 나도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 건지, 손으로... 는 아니지만 나 보기 편하게 만든 엑셀파일에 일일이 입력해야만 속이 시원하다. 고정지출과 유동지출을 나누어 예산을 결정하고, 정해진 예산을 항목별로 쪼개 한 달의 살림살이를 계획한 뒤 소비가 발생할 때마다 언제, 어디에, 무슨 일로, 어떤 결제수단으로 샀는지 정리하고 한 달에 한번, 남편과 함께 한 달간의 씀씀이를 되돌아본다.


가계부를 쓰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은, 결혼 후에도 독신자의 씀씀이를 가지고 있던 돈에 대한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침에 거실이 추운게 싫다'며 일어나지도 않을 시간에 예약을 걸어, 아무도 없는 거실을 1시간 이상 문손잡이까지 뜨끈하게 달구는 등, 편리에 젖어 전기를 낭비하던 습관도 가계부 써서 보여줬더니 싹 사라졌다. 결혼 후 내가 습득한 잔소리 스킬, '뭐뭐 안 하면 죽냐?' (활용예: 일어나서 거실 나왔을 때 온풍기 안 틀어져 있으면 죽냐? 집에 포테토칩 없으면 죽냐? 담배 안 피우면 죽냐?) 도 등장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저축액도 늘어 티끌 모아 태산을 실감하는 중인데, 그랬던 우리 집 가계부에 요즘 어떤 글자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지출항목란의 '파'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반드시 등장하고 마는 '파'.

물론 우리가 아는 그 '파'는 아니다.






요즘 남편과 내가 동시에 푹 빠진 것이 있다.

금토일의 홈파티다.


홈파티라 해도 누굴 초대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호스트 나, 게스트 나. 아니다, 둘이니까 호스트 나와 남편, 게스트 나와 남편.

원래부터 금토일은 먹고 마시는 날이었지만, 남편이 요리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둘이 같이 그날 마실 술에 어울릴 메뉴 서너개를 골라, 함께 요리해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하며 먹고 마시고 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손 네 개가 만드니 속도도 빠르고, 나란히 주방에 서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만드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특히 낮술을 준비할 때에는 '주말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란 특별함마저 추가되어 양손은 무브무브, 다리는 두둠칫.


파티다.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오전에 주로 재료를 사러 가는데, 사실 그 날 뿐 아니라 그다음 날에도 우리는 파티를 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기 때문에, 남은 재료들을 조합해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다음 날 파티에 활용하는 것도 우리의 즐거움 중 하나고, 그걸 전제로 한 메뉴 선택을 중시하고 있다.


지난번엔 횟감으로 나온 연어를 사서 반은 카르파쵸를 만들고, 반은 아쿠아팟챠로 만든 뒤, 아쿠아팟챠의 남은 수프에 조개와 버섯을 추가해 봉골레 파스타로 즐겨보았는데, 파스타를 너무 많이 삶는 바람에... 먹고 나니 너무 배가 불러 낮잠을 자다가, 한숨 자고 일어나니 밤이 으슥해서 또 주섬주섬 일어나 술을 마시며 보다 만 드라마를 마저 보았다.


만두피 요리들

만두피, 소시지, 치즈로는 꿀을 넣고 튀기거나, 케첩, 치즈, 소시지를 넣어 굽고, 마늘, 설탕을 발라 돌돌 말아 오븐에 굽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치킨 타츠타를 튀기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며,



우동 위에 얹어 먹으려던 유부는, 어인 일인지 낫또와 치즈를 끼우고 구워, 와사비와 고춧가루를 각각 넣은 마요네즈에 찍어먹어 놓고는,



샐러드도 있으니 술상치곤 건강하다며 위로했다.





사실 처음엔 '파티'라고 적었다.


뭔가 좋은 일이 갑자기 생겼을 때, 예를 들어 내 글이 포털사이트 어디에 소개되었다던가, 뭐에 당첨되었다던가 하는 일이 있었을 때는 남편이나 내가 너나 할 것 없이 '오늘은 파티다!'라고 선언하고 그날 저녁은 예산 외의 지출을 허가하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 그것을 예정된 예산 내에서 만들어지는 술상과 구별하여, '좋긴 좋았지만 돌이켜 보면 부질없는 지출'이란 의미로 지출항목명을 '파티'라고 적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브레이크가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반성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파티는, '돌이켜 보면 요리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레퍼토리도 늘었고, 어느 한쪽만 하는게 아니라 부부가 공동으로 요리를 하고 있으니 이건 부질없는 지출이 아니라 자기 개발의 일환이자 부부관계를 돈독히 하는 매개체가 아닐까?', 즉, 필수 불가결한 지출이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다.


판이 점점 더 커져가는 데에 대한 당위성 조작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먹거리들과 함께 '식재료'라는 지출항목으로 적어내기엔 아직 마음속에 살아있는 일말의 양심이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질러대, 어쩔 수 없이 소심하고 작게 '파'라고만 적기 시작한 것이 가계부 금토일에 집중된 '파'의 정체이다.




오늘이 남편의 월급날이라, 8월 자 가계부는 딱 어제로 끝나고, 오늘부터는 9월 가계부로 들어간다.

오전 중에 한 달간의 영수증과 기입내역을 맞춰보면서 8월 가계부의 1/3을 채운 '파'의 정체를 재확인하고, 건전한 소비를 위한 대책마련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오늘은 조금 일찍 올 거라며 '오늘 어쩌지?' 하며 출근한 남편의 말이 마음에 걸려 '오늘은 통풍 파티 고?' 라며, 날도 더우니 (통풍을 유발한다는) 맥주와 치즈 얹은 후라이드포테이토, 콘치즈마요, 피자를 제안하는 나와,


'통풍파티라는 글자에 마음을 빼앗겼다'며 퇴근길에 맥주와 포테이토, 피자를 까먹지 않고 사 오겠다 다짐하는 남편은, 만나도 참 자알 만났다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파'가 '파산'의 '파'가 되지 않도록, 정도껏 하자, 정도껏.

(파티 안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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