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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19. 2023

주말엔 짜파게티 요리사였는데

짜파게티 요리사에서 미용사로 전향한 이유

"여기 뒷머리 좀 이발기로 밀어주지 않을래?"


남편은 총각 때부터 옆은 짧고 위는 긴 투블록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짧은 머리는 금방 자라서 그때마다 미용실을 가기는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가정용 이발기로 직접 머리를 깎곤 했다. 본가의 세면대에는 거울로 된 서랍장 문이 세 개 달려 있어서, 전부 열고 각도를 잘 맞추어 서면 뒷머리도 보였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그런 게 없다 보니 뒷머리까지 혼자 미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앞머리 밖에 잘라본 적 없던 내게 다가온 갑작스러운 잔디 깎기 제안은, 약간의 두려움이 발라진 매혹적인 사탕이었다. 일본의 미용실 커트비용은 최소 3000엔, 삼만 원 돈. 남자머리야 어차피 금방 자라고 왁스 바르면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한 달에 한번 꼴로 고정지출을 만들어가며 굳이 기술을 사서 자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나는 종종 참이슬 단위로 물건값을 셈해보는데, 3000엔이면 참이슬을 10병 살 수 있는 10 참이슬이다. 머리 한번 자를 돈으로 참이슬 10병이라니. 게다가 이발기로 미는 건 남편도 혼자 하던 거니까, 초보자인 내가 해도 그렇게 망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기왕 하는 김에 앞머리 자르던 미용가위로 윗머리까지 자르면, 나는 참이슬 10병, 주말만 마셔도 2주는 족히 마실 수 있는 참이슬 10병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잿밥에 대한 관심과 효율적인 가계운영을 이유로, 주말엔 짜파게티 요리사이던 나는 주말 미용사로의 전향을 결정했다.






시작은 호기로웠지만, 나는 곧 절망에 부딪혔다.

기술을 사서 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망언을 늘어놓았던 나를 후회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매우 그랬다.


특히 뒷머리. 목덜미에서 뒤통수 중간부까지는 점점 더 길어지게 해서 윗머리와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술이 없으니 뒤통수가 아예 납작해지거나, 윗머리와 아랫머리에 단차가 져서 꼭 뚜껑 덮어놓은 것처럼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이발기의 클리퍼 잭을 똑같이 5미리에 맞췄더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손에 가한 힘과 각도에 따라, 일부 범위에 주위 머리보다 확연히 짧게 깎인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두 글자로 '땜빵'이라고 하는 그것은, 잠깐 정신줄을 놓은 순간, 그 찰나의 시간을 틈타 어김없이 찾아왔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다 밀리지 않아도, 하얀 두피가 손을 흔들며 '여기예요, 여기가 땜빵이랍니다'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럴 때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묵묵히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데,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럼 내 커트 연습대, 아니 남편은 지금 머리에 무슨 일이 생겼냐고 다급하게 묻지만, 십중팔구, 나는 거짓을 고한다.


"아냐, 괜찮아"


나중에 자르려고 했는데 지금 잘렸다고, 어차피 거기 옆에도 자르려고 했다고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고는 작업을 계속한다. 거기 옆에도 자른다고 땜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렇게 나도, 남편도, 미용사라는 직업의 소중함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9개월 정도, 계속해서 남편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미용실과 같은 퀄리티는 물론 낼 수 없지만, 왁스로 어떻게든 얼버무려 볼 수는 있고 (물론 땜빵은 안된다) 한번 10 참이슬을 아껴본 성공경험이 역시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머리가 잘 잘리고 있는 날은 원장인 엘리자베스, 어째 영 불안하다 싶은 날은 수습 1개월 차 신참 미용사 캐서린이 머리를 만지고 있다는 약간의 상황극도 덧붙여가며, 나와 남편은 내 기술의 성장과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번 자르면 뒤로 되돌릴 수 없는, 위험한 미용실 놀이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그 덕에, 지금은 그 만들기 어렵던 뒷머리도 유튜브에서 배운 대로 손목 스냅을 이용해 모양을 만들고, 윗머리를 커트할 때에는 머리는 어차피 자란다는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며 과감하게 가윗날을 대곤 한다.


돈 주고 자를 때는 '어째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며 차에 달린 거울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뾰로통하던 남편은, 그때보다 더 더 더 더 더 더 좀 아닌 것이 분명한 '가내수공업 커트'에는 매번 만족하고 있다. 땜빵을 만들었을 때조차, '내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괜찮다'며 그 땜빵을 제외하고 자기 눈에 보이는 곳에서 만족스러운 부분을 찾아내 만족해했다.


이건 공짜기 때문에 만족감의 허들이 낮아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백두산 호랑이를 쏙 빼다 박은 한국제 와이프의 기백이 무섭기 때문일까?


어쨌든 원효대사 해골물이다.

 






처음엔 앞머리 가위와 이발기, 빗으로 단출하게 시작한 나의 도구들은, 숱가위, 집게핀, 고무줄까지 동원되며 나름 이발세트가 갖추어졌다. 따로따로 놔두는 것도 뭐 해, 다이소에서 플라스틱 케이스를 하나 사서 한꺼번에 모아두었다. '오늘 머리 자른다!' 하면 거실 티비장 안에 넣어둔 이 상자를 쏙 들고 오면 된다.


머리를 자르는 장소와, 작업에 걸리는 시간도 변화했다.

처음엔 머리카락 처리를 쉽게 하려고, 얇은 속옷만 입힌 남편을 추운 욕실에 앉혀놓고 2시간 정도 오들오들 떨게 했는데, 거실을 머리카락 폭탄 폭발 장소로 만들거나, 진공청소기를 혹사시켜 모터가 멈추는 등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거실에 의자형 수납박스를 놓고 앉게 하고,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헤어 캐쳐를 씌워서 뒤처리도 금방 끝낸다. 1시간 정도면 모든 작업이 끝나게 되었으니 9개월 전의 절반이다. 한 달에 한번, 주말 하루만 하는 미용사인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성장세라 자부한다.


요즘 들어 남편은,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의 사진을 찾아 나에게 들이밀곤 한다.

이렇게 잘라달라며. 아니 근데, 그게, 내가 그렇게, 야, 어떻게 자르는지 몰라.


그래도 유튜브로 공부는 하고 있다.


검색어,

남자 머리 짧게 자르는 법

남자 머리 여름 커트  

남자 머리 윗머리 짧게

 

매달 머리 자르기 직전, 벼락치기로.






아, 그토록 애가 타게 원했던 참이슬 10병에 대해서.


막상 내 손으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자, 3000엔은 '꽁돈오예'가 아니라 '원래부터 쓰지 않아도 될 돈' 카테고리에 들어가 녹색 병 대금으로 3000엔을 한꺼번에 투척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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