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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아빠 Oct 24. 2023

맞는 말이라고 해서 다 말해선 안된다

                                                                                                                                                2022. 10. 15.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요, 유튜브의 수 많은 콘텐츠에서 ‘참교육’, ‘사이다 복수’에 관련된 서사가 넘쳐흐른다. 억울한 소시민을 대변하여 기득권층에 맞서는 변호사, 경찰에서부터 합법적인 선을 넘어 악을 응징하는 정의의 사도까지. 이젠 지겨울 법도 한데 그럼에도 우리는 ‘복수’와 ‘응징’에 열광한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인가에게 불만이나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콩 심은데 콩이 나지 않고, 심은대로 거두어 들여지지 않는 것이 인생의 적나라한 현실이기에 우리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 적어도 우리 시각에서는 말이다 – 사건과 대상에 분노한다. 나를 분노케하는 그(혹은 그것)이 폭삭 망했으면 좋겠다. 가혹한 심판, 흔히 말하는 ‘천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혹은 그것)은 끄떡이 없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잘 살기만 한다.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나다. 

  

  혼자서 끙끙 앓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 놓는다. 이른 바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을 상대의 반응이 ‘용서’라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천벌은 고사하고 욕지꺼리라도 한 번 시원하게 퍼붓고 싶은데 덮어놓고 용서하라고? 고구마를 열 개쯤 먹고 목이 막혀서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라는 양반이 약이랍시고 또 고구마를 주는 꼴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공감이 상담의 기본 아냐?’ 라든가 ‘그래도 용서해야지, 용서는 자신을 위한거야’ 등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뉘겠지만, 적어도 당사자가 무척이나 답답해하고 있을 것임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상담의 원칙, 공감의 기술 같은 것은 말할 생각이 없다. 단지 나의 경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군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만큼 매우 억울하고도 아픈 사건을 경험했다. 안그래도 살집에 없는 체형인데 몸무게가 쑥쑥 빠지고, 약으로 잠을 청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 끙끙 앓다가 상급자에게 조심스레 속마음을 드러냈을 때 ‘그’가 나에게 꺼낸 첫 단어가 바로 ‘용서’였다. ‘빌어먹을 놈의 용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귀를 닫았다. 대화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지만 – 대부분은 그(라고 쓰고 꼰대라 읽는다)의 훈계였다 – 실질적인 대화는 그의 입에서 ‘용서’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는 순간 이미 종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입과 귀를 닫은 나는 그의 입(이라 쓰고 주둥아리라 읽는다)을 지긋이 바라보며 ‘저 놈의 주둥아리를 한 대 확!’이라고 상상하며 지겨운 시간을 버텼다.   


  누가 모르는가? 용서가 최고의 복수이고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임을. 원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끝까지 용서하라 하신 옛 성현의 가르침을 누군들 모르냔 말이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나에게 자신의 관용과 아량을 입에 거품이 나도록 떠벌리니까 좋냐? 인간아!


  반면에 그는 달랐다. ‘당신은 잘못이 없다’라는 말로 입을 연 그는 앞뒤 맥락도 없는 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 주었고,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사이다보다 짜릿하고도 시원한 성토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 주었다. 욕만 없다 뿐이지 실질적 의미는 그와 같은 일갈로 나의 마음을 개운케 해 주었다. 그는 성직자였다. 오히려 ‘용서’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우선적으로 나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나와 마음을 함께 해 주었다.      

‘함께 하라’


  그가 여러 차례 이야기한 말이 기억났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기뻐하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었다. 그 이후로 그와 그의 가족이 나에게 찾아와 먹고 마시며 위로해 주었고, 지속적인 연락을 통해 나의 마음을 살폈음이 이어졌다.     


  나 또한 이전엔 상관으로서, 선배로서, 동료로서 억울함과 고민을 토로하는 상대에게 ‘용서’라는 망발을 늘어놓았음이 떠올랐다. 왜 나는 그들과 함께 분노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들과 함께 탄식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들과 함께 욕이라도 한 마디 시원하게 해주지 못했을까? 공감, 함께함을 떠나서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임은 확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억울하고 화나더라도 영화같은 복수라는 결말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은 잊혀질 것이고, 결국은 용서할 것이다. 하지만 그 용서는 자신만의 문제이다. 물론 주변의 영향과 도움의 손길이 있더라도 용서는 본인이 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문제이다. 최소한 그 상황에 직면해 있는 자에게 함부로 입 밖에 꺼내선 안될 말이다. 


  이제 어렴풋이 깨닫는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중에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 또한 깨닫는다. 분노하는 자에게 ‘용서하라’는 말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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