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오랜만에 지리산을 찾은 이유다. 요즘 많이 힘들었다. 힘에 좀 부쳤다는 표현이 맞겠다. 떠오르지 않았으면 싶은 과거의 기억들이 순서 없이 찾아와 일상을 괴롭혔다. 알고 있던 모든 사실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주변의 시선에 애써 맞춰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지치기도 했다. 괜찮다는 대답이 마냥 괜찮지가 않았다. 마치 두 개의 세상에 사는 느낌이었다. 두 명의 내가 한 곳에서는 활짝 웃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울음을 참았다. 도무지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너무 외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 덩그러니 혼자 있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내 모습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기 위해. 걸어야 해서 그냥 걸었다. 힘들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고요한 새벽이었다.
외로웠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참 아름다웠다. 풍경을 보지 못하도록 하려는지 눈물이 앞을 막았다. 일출이 시작되니 눈앞에 일렁이는 것이 햇빛인지 눈물인지 당최 모르겠더라. 가장 찬란한 시간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그들에게 보내주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어서 아주 오래된 추억부터 조금 덜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둘씩 짝을 지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촘촘히 연결된 시간의 끝에 내가 지금 서있었다. 문득, 지금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가 과거의 어떤 일이 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늘 현재를 살아내야만 하니까. 과거는 그저 과거로 존재할 때 의미가 있으니까.
그저 할 뿐이다.
배낭을 메고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오르내렸던 어제의 시간들을 기억했다. 어느 무엇도 바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일. 그러다 가끔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을 만나는 일. 그 시간을 사진과 글로 함께 기억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는 일. 그저 할 뿐인 이런 일들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살게 해주는 원동력이 아닐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