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오늘은 괜히 벽을 찍고 싶었다. 그런 날이었다. 천천히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날씨. 그냥 벽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서서 보니 그냥 벽이 아니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의 무언가가 벽에 걸려 있었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이름 모를 열매들과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얽히고설킨 넝쿨도 벽을 끌어안고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이 혹여 외로울까 살포시 붙잡아 두었고 보일락 말락 한 틈 사이로 초록색 풀잎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벽을 느꼈던 누군가의 따뜻한 손자국이 보이는 것 같았다. 팔짱을 끼고 지나갔던 연인들의 사랑이, 처음 이 거리를 찾았을 여행객들의 설렘이, 퇴근길 직장인들의 한숨이, 학생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벽에 아주 조금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을 딱 그만큼 남아있는 듯했다. 돌도, 나무도, 꽃도, 흙도, 틈도, 손자국도, 사랑도, 설렘도, 한숨도, 웃음도, 내 시선과 생각도 모두 하나의 벽이 되었다.
벽을 참 좋아하는 김민철 작가의 책 <모든 요일의 기록>에 보면, “그 벽이 내게 말을 걸었다. 멈춰 섰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그 모든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품이었다.”라는 말과 함께 “비가 오면 가장 먼저 비를 맞았고, 눈이 오면 가장 먼저 눈을 맞았을 것이다. 여름이 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고, 겨울도 가장 먼저 직감했을 것이다. 딱히 뭔가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튼튼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우두커니 서있는 벽 앞에 우두커니 서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았다. 벽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처럼 살고 있는가. 튼튼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라고.
처음으로, 벽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기꺼이 맞는 사람. 어려운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튼튼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사람. 문득문득 생각날 때면 꼭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 그리고 누군가 힘들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벽이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등이 서로에게 벽이 되어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만 해도 참 따뜻하다. 따스운 겨울이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