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길어진다. 아이들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본다. 이럴 때 보통 머리가 하얘진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냥 투명해진다. 아무 것도 떠다니질 않는다. 애써 정신을 다잡는다. 근데 정신이 뭐지? 무엇보다 창피한 게 싫다. 뛰쳐나가지만 말자. 근데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나의 20대는 언제나 회피엔딩이었다. 항상 엉뚱한 꿈을 꿨다. 대학을 다시 가겠다고 설치던 때가 있었다. 늦깎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홀로 세상과 싸우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학원강사도 그저 그런 한 차례의 바람인 줄 알았다. 면접때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지만, 어쩌다 이쪽에 꿈을 갖게 됐는지 사실 기억나진 않는다. 그저 대학생때 발표가 재미있었다는 기억 뿐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줄줄 피피티를 읽어 내려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아주 조금 돋보이긴 했다. 그게 지금 내게 밥을 먹여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수업에 투입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원래 학원 관행이 이런 건가, 싶어 그러마고 했다. 나는 신입이었고, 경험도 전무했다. 무엇보다 정말로 돈이 없었다. 뭐든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이렇게나 악조건일 수가 없었다. 어떤 예고도 없이 바로 선생님이 바뀐 경우였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이 교실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제부터 너네 선생님이야~"
"아닌데요. 우리 선생님은 이00 선생님인데요."
말문이 막히고, 어설프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 애들은 대답을 하는 척 나를 떠보고, 시험해보려 한다. 알면서도 웃어 넘길 수 밖에 없는 내 처지가 답답했다. 뭘 알아야 혼을 내든 장난을 치든 하지. 질문을 던져도 반항어린 대답만 돌아온다. 어렵다. 2주차에 고비가 찾아온다. 역시 내 길이 아니었다. 빨리 때려치고 집에나 가자. 하던대로 카페 알바로 돌아가자. 진상손님이 낫지 애들은 안되겠어. 중얼거리며 찐득한 발걸음을 떼어내곤 했다.
그 시간들을 버텨낸 것은 아이들의 미소도, 학부모님들의 따뜻한 말도 아니었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더라. 그저 경험으로 버텼다. 8일 일하고 도망치듯 그만둔 세무사 사무실, 3달 일하고 홧김에 때려친 회사.. 사실 그만 두고 얼마나 많은 후회와 불안이 찾아왔던가. 그 순간의 부담에만 푹 담갔다 꺼내어지면 되는 것이었는데, 빠져나오면 네일아트용 아세톤처럼 금세 말라버리는 존재였는데 익사할까 봐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그만둬야 할 온갖 핑계를 찾아 악착같이 그만두고 그 이상의 후회를 하고 살았다. 이제 그러면 안된다는 걸 충분히 배웠다.
버티는 건 그것보단 좀 더 쉬웠다. 결국 적응해가는 과정이었다. 진심이 통한다는 말도 이해했다. 모든 게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다고 하면 오만이고, 효율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조잘조잘 떠들고 있다. 문득 첫 수업의 긴 침묵이 생각난다. 길고 긴 침묵. 나를 빤히 바라보던 경계심 어린 눈빛들. 그 눈빛과 침묵이 나를 퉁명스럽게 지지해준다. 나에게도 학원 강사로서의 첫 번째 시야가 생겼다. 이젠 침묵이 아주 조금은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