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삼십까지는 가족계획을 완성하고 싶었고 그래서 맘먹고 들어간 대학원 시절 둘째를 가져 결국 학교는 임기 끝난 남편을 따라 귀국하며 휴학으로 정리되었다. 중국어로 그것도 명문대 대학원을 다녔던 시절이 이제는 까마득하다. 학창 시절 외국을 동경했고 당시 시사영어사에서 나오던 월간지의 미국 유학기를 읽으며 가슴 두근대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작 자신은 생뚱맞게 대만서 공부를 했으니 인생은 그저 살아볼 일이다.
남편이 중국어 연수를 할 때 나는 타이베이 거리에서 상인들과 교류하며 중국어를 연습했고 저녁이면 뉴스나 연속극 자막을 부지런히 눈으로 따라 읽으며 중국어를 익혔다. 물론 중국어 기초를 위해 처음 몇 달은 학원 수강을 했는데 수업 첫날 선생님은 한자로 적힌 내 이름을 중국식 발음으로 불러 잠시 나를 어리둥절케 했다. 자신이 호명돼도 본인인지 몰라 눈치 보며 앉아 있을 때 앞으로 시작될 모험의 첫맛을 느낀 듯하다. 두려움보다 머리에 담고 있던 기존 관념을 모두 비우고 새로이 시작한다는 게 흥미진진했다. 바보 되어 처음부터 배워나간다니 재미있겠다 싶었다. 선생님은 어쩐 일인지 수업 첫날 '배고프다'란 단어를 설명해 주었는데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필요하면 영어로 부연설명을 해줄 거란 예측과는 달리 철저히 중국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다. 갑자기 선생님이 자신의 배를 끌어안고 “어!” 했을 때 난 그녀가 복통이 난 줄 알았다. 계속 “어! 어!” 거리며 과장된 액션을 취했는데 그것은 ‘굶주려 죽다'란 아사(餓死)의 '아' 발음과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한국어로는 아무리 짧게 말해도 '배고파' 세 음절은 필요한데 외마디 신음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다니... 그 순간 이미 난 중국어의 매력에 빠졌는지 모른다.
여자는 언어적 센스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낯선 땅에서 까딱 잘못하면 눈 뜨고 코 베임 당할까 봐 쫑긋해서 인가. 아무튼 시간이 지나며 수준은 높지 않아도 일상 중국어를 순발력 있게 해냈고 아쉬운 상황에선 자신의 입장도 또랑또랑 밝히며 점차 자신감은 물론 중국어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높아졌다. 남편은 중국어 연수를 마치고 귀국 후 다시 대만으로 발령 났는데 당시 한국 정부는 중국 대륙과 정식 외교 수립 전이었기에 대부분의 중국 전문가들이 대만이나 홍콩서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주뼛거리며 탐색하던 시기를 끝내고 이번에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이 절실해져서 남편의 대만 행을 환영했다. 어릴 적 꿈꿔왔던 유학 패턴은 아니지만 주어진 상황을 활용하면 비슷하게 꿈을 이룰 수도 있겠다는 한 가닥 소망이 피어올랐다. 단단한 중국어 기초 없이 그렇다고 영어가 능란하지도 못했지만 감히 도전하게 된 원동력은 대만 대학원은 학비가 거의 없다니... 스스로의 스트레스만 이겨나가면 되는 것이다. 배짱과 패기, 더 이상 수줍어하며 기회를 날려선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애 엄마는 ‘국립 대만 대학교’ 대학원을 덜컥 지원했다. 그리고 입학했다. 오래전 이야기다.
나이 서른을 떠올리니 마음이 착잡했다. 삼십, 사십, 오십... 십 년 단위로 인생이 착착 진행되어야 한다고 멋 데로 규정하고는 스스로를 옥죄던 나. 삼십 전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다는 둥, 늦기 전에 대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둥 부산을 떨었지만 무슨 대단한 성장을 이루었나? 그럼에도 어느 날 맏딸이 삼십이 되려 할 때, 아니 한국 나이로 삼십이 되었을 때 난 변함없는 내 자식과 객관적인 딸 나이에 드리우는 간극과 부담 속에서 가끔은 기분이 답답해지곤 했다. 그건 마치 내 엄마는 나이 삼십에 네 아이의 엄마였고, 과거 어느 시기엔 스물도 안 된 소녀들이 혼인하고 애 낳던 시절도 있었건만, 그러니까 시대성을 무시한 단순 나이 비교는 별 의미가 없음을 앎에도 고정관념을 떨치지 못한 체 난 속으로 부대꼈다. 똑똑하고 아름다운 딸이 여자라는 이유로 나이 듦이 관록 되지 못하고 그늘 될까 우려했다. 그런데 모든 바람은 이루어진다 했던가. 어느 날 딸은 총기 있고 신선한 젊은이를 데려왔다. 이제 그들의 인연을 호기롭게 허락하는 맘씨 선한 어른이 되면 된다. 심지어 딸이 만으로는 이십 대에 성혼이 이루어지다니 슬며시 행복했다.
주례 선생님께 인사드리는 식사 모임을 가졌다. 딸과 사위를 제삼자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딸은 대학 졸업 후 계속 일에 매진해 왔지만 굳이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을 신봉하던 내게는 언제나 조언을 더하고픈 풋내기 같았는데, 어르신을 뵙자 자연스럽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는 깍듯하고도 능숙한 행동을 보노라니 더 이상 화평을 위해 부모의 부질없는 잔소리에도 묵묵히 순종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밝고 샤프하고 적극적이고... 처음 만난 자리가 흡족히 진행되도록 살뜰히 매너 갖춰 생기 있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딸을 옆 눈으로 훔쳐보며 어이쿠, 시간은 결코 공(空)으로 흐르지 않는구나. 내게 주옥같은 시간은 딸에게도 풍성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서른에 가정을 울타리 삼아 인생이 숙성될 때 아이는 아이대로 치열한 세상에서 열린 마음으로 부딪치고 다듬어지며 당당한 독립 여성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순간 내 아이지만 낯설었다. 모녀관계를 떠나 대면한 그녀, 울안의 주부보다 현장서 뛰는 그녀가 더 단단한 스펙트럼을 향유하는 듯했다. 오늘도 또 배운다. 세상 너머 세상을, 스스로가 얼마나 모자란 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