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y 샬롬




1. 내겐 낯설지만 세상 모든 이에게 잘 알려진 도시에 와있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해 저축한 딸은 대학원 진학을 위해 서울을 떠났고 난 정착을 도와준다는 이유로 할당된 가방에 엄선한 그녀 물건을 꾹꾹 눌러 담았다. 3년 여정에 둘이 합해 큰 가방 네 개, 작은 가방 두 개. 물론 그 안엔 내 미니멈 소지품도 포함됐지만 미리 구해 놓은 스튜디오에 트렁크를 다 털어내도 방은 휑했다. 우리가 공들여 들고 온 물건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마존에 부피 나가는 물품을 주문하고 허기진 우리는 가져온 작은 냄비에 음식을 만들었다. 침대와 서가는 제공되지만 식탁도 책상도 의자도 없으니 당분간 좌식 생활, 그래도 소박한 메뉴를 바닥에 차려놓고 좋다고 웃었다.


도착 첫날 낮밤이 바뀐 시차를 무시하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계좌를 열고 카드를 만들고 핸드폰을 개통하고... 부지런을 떨었지만 은행서 꽤 지체한 터라 시간은 벌써 해질녘인데 우린 생필품을 구하러 시내로 향했다. 한국선 잉여 물건들로 ‘버리자~’ 노래했었는데 이젠 새 삶을 위해 모든 소소한 것을 돈 주고 장만하며 당연했던 지난날이 새삼 감사했다.


국제면허증을 만들어왔으나 동서남북 못 가리니 발품을 판다. 손에 뭔가를 들고 걷는다는 것이 고되다고 들었지만 긴장을 해선지 몇 블록씩 걸어도 끄떡없다. 아니 도리어 서로 무거운 것을 들겠다고 티격태격, 그렇게 사나흘 씩씩하게 지내고 나니 엥? 벌써 관광객 모드. 아이는 자기 스케줄로 바빠지고 난 지도를 펼치고 오늘은 뭐할까? 여유 잡는다. 어제 오전엔 아이가 입을 정장을 한 벌 샀고 오후엔 뮤지엄을 두 개나 관람했다. 사실 미술관은 설렁설렁 돌았다. 좋은 걸 지나쳐 오기 아쉬웠을 뿐이다.


그렇게 불평 없이 바삐 움직인 일주일, 한숨 돌리니 그제야 잠이 쏟아진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자다 깨어나선 옆에 누운 딸애를 말끄러미 들여다본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어도 자는 모습은 애처롭다. 살그머니 여린 손을 잡아본다. 잘할 수 있겠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소리 없이 기도한다.



2. 미국 온 지 이주가 지났다. 우린 카페에 앉아 스윗 타임을 가졌다. 라즈베리가 올라간 타르트는 맛났고 라테는 부드러웠다. 우리의 마음도 녹아졌을까? '무서워' 란 단어는 쓰지 마.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애쓸 필욘 없어도 그들에게 오픈 마인드면 좋겠어. 너라는 사람, 늘 유쾌하기를~ 엄마는 부쩍 성숙해진 딸을 가만 바라본다. 무얼 해도 잘할 시기, 이제 시작이다. 谁说人不能飞. (누가 사람이 날 수 없다 했는가?)




3. 미국서 한 달 만에 귀국해 이틀째 밤이다. 난 낮에 잠들었고 밤 열두 시에 마법에서 풀리듯 부스스 깨어났다. 이제 아이들은 떠났고 매인 일도 없으니 낮밤이 바뀐대도 상관없다. 남편은 잠 오는 것을 참았다 시차를 맞추라지만 불규칙한 일상은 바라던 일 아닌가? 평생 모범생으로 산 나, 이 정도의 일탈, 누가 뭐라 하겠나.


내 짐은 대충 끌러놓은 채 방치 중이다. 그리곤 어제 새벽, 필요한 것만 챙겨 떠난 아이 방에 들어가 아직도 수북한 그녀 물건을 멍하니 쳐다보다 도리어 그녀 방을 사박사박 치우기 시작했다. 무슨 기준으로 골랐는지 꽤 좋은 물건들이 그대로였고 유달리 좋아하던 바디 크림도 여럿 남겨져 있었다. 작은 바구니에 뽑히지 못한 향수와 바디 로션들을 모아 담았다. 그리곤 서랍을 열어 옷들을 과감히 바닥에 던졌다. '시즌마다 맘에 드는 걸로 하나씩 사 입어. 너무 낡은 건 예쁘지 않아!' 잔소릴 했건만 이런저런 이유로 버리길 주저하던 딸, 이제 내 식으로 처분할 테야.



무얼 더 할까? 아이가 쓰던 책상에 아이인 양 앉았다. 심이 뭉툭해진 연필, 야광 볼펜 등이 뭉텅뭉텅 꽂힌 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쓰겠나 싶어 몽당연필들을 거침없이 골라내다 주춤했다. 작은 주먹에 쏙 들어오는 길이. 땀 어린 시간을 보냈구나! 다시 제 자리에. 크고 오래된 책상도 없앨 때라 별러 왔는데 불현듯 미국서 구입한 그녀의 작은 책상이 떠올랐다. 생명력 없이 모든 게 넘치는 이곳과 하나하나 귀한 달러로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척박한 그녀의 새 삶을 교차하다 상념에 잠긴다. 커피 한 잔 타들고 물건들이 흩어진 방 한가운데 묵묵히 앉아있다.




4. 이번 여름 햇볕에 발이 탔다. 새 땅에 뿌리내리겠다고 땡볕에 바지런히 걸어 다녔더니 하얀 덧버선을 신은 듯 맨발에 구두 자욱이 선명하다. 아이는 지금 어떤 추억을 쌓고 있을까? 찬장서 딸이 선물한 머그잔을 꺼내 컨덴스드 밀크를 넣어 네스프레소 커피를 만들었다. 진하고 달콤한 액체가 뜨거웠던 여름처럼 목구멍을 데우며 넘어간다. 캡슐 사대기 아까워 아이에게만 마시라 했었는데 수납장엔 뜯지 않은 박스들이 잔뜩, 혼자 누릴 사치가 자꾸만 는다.


어제는 아이 방을 더 뒤적거렸다. 귀국하면 자신의 체취를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엄마 눈에 쓸모없는 것들을 살며시 빼내려니 물건들 하나하나 만지작거려야 했다. 그런데 이미 한번 훌쩍 추려선지 어젠 오히려 보물찾기 놀이가 돼버렸다. 첫 번째 서랍에 말큰한 핑크색 종이로 싸여있던 야사시한 빅토리아 시크릿 팬티는 택이 붙은 채 3장 있었고, 어깨와 치마 단에 송송 구멍 난, 등 쪽의 과장된 지퍼가 특징인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검은 니트 원피스는 낡은 옷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떤 엄마는 자식이 성의 없이 먹고 난 생선을 알뜰히 발라 먹는다는데 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련된 젊은이 옷에 실키한 내의 입은 몸을 구겨 넣을 수 있겠다.


미국 거리서 마주친 어깨 우람한 남자는 끈 다리 시폰 원피스에 눈꼬리 치켜올린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는 여성스런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손질 못한 머리를 숨기기 위함인지, 패션을 완성하려는 컨셉인지 그도 아니면 그뤠잇 개츠비 시대 스타일을 모방하려나? 파스텔 풍의 긴 스카프로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고는 남은 자락을 야들야들 바람에 흩날렸는데 외모는 흠잡을 수 없음에도 어딘가 기이함이 감돌았다.


다행이다. 미국서 하도 걸어 체중이 줄었다. 얼굴도 조금 여위고 허리조차 얇아진 듯. 오늘은 동창들 만나는 날, 새벽에 샤워하며 마음을 굳혔다. 매끈한 원피스에 자신을 밀어 넣기로. 내가 뭐 여장 남자도 아니고 단지 나이가 좀 과할 뿐인데... 외로우면 폭식을 한다는데 난 혼자서 아이 놀음 중이다.




5. 새벽마다 아이 방에 들어간다. 어수선했던 방이 정리하다 보니 제법 인테리어 감각마저 깃든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몸매처럼 더도 덜도 없이 제자리에 있을 것 만 있는, 구지레한 일상이 사라지니 사진 한 장 남겨두어도 괜찮다 싶을 정도다. 그러나 삶이 어디 화보더냐? 군더더기 없는 매혹적인 실내 컷도 실은 매의 눈을 가진 기획자의 작품. 어느 구석에든 먹고 입고 자고 난 흔적이 보여야 그 인생 정상이다.


며칠 더 버리기를 강행하니 실내가 멋있다 말고 볼품 없어진다. 생명은 속이 차야 제 격인데 역동하는 에너지 없이 허우대만 남으니 이것은 허깨비. 애장품 빠진 주인 떠난 방은 쇼룸에 불과하다. 이렇게 새벽마다 쭈그리고 앉아 섹션 별로 일을 마쳤다. 어젠 책과 파일 뭉치를 분류했는데 갈피갈피서 나오던 레주메와 자소서 습작들. 멍하니 보다 눈물이 또로로. 그랬구나, 치열한 도전이 있었구나! 한 집서 살면서도 서로 너무 모른다. 어렴풋한 추측은 추측일 뿐, 자녀의 시도를 지켜보는 모성도 당사자 만치 떨린다 생각했던 마음이 부끄러웠다.


새벽엔 편지 뭉치를 열었다. 중요한 것들은 가져갔겠지. 서랍 안 투명 지퍼 백에 촘촘히 담긴 하트 뿅뿅 쪽지들, 방황하는 청춘 너머 러블리 걸의 아름다운 관계들... 내게는 아직도 어리기만 한 딸이 생의 한가운데서 헤엄치고 있다. 매 순간 기도하며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위해 나도 호흡처럼 기도 한다. 그것은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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