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마을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빨간 전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는 비엔나의 평범한 거리였다. 양 길가엔 돌로 지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고 언뜻 보면 어느 것이 주거용이고 어느 것이 상업용인지 뚜렷이 구별되지 않았다. 상업용이라 해도 사인이 요란스럽지 않아 바짝 다가가 입구에 붙여놓은 설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곳, 특별한 점이 있다면 내가 발견한 건물은 대문이 코발트색이었다. 원래 나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근처에 가서 예상하는 음악학교를 한눈에 콕 집어내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려 했는데 그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주소 상 그 위치라 짐작될 뿐 그럴듯한 간판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생뚱맞은 파란색 대문만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그 문마저 굳게 닫혀 있어 안을 통 가늠할 수 없었다.
비엔나에 와서 빨강 루주를 서랍에 넣었다. 노란 피부라 선명한 색이 얼굴에 활기를 줄 거라 생각했는데 거리에 나가보니 그들의 컬러는 온통 베이지나 브라운이었다. 금발에 브론즈로 피부를 태우고는 카멜 색을 즐겨 입었다. 납작한 단화를 신어도 훤칠한 키는 비율이 잘 맞아 크게 멋 내지 않은 것 같은데도 멋스러웠다. 나도 슬며시 밤색 셰도우를 꺼내고 누드 톤의 루주를 찾기 시작했다. 색으로 튀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누가 골랐는지 내 앞에 놓인 건물은 그토록 그들이 선호하는 컬러 매칭을 마다하고 가라앉은 파랑도 부드러운 하늘도 아닌 도드라진 코발트를 대문 색으로 버젓이 택했다. 거기에 힌트가 있는 것일까? 선택된 블루는 의도된 컬러다. 꿈을 좇는 자의 색, 음악학교가 맞으리라.
처음 아이들을 데리고 무직 슐레(음악학교) 앞에 섰을 때 커다란 대문을 마주하고 문을 두드려야 할지 벨을 찾아 눌러야 좋은지 잠시 망설였다. 두터운 목재문은 제법 육중했다. 잠금장치가 든든한, 안과 밖을 단절시키는 요새 문 같았다. 멀리서 적이 쳐들어온다는 전갈이라도 받으면 일찌감치 빗장을 걸어 잠가 요지 부동할 그런 문 말이다. 그러나 엄마인 나는 마냥 엉거주춤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앞장섰으니 초행길이라도 인도자여야 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니 잠긴 것처럼 보였던 문은 실은 살짝 어긋나 있어 밀거나 잡아당기면 열릴 것도 같았다. 그때 한 소녀가 그곳서 나왔다. 킁킁~ 그녀에게서 음악 냄새를 맡아보려 했다. 자, 우리도 들어가자.
오피스 빌딩을 상상하며 안에 들어서니 유리로 된 중문이 또 하나 있었다. 그 문을 넘어서니 의외로 환하고 넓은 중정이 나타났다. 밖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꽤 넉넉한 안마당은 건물 전체 높이로 트여있어 보기에 시원했고 왜 이렇게 밝을까 고개를 위로 젖히니 하늘과 맞닿은 천장은 안전하게 비바람을 막아주며 필요한 빛만을 공급하도록 썬룸처럼 투명한 재질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늑한 광장을 삥 둘러 일, 이층에 걸쳐 크고 작은 연습실이 자리 잡은 듯했다. 분명 갇힌 공간임에도 느껴지는 상쾌함은 창공이 보이는 천장도 한몫했지만 대문서 중정을 가로질러 마주 보이는 정면에 아치형의 통로가 있고 그 너머로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푸른 녹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건물의 또 다른 출구를 이루는 그곳은 아티잔의 손길이 깃든 쇠로 만든 검은 프레임의 프렌치 도어로 경계를 이루며 그 뚫린 칸칸으로 신선한 공기가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었다. 막힌 실내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화사한 광장이 나오고 그곳은 다시 비밀의 화원으로 연결되는 듯한 구조는 무척 매혹적이었다. 예기치 못한 아름다운 장소에 서있으려니 이 음악 학교에 아이들이 꼭 다니면 좋겠다는 욕망이 건물에 들어오기 전보다도 더 강하게 치밀어 올랐다. 어디선가 악기 소리가 잔잔히 새 나왔다.
우리 가족은 8월 중순 비엔나에 도착했다. 한국서 아이들이 다닐 학교는 미리 정해 놓았고 이제 부지런히 살 집을 구해 9월 개학 전에 소소한 준비물만 챙기면 되었다. 결혼하고 출국과 귀국, 반복되는 해외 이사가 다섯 손가락을 넘어가며 어지간한 경험을 쌓았고 귀찮은 이사라도 시간이 지나면 제 자리를 찾는다는 소신이 생긴 터였다. 그래서 낯선 곳에 이주하는 불안보다는 처음 살아볼 유럽에 대한 기대로 육체적 피로쯤은 이겨낼 수 있다 마음먹고 있었다. 입가에 동글동글 물집이 잡혔지만 앞으로 부딪힐 모험을 위해 그 정도의 흉함과 아픔은 견딜 만했다. 한국서 비엔나 생활에 대한 전임자의 조언을 들었을 때 유럽이라 다른 타향살이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비엔나엔 지역마다(우리나라 구(区) 개념) 음악 학교가 있는데 나라에서 재정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입학시험에 붙기만 하면 훌륭한 지도 교수 밑에서 저렴한 학비로 수업받을 수 있다고... 이것만이 특별했고 음악을 사랑해 어느 나라에 가든지 두 딸에게 형편껏 지속적인 음악 레슨을 시키던 내 귀에 쏙 들어온 말이었다. 어쩌면 귀한 기회를 얻을 수도 있으리란 소망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래서 임시 숙소에 도착 후 독어도 못하고 시내 지리에도 어두웠지만 음악 학교 지원을 위해 서둘러 길 나섰던 것이다. 정규학교와 시스템이 비슷해 9월 중순 개학을 앞두고 서류 지원과 실기 시험, 합격자 발표가 쪼르르 있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다음 해에나 신청이 가능하다니 삼 년 여정의 우리는 치명적인 1/3의 시간을 허공에 날리지 않으려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마음이 조급했다.
서울서 부친 짐엔 피아노가 들어 있었다. 둘째가 태어나던 해에 산 피아노다. 맏딸에게 정서적인 취미를 길러주려 시작된 피아노 교습은 학원서 과분한 칭찬을 들으며 주의를 환기시켰고 그렇다면 악기를 마련해 집에서도 연습을 시켜야겠다고 맘먹게 했다. 그리곤 개인 교습으로 전환했고 전공할 것은 아니지만 집에서 들리는 아이의 연주 소리가 흐뭇해 배움을 계속했던 것이다. 큰 애의 선생님이 오신 김에 작은 아이의 레슨도 덩달아 시작되었다. 비엔나에서 거주할 집을 정하곤 이삿짐을 손꼽아 기다렸다. 적어도 아이들 실기시험 전에 연습을 해야 했다. 적극적인 엄마를 쫓아다니며 아이들도 투지가 길러졌는지 짐이 도착 한 날 우리가 짐꾼에게 제일 먼저 부탁한 것은 '피아노를 옮겨 주세요'였다. 두서없는 이삿짐으로 가득한 컨테이너에서 피아노를 우선적으로 빼내기란 무리였다. 동유럽 장정들은 어깨를 움츠리며 뜻은 알겠다만 순서대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우리는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컨테이너 앞 쪽의 짐들을 길바닥에 부리며 기어코 피아노를 찾아내선 서둘러 집 안으로 올려 보냈다. 두터운 골판지로 단단히 싸맨 피아노가 방에 들여지자 우리는 일제히 피아노에 달려들었다. 먼저 피아노 앞부분의 포장을 거칠게 뜯어내곤 뚜껑을 열고서 큰 딸은 선체로 연습을 시작했다. 나와 작은 애는 곁에 서서 남은 부분을 벗겨냈는데 테이프로 말끔히 봉해진 딱딱한 종이는 의지만큼 쉽게 안 열려 피아노에 흠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또한 허둥대며 칼질하다가 우리는 서로 눈 마주치곤 그만 너무 우스워졌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가? 아~ 열정! 다음 날이 실기 시험이었다.
정작 당일 우리는 앞으로 닥칠 오디션이 어떨지도 모르고 헐거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아무리 비엔나지만 줄리어드 음대는 아니지 않은가? 남편 직장과 아이들 학교 위치 등을 고려해 살 동네를 정하다 보니 지원한 곳이 교육열 높은 강남처럼 입학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동안 성실했던 대가로 큰 실수만 없으면 무난히 합격하리라 예상했다. 예의를 갖춰 오디션 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했는데 화기애애하게 진행될 줄 알았던 시험장 분위기는 무척 엄숙했다. 떨고 있는 학생과 정장을 갖춰 입은 부모님, 그리고 평소 아이를 지도하시던 음악 선생님까지... 모두들 긴장해 보였다. 우리도 슬며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콩쿠르? 실기 시험을 치른 큰 애가 어두운 얼굴로 나왔다. 작은 애가 들어갈 때 용기를 내 안을 들여다보니 책상에 일렬로 앉은 여러 명의 교수님들이 진지한 얼굴로 심사하고 계셨다. 그리고 화사하고 모던한 방 중앙엔 웅장하니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갑자기 기가 죽었다. 맘 졸이며 밖에 앉았는데 작은 딸이 준비해 간 악보에도 없는 도돌이표 치듯 반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뭐지? 잠시 후 아이가 손으로 우는 얼굴을 감싸고 나오며 격앙된 어조로 "엄마, 저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평소 안 쓰던 경어까지 써가며 옆의 나선형 돌층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채점하시던 점잖은 교수님마저 학생이 많이 긴장한 것 같다고, 나보다 더 근심스러운 얼굴로 뒤따라 나오며 위로해 주셨다. 나는 당황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만을 표하곤 재빨리 일층으로 쫓아 내려가 자신들의 불만족한 연주를 잊고자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가려는 착잡한 큰 애와 울고 있는 작은 애를 붙잡아 중문 옆 벤치에 가까스로 앉혔다. 패잔병처럼 이대로 퇴각할 순 없었다. "얘들아, 한 숨 좀 돌리자~" 서로 말없이 앉아 할 일이라곤 마주 보이는 아름다운 아치문을 통해 무심히 펼쳐진 싱그러운 자연을 야속한 맘으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분명 매력적인 장소인데 우리는 속할 수 없는가. 여기서 바로 뛰쳐나가면 다신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맘이 아파도 심호흡하며 이곳을 찬찬히 둘러보고 아이들의 음악 사랑이 지속되기를 기원했다. 서양 나이로 큰 애가 열네 살, 작은 애가 아홉 살 때였다.
합격자 발표까지의 일주일이 떨떠름하게 지나갔다. 난 둘 다 붙을 경우, 큰 애 만 붙을 경우, 작은 애 만 붙을 경우, 둘 다 떨어질 경우, 확률을 가늠하고 있었다. 어떻게 처신할지 감이 안 잡혔다. 오디션 날 그렇게 죽을 쑤고도 합격에 대한 미련을 포기할 수 없다니 때때로 희망은 질기다. 아이들이 생전 처음 쳐본 그랜드 피아노는 건반이 무거워 그들이 평소 연주하던 손가락 힘으론 좋은 소리를 못 냈다. 의자도 집에서 쓰던 고정식이 아닌 높이 조절이 가능해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르던 내 아이들은 먼저 연주한 학생의 신체에 맞게 조절된 의자에 엉성하니 앉아 불편한 연주를 했단다. 서울서 거리낌 없던 애들이 음악의 본 고장에 오니 촌티가 줄줄 났다. 두구두구두구 둥둥둥... 발표 날 떨리는 맘으로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갔다. 작은 애가 합격하고 큰 애는 웨이팅 리스트에 걸렸다. 불합격은 아니더라도 기분이 가라앉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자리가 나면 통보 온다지만 모두가 열망하던 기회라 중도 포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작은 애의 의지가 심사위원을 감복시켰나? 전공시킬 만큼 추천받던 큰 애의 상처 난 자존심이 마음 아팠다. 무거운 맘으로 비엔나에 도착 후 머물던 호텔서 가져온 시내 지도를 마루에 펼쳐놓고 무직 슐레 위치들을 살펴보았다. 비교적 집 동네와 근접한 곳을 골라 사무실에 전화를 걸고는 갓 도착한 외국인이라 정보에 어두워 지원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절실하니 영어도 술술 나왔다. 알고 보니 음악학교가 인기가 좋은 만큼 학생들은 복수로 지원해 합격률을 높이는데 우리는 순진하게 수준 높은 지역을 달랑 하나 응시했었다.
떠나는 버스를 쫓아 달려라, 애절한 모습이 기사 눈에 뜨이면 혹 멈춰줄지도 모르니... 나는 영어 하는 사람을 청해 어설픈 회화로 내 딸의 음악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거품을 얹어 말했다. 쇼팽의 발라드를 들어 보세요, 꼭 한번 오디션의 기회를 달라고, 이대로 일 년을 흘려보낼 순 없다고 설득했다. 그런데 무직 슐레의 영어 잘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국인 피아노 교수님 이셨다. 주로 독어로 업무 보던 스태프들이 영어 잘하는 사람을 부탁받고 마침 학교에 계시던 본토 발음의 교수님을 바꿔준 것이다. 음악을 엄청 사랑하시던 그분은 쇼팽이 궁금했을까? 일괄적 시험 시즌은 끝났지만 교수님의 재량으로 파격적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원칙은 있되 융통성도 존재함, 멋지지 않은가! 며칠 후 큰 딸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의자 높이를 조절했다. 늘 다뤄오던 악기처럼 무거운 건반을 꾹꾹 누르며 침착하게 쳐나갔다. 이렇게 각각의 무직 슐레로 입학이 확정되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작은애가 슈넬과 랑잠 (빠르게 & 느리게), 알지도 못하는 독어 몇 마디에 의지해 조심스레 레슨 받을 때 큰 애는 영어로 손쉽게 지도받았다. 권위나 군림이란 단어와 동떨어진 경험 많은 스코티쉬 콘서트 피아니스트는 아마추어 내 눈엔 백건우보다도 열렬히 베토벤을 시범 보이셨고, 단지 피아노 치는 스킬뿐 아니라 이 악장에선 전체 오케스트라 중 어떤 악기가 어떻게 연주를 이끄는 지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에 갖추어야 할 하모니와 자신이 다루는 악기를 넘어서는 시야까지 큰 틀에서 세심히 가르쳐 주셨다. 이 모든 설명이 영어라 가능했고 아이의 실력은 부쩍 늘어갔다. 그리고 음악학교는 자체적으로 크고 작은 콘서트를 자주 열어 주었다. 학예회에서 전문 음악회 수준까지 연주자의 실력과 구력을 고려한 다양한 활동이 있었다. 아이들이 말했다. 정기 음악회를 통해 실력은 물론 담력이 길러진다고. 그렇다. 나와 남편은 서울의 하얀 피아노 학원에서 시작된, 음악으로 아이들을 돌봐주는 보육원 같은 입문과정을 거쳐, 장차 세계적 연주자가 될 비전을 품고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유학 온 당찬 꿈나무들 속에 내 아이들이 섞여 연주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놀람과 떨림, 감사함으로 지켜보곤 했다. 무직 슐레에서의 큰 아이 첫 수업 날, 그동안 여러 선생님 밑에서 배워 왔어도 주로 목소리 지시에만 따랐지 이렇다 할 연주 시범은 체험하지 못했던 딸에게 교수님께선 새로운 악보를 준비시키며 투르릉 탕탕~~~ 눈앞에서 멋진 실연을 펼치실 때, 딸은 물론 첫날이라 얼떨결에 수업을 참관한 나 역시 예상 못한 수업 전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그 강력한 파워와 현란한 기술, 그리고 열정이 버무려진 총체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선생님 맞쥬? 우리에게 찾아온 행운에 전율하며 감탄했었다.
그 날 그 밤, 우리는 레슨을 마치고 굉장한 감흥을 불러일으킨 음악회를 만나 그 떨리는 감동이 채 사그라지지 않은 행복한 음악도가 되어 낯선 동네에서 집으로 데려다 줄 익숙지 않은 슈트라센 반(전차 버스)에 춤추듯 올랐다. 차 안에 있던 오스트리아인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우리 이 날을 잊지 말자. 외국인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준 관대한 이 도시를 기억하자. 교수님께 음악으로 보답하자... 창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리고 실내 유리창은 거울 효과를 내며 기쁨에 젖은 아시안 모녀의 실루엣을 그대로 비추었다. 기쁨으로 빛나는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