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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Apr 05. 2024

죽어서도 개가 된 고관대작, 영화 '파묘' -1부-

한국 풍수지리의 '쇠말뚝'을 핑계로 살펴본 '악의 평범성'

# 험한 것이 나왔다


판타지를 좋아해서, 무속이나 괴담 등 각종 오컬트도 즐기는 편이다. ‘마을의 오래된 나무를 베면 동티 난다’라는 무속 이야기는 판타지가 상상 속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 언제나 두근거린다. 물론 혼자 있을 땐 귀신 이야기는 쳐다도 못 본다는 건 차마 안 비밀.

 

 

묫자리로 어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어디는 일확천금을 얻었다는 드라마틱한 일련의 이야기들은, 영화 ‘파묘’를 오랫동안 학수고대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라는 걸출한 오컬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작품이니, 최소한 그 클라스에 핵폐기물이 나오진 않을 것 아닌가.

 

 

뭘 좋아할지 몰라 하나 더 준비했다는 듯, 파묘는 귀신을 ‘1+1’으로 탑재하여 독특한 중층구조를 구축했다. 풍수지리적으론 ‘첩장’이라고 불리는 이 장치 속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귀신은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어찌 됐건 이야기는 끝날 때까지 가공할 흡입력을 가졌다. 참 재밌었다.

 

 

그 호불호를 가르는 후반부 귀신은 아이러니하게도 극의 완성도를 고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감독이라면 단순 오컬트만으로도 맛깔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겠지만, 풍수지리 쪽에서 역대급 찌라시인 일제의 ‘쇠말뚝’이 눈앞에 있는데 굳이 이걸 빼서 밋밋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영화 ‘파묘’는 ‘명당’, ‘첩장’ 등 온갖 풍수지리적 요소를 다뤘지만, 궁극적으론 민족정신을 조명해 낸 탈 오컬트 영화로 거듭났다. ‘파묘’가 끝난 뒤, 이걸 오컬트 영화라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 덕에 마이너한 오컬트가 대중성까지 섭렵할 수 있었던 듯싶다.

 

 

오컬트 영화인데, 또 오컬트 이야기를 하는 건 식상하니,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몇 개 펼쳐볼까 한다. ▲독립운동가가 자발적으로 친일파로 재무장하는 법, ▲악의 무리만으론 불가능한 민족말살, ▲극단적인 말살을 자행하게 하는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순수’에 대한 갈망.

 

 

이 세 가지로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악의 평범성’인데, 하나씩 천천히 달려보자.

 

 

 

 

# 독립운동을 시작했는데, 친일파가 되었다


구한말 우리 흥선대원군 형님은 ‘쇄국정책’이라는 우주방어를 시전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조선은 그 기술을 수행할 역량이 없었다. 전설적인 미국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숄더롤로 극한의 디펜딩을 선보이자, 너도나도 따라했다가 오히려 기본 방어도 안되어 복날에 개맞듯 처맞고 링에서 내려오게 되는 수순을, 조선도 밟았다.

 

 

어리버리하게 숄더롤했다가 뒤지게 처맞으며 링에서 연신 호랑나비 춤을 춰댄 조선이 깝깝했는지, 조선 측 코치진에선 ‘인류보완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는데, 문제는 보완의 방향성이었다. ▲서양 놈들의 스킬을 배워 강해지자는 쪽과 ▲학원 알아보며 시간 날릴 바에 그 시간에 샌드백이나 더 치겠다는 쪽이 극명하게 나뉜 것.

 

 

독립운동의 갈래는 그렇게 개화파와 독립파로 나뉘었다.

 

 

아무래도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건 청산리대첩이나 윤봉일 의사의 의거 같은 독립파들의 항일투쟁이다 보니, 개화파의 행보는 그 곁다리로 보이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데 그 곁다리인 듯 아닌 듯, 긴 듯 아닌 듯한 행보 속에서 개화파는 하나둘 자발적으로 친일파로 전직을 했다.

 

 

당시 세계는 사회진화론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기괴하게 변모한 이 이론은 인간사회도 생물처럼 진화의 과정을 거쳐, 더 진화한 인종이 있고 덜 진화한 인종이 있는데, 유럽인이 정점이고 그 다음이 아시아, 가장 밑바닥이 흑인이라는 식의 서열체계를 제창했다.

 

 

이를 토대로, 유럽은 ‘미개한’ 비유럽을 대상으로 개화에 나섰는데, 이게 바로 유럽 제국주의다. 침략한 게 아니라, 학교도 세워주고 병원도 세워주고 각종 인프라를 세워준 거였다는 ‘불륜도 내가 하면 로맨스다냥’ 같은 개 같은 소리를 유감스럽게도 식민지 지식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받아들이게 되었다.

 

 

글자로는 실감이 되진 않는데, 일본이 식민지배한 게 사실상 반세기에 이른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벌써 30년이 넘었다는 게, 당장 내 유년시절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리는 게 까마득한 상황인데, 반세기라면 어쩌면 '이 체제는 끝없이 존속할 것'이라는 체념에 안 빠지는 게 이상할 것이다. 거기에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상적 토대까지 있다면 더더욱.

 

 

이 미래영겁으로 느껴질 시간의 무게에 굴하지 않은 독립파가 정말 대단하다.

 

 

요컨대 친일파와 애국지사는 한 끗 차이인 것이다. 서양 놈들의 숄더롤을 배우려고 갔는데, 애초에 원투 스트레이트도 못 치는 꼬락서니에, ‘아, 조선은 미개하니. 서양이나 일본 애들 물병이나 들어주자.’라는 마개조를 자발적으로 당한 것뿐이다. ‘조선을 위한 것!’이라 믿고 아이들을 일본의 총알받이와 위안부로 보내버리면서.

 

 

영화 ‘파묘’의 친일 고관대작 또한 이런 여지가 있을 순 있겠다. ‘나는 나라를 팔아먹은 게 아니고, 구국을 위한 결정을 한 것이다. 진정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는데, 죽어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걸 나는 참을 수 없다.’라는,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 못 할 정도로 마개조를 아주 제대로 당해버린 개화파 우국지사 말이다.

 

 

 

 

# 뒤통수는 아는 놈이 더 세게 친다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은 ‘어떤 집단을 절멸할 목적에서 그 집단 구성원들의 생활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토대들을 파괴하기 위해 자행되는 행위의 일체’를 제노사이드라 칭했다. 즉, 제노사이드는 민족 등 특정 집단을 절멸하려는 목적으로 자행되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말살행위를 뜻한다.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제노사이드가 바로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홀로코스트다. 독가스, 생체실험, 총살, 강제노동 등을 통한 조직적인 말살행위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어 당시 유럽 내 약 900만 명이었던 유대인이 1/3로 격감했다.

 

 

유대인 말살은 세 가지 단계로 이뤄졌다.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 등 탄압을 정당화하는 제도 구축, ▲‘게토’를 통한 물리적 배제와 축출, ▲‘문명화된’ 방식을 통한 조직적인 학살.

 

 

어떻게 보면, 개구리를 바로 100도씨 끓는 물에 던져 죽이는 게 아니라, 상온의 물에 넣은 다음, 물을 끓여서 죽이는 수법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두 가지. 개구리의 격렬한 저항을 피하는 것,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듯 평범한 구성원들이 그 개구리 살해에 둔감해지게 만드는 것.

 

 

특히 후자가 중요하다. 제노사이드가 악의 무리들로만 자행될 것 같지만, 사실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 학살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소수의 악의 무리론 만들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한 이들로 학살완성되는 것이다.

 

 

여러 단계의 ‘문명화된’ 공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학살은 이뤄졌다. 공무원은 서류를 확인하고, 경찰은 유대인의 머릿수를 세며, 기관사는 운행계획에 따라 열차를 움직였다. 친위대는 유대인을 쓸모에 따라 분류하고, 소각했다. 국가단위로 조직화된 이 말살은 히틀러가 볼 땐 ‘학살’이었는데, 기관사가 볼 땐 그저 일상적인 ‘업무’에 가까웠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나치는 평범한 이들이 저항의식을 갖지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나치스 수뇌부에서 오는 극비 문서를 제외하곤 ‘제거’, ‘학살’ 같은 단어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 학살은 ‘최종해결책’, ‘특별취급’, ‘소개’ 등으로, 수용소 이송도 ‘재정착’과 ‘동부지역 노동’이라 에둘러 표현되었다.

 

 

이 암호화된 표현들은, 국가 단위에서 개인이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게 분업화된 홀로코스트 작업체계, 유대인을 탄압하는 걸 당연시하게 만든 사회제도적 기반 등과 더불어, 평범한 이들의 죄의식을 자극하지 않았고, 그 결과 비인간적인 학살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홀로코스트의 주범으로 꼽힌 아이히만의 경우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아이히만은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이송하는 업무를 했지만, 그를 진찰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는 그를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재판동안 그와 만난 신부 또한 그를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대량학살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미친 나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과거의 잘 나갔던 나치 시절의 뽕맛을 잊지 못해, 재판에서 자기가 악의 몸통이라고 나불댔지만 그는 그저 홀로코스트의 거대한 체계에서 ‘유대인의 이송과 소개’을 전담했을 뿐, ‘학살’에는 직접 관여한 건 거의 전무했다. 본부장인 척하고 싶었지만 일개 팀장에 불과했던 것.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평범한 기관사, 그저 승진욕에 불타고 있던 평범한 나치당원 아이히만 등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평범한 이들이 태연하게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악으로 변모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도, 이 너무도 평범한 가해자들 속에는 유대인 학자와 장로 등이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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