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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May 10. 2024

죽어서도 개가 된 고관대작, 영화 '파묘' -2부-

한국 풍수지리의 '쇠말뚝'을 핑계로 살펴보는 '악의 평범성'


(1부에 이어)



유대인 지도층은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강제이주시키는 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당시 유럽의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의 영향으로 중동 팔레스타인으로 대규모 이주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건 제3제국에서 유대인을 몰아내야 했던 아이히만의 니즈와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불법이민을 도와주려고 온 팔레스타인 밀사들을 적극 도왔다. 밀사들은 수용소의 유대인들 중 쓸만한 사람들을 고르고, 나머지는 나치 당국에게 일임했는데, 그 결과로 ‘몇십만 명의 유대인을 구했다’라는 아이히만의 발언 또한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유대인 지도층의 협력은 국외이주에만 그치지 않았다. 유대인을 각 지역의 게토로 보내는 것부터, 그 게토에서 학살하는 데까지, 유대인 협력자들의 도움은 지대했다. 그들은 열차에 탈 사람의 명단을 만들었고, 재산을 손쉽게 강탈할 수 있게 목록을 작성했다. 도망치거나 숨는 사람들은 유대인 특별경찰에게 잡혀왔다.

 

 

이 협력자들은 게토에서 가스실을 만들었고, 직접 유대인들의 사형을 집행했으며, 자발적으로 학살의 흔적 둘을 덮었다. 실질적인 학살작업은 모두 유대인의 손으로 이뤄졌는데, 그들이 어떻게 시신에서 금니를 뽑고, 쓸만하다 싶은 것들을 어떻게 긁어갔는지는 수용소의 주요 생존자들에 의해 증언됐다.

 

 

한나 아렌트는 “만일 유대인이 조직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희생자들이 400만, 500만, 600만에 달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독일 나치의 점령지 등지에서 유대인 지도층의 협력이 있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지역의 유대인의 생존율은 극단적인 편차를 보였다.

 

 

요컨대, 유대인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분열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제3제국에는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받거나 특권을 가진 수천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히틀러 또한 340명의 특권층 유대인을 알고 있었다는데, 이러한 특권층 유대인들은 자신의 동족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한 ‘아는 놈’들이 있었기에,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홀로코스트라는 거대 규모의 집단학살로 확산될 수 있었다.

 

 

일제의 민족말살통치 또한 분열된 한민족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백마 탄 초인’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체념이 만들어낸 비극일 수 있지만, 그러한 오피니언 리더의 협력이 있었기에, 외교권 박탈과 국권 침탈이 가능했고, 반세기에 가깝게 식민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 식민통치의 위세는 우리 조상들의 힘이었다.

 

 

제3제국은 자신들의 영토에 유대인이라는 불순물을 치우는 걸로 족했기에, 국외로 치울 수 있는 상황에선 유대인 ‘이송’에서 발군의 역량을 발휘한 아이히만이 두각을 보였고, 그에게 적극 협조한 유대인 지도층이 수혜를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전쟁 등으로 국외로 치울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아이히만의 ‘이송’은 ‘절멸’을 위한 도구로, 유대인 협력자도 ‘개’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파묘’의 고관대작처럼.

 


다만, 영화 ‘파묘’가 그런 친일파들을 죽어서도 집 지키는 개로 비웃는 건, 어디까지나 정신적 자위일 뿐이다.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은 통치를 위해 친일파를 재기용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부 대부분을 자손들에게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막대한 재산들은 그 일부조차 ‘법’대로 환수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친일파를 ‘죽어도 개 같이’라고 묘사한 것보다 그 친일파의 후손들이 ‘밑도 끝도 없이 부자’라는 것을 짚어준 게 더 의미 있었다. 당시 전문직들이었던 친일파를 쓸어버렸을 때, 나라가 잘 굴러갔겠느냐라는 반론도 있겠지만 있지만, 그럼에도 옥석은 가려져야 했었고, 그때 가리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최소한 개쓰레기 친일파의 후손이 잘 사는 부조리만큼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것도 정신적 자위에 불과하다. 제대로 물 들어왔던 그때도 못했는데, 지금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 민족말살을 자행케 하는 근원, ‘순수’


제노사이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근간을 이뤄야 가능한 악이다. 악행의 주체가 통념과는 다르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 악행을 유발하는 동기 또한 통념과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흔히 우리가 청순한 미인이나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연상하기 쉬운 ‘순수’가 그 혐오의 원천이다.



‘순수’라는 이상에 대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이상과 그 외의 나머지로 구분 짓는 이분법적 사고를 낳는다. 여기에 크고 작은 감정이 하나씩 더해지면 흑백논리가 되고, 이 흑백논리는 사람이 바라보는 현실을 지극히 협소하게 왜곡시킨다. 백에 있는 사람은 나와 같지만, 흑에 있는 사람은 나와 다른 무언가다.

 

 

드라큐라 백작을 모티브로 한 히라노 코우타의 다크판타지 액션만화 ‘헬싱’을 보면, 흡혈귀가 되어 삶을 이어온 독일 나치 잔당들이 영국 본토에 대규모 강습을 감행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극에 달한다. 이때 독일 나치를 통솔하는 ‘소령’이라는 자가 생각보다 흥미로운 대사를 내뱉는다.

 

 

나는 나다. 나는 너와 다르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이것이 전부였지. 이 세상에 인간이란 존재가 태어난 이후로 줄곧...! 자네도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할 테지? 자아, 선전포고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낸 상태인데, 우리도 전쟁을 해야겠지?”

 

 

요컨대, 수백만이 학살당하는 전쟁이라는 비극의 시작은 어떠한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나와 너 사이의 보이지 않는 어떠한 ‘선’ 때문이라는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사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선’에서 순수 그리고 혐오라는 쌍둥이가 태동한다.

 

 

그렇다면 이 ‘선’, 있는지 없는지 나도 잘 모르는 이 ‘선’은 대체 언제 그어지게 되는 걸까.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살펴보면, 이 제노사이드는 세 단계로 이뤄졌는데, 가장 먼저 이뤄진 게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 등 탄압을 당연케 하는 사회적 제도의 구축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의 축적은 ‘이미 서로 호감을 확인하고 지르는 형식적인 고백’과 같다. 즉, 이미 사회 전반에 그걸 용인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구축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집단, 고리대금업으로 이웃을 고혈을 짜는 집단 등으로서, 오랫동안 묵인되며 축적되었을 무형의 관념은 조금씩 독일인들의 인식을 제한하고, 시각을 축소·왜곡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씌워진 그 색안경은 ‘못생기고 추레한 유대인 남성들이 예쁘고 고상한 독일 여성을 성적인 위협을 가한다’라는 낭설을 당연시 여기게 하였고,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 등은 본격적인 혐오를 표출케 했다.

 

 

단지 독일인들에만 이런 혐오가 국한된 건 아니다.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는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을 묘사하는 프란츠 파농의 문장을 소개한다. ‘흑인은 너무 추워서 몸을 떠는데 흑인이 분노 때문에 몸을 던다고 생각하는 백인 소년은 엄마 품에 몸을 던지며 말한다. 엄마, 저 흑인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서구 사회는 흑인을 육체적으로 강인한 짐승인 노예로 받아들여왔기에, 백인 소년은 흑인을 거칠고 위험한 무언가로 인지하며 자라왔다. 그렇기에 단지 흑인이 추워서 몸을 떠는 걸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으로 곡해하고 방어적인 공격성을 갖는 것이다. 못생긴 유대인 남성이 예쁜 독일 여성을 범한다는 분노와 궤를 같이 한다.

 


서구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서도 그런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이야 매니악한 취미가 됐지만, 2000년대 중반쯤 우리나라엔 ‘오타쿠’에 대한 혐오에 극에 달한 적이 있다. ‘지저분한 피부와 커다란 뱅뱅안경, 산발에 가까운 머리에 뱃살을 출렁이고, 쿰척쿰척 숨소리를 낸다. 한 손으론 미소녀 프라모델을 든 채로 부르짖는다. 내 페이트짱은 이렇지 않다능!’

 

 

우리는 그러한 외형적 특징을 ‘오타쿠’라는 집단에 결부시켰고, 그 한심한 작태에 그들을 비웃고 욕하며 경멸하는 걸 당연시했다. 나는 저렇지 않았고, 저것들은 그냥 딱 봐도 병신 같았으니까.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그 ‘선’은 그런 역할을 한다.


 

‘순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에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세상은 온갖 것들이 뒤섞인 잡탕과도 같은데, 그 속에서 ‘순수’를 꿈꾼다는 건 이물질들을 인식의 저편으로 밀어낸다는 것과 같으니까. 이물질들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듯, 저 선 너머로, 거기에 있는 타자들에게 쏟아부어버리는 것이다.

 

 

가만 보면, 이건 너무나도 편한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건 멋진 일이지만 그건 너무나도 고단하고 스트레스받는 일. 이상을 정제하는 과정에서의 오물은 저 너머로 보내버리고, 저 너머의 타자에겐 혐오를 표출하며 그간 쌓여온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건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정신건강엔 오히려 이로운 일이라 할 것이다.

 

 

순수한 게르만 족의 나라를 꿈꿨던 독일 나치, 백인 이외는 모두 미개한 인종이니 백인처럼 교화시켜야 된다고 믿었던 서구사회, 이슬람의 근본에 천착하며 비이슬람을 향해 테러를 자행하는 IS, 그리고 그러한 이들을 병균을 대하듯 자기네들 땅에서 박멸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유럽 우파. 그렇게 순수는 혐오가 되고, 혐오는 순수가 된다.

 

 

 

# 순수한 시작, 잔혹한 끝


일제의 식민통치나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코끼리를 삼키려는 보아뱀을 떠올리게 한다. 소수의 집단이 거대한 민족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유린하려고 하는 그 행위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평범한 이들을 공범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그 평범한 이들은 자국민이  수도 있고, 때론 피지배국의 지식인이 수도 있다.

 


시작은 ‘선’을 긋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진화론’ 등 당대를 휩쓸던 괴랄한 사상에 의해서도 일 수도 있고,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 등 사회적 제도의 구축에 의해서 표출되지만, 근본적으론 그것을 용인케 하는, 오랫동안 천천히 축적되어 온 보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짚어 ‘선’을 긋고 우리들의 시각을 축소·왜곡시킨다.


 

선 너머의 타자에 대한 혐오가 당연해지고, 그들에 대한 핍박과 학대가 자연스러워질 때, 집단적 폭력은 촉발된다. 평범한 이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지령은 암호화되고 극단적으로 분업화시키면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이 학살극의 가장 근본적인 지점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순수’에 대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

 

 

다큐 3일 ‘서민들의 인생 분기점 구로역’ 에피소드에서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기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면 굽이 굽이쳐 있는데, 타고 갈 때는 직진이라고 밖에 생각 안 하잖아요. 저도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면 굽이쳐 있고 그게 인생인 거 같죠”

 

 

특정 집단을 향한 말살은 그렇게 자행된다. 평범한 이들에 의해서, 자신들이 꿈꿔온 이상향 ‘순수’에 대한 갈망에 의해서. 고귀한 뜻이라든지, 순수한 이상이라든지 뭐 그런 눈부시게 빛나는 것들은 언제건 시대의 풍파에 언제건 쉽게 뒤틀릴 수 있는 부평초 같은 것일 뿐이다.

 

 

영화 ‘파묘’는 재미있었다. 간만에 오컬트 장르에서 몰입하여 즐길 수 있는 이야기였고, 멀리서 비트코인 찾지 말고 우리 할아버지 묘가 저평가된 코인일 수 있겠다는 경각심(?)도 주는 이야기였다. 험한 것이 나올 수도 있지만, 코인투자에 그 정도 위험은 감안해야지. 다만, 이야기를 즐기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한번쯤 ‘악의 평범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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