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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Jul 18. 2024

아니메의 성지, 일본을 향한 애증 -2부-

'널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로 시작하는 일본의 이모저모


# 평범함이 쌓이면 비범해지긴 하는데...


우리네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일본인들의 사회문화를 몇 가지 더 알아보자. ▲평범함에 대한 집착과 ▲선 긋기가 만들어낸 완벽주의, ▲발달지체로 이어지는 가혹한 모성신화를 꼽을 수 있다.



➀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평범하게’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라고, 상황을 잘 읽고 스스럼없이 주변에 말을 건네며 어울리는 사람에 대해 보통 우리는 ‘친화력이 좋다’ 라거나 ‘사회성이 좋다’라고 긍정적인 평을 하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자기주장이 강해 남을 헤아리지 못하고 배려심이 없다’라고 부정적인 평을 한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단어를 두고서도 평가가 갈린다. 보통 우리는 돋보일 만한 무언가를 갖추지 못한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부정적인 평을 하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상식이 있고 성실하며, 이타적이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뭔가 우리로선 단어의 의미를 벗어난 것 같은 평을 했다.

 

 

흥미로웠던 건 이렇게 ‘나대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타인을 향한 선의’에 대한 불편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고마츠 미즈호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조별과제 같은 공동과제를 수행할 때 평균 이상으로 역할을 수행한 이들, 그러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들을 딱 적당한 수준의 일을 한 사람들보다 부정적으로 평했다.

 

 

이런 미묘한 차이들은 앞서 말한 수틀리면 썰어버리는 사무라이 문화 등과 결부 지을 수 있겠다.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고 옆에 앉은 놈이 괜히 나댔다가 모가지가 날라갔는데, 덩달아 내 모가지까지 날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분위기 파악 끝냈으면 입 다물고 대세에 따라 ‘평범’하게 행동하는 게 서로서로에게 베스트이었을 것이다.

 

 

그 아랫것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의 여파인지, 일본인들은 그 어떠한 희로애락 속에서도 평소처럼 ‘평범’하게 표정관리 하는 걸 높게 친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 눈물을 보이는 것 이 모든 게 일본에선 한심한 행동이고, 남들 없는 곳에 가서 홀로 우는 것, 그리고 남들은 그러한 자리에 괜히 끼지 않는 게 그들의 방식이다.

 

 

“취재하다 우연히 아들의 영정 앞에서 혼자 흐느껴 우는 어머니를 보았다. 내가 찾아왔다는 인기척을 내면 마음대로 울지 못할까 봐 조용히 그 뒤에 서 있었다. 그 어머니는 한참을 울었다. 이게 우리 일본인들의 정서다.” ‘일본인의 심리상자’의 저자, 유영수 기자가 들려준 어느 일본인 기자의 취재 경험담이다.

 

 

➁ 새장 속에서 만들어낸 완벽함

‘다산의 마지막 공부’라고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이 노년에 이르러 매진한 마음공부를 다룬 책이 있다. 여기서 마음공부란 유가사상을 말하는데, 저자 조윤제는 논어와 중용, 시경과 주역 등 사서삼경 속 유가사상의 핵심을 짚으며 ‘비범함은 무수한 평범함이 쌓인 결과’라고 말했다.

 


일본 하면 ‘장인정신의 나라’라고 불린다. 그 특유의 섬세함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결과라 할 것인데, 대를 이어온 라멘집에서 보여주는 신기에 가까운 테크닉이나 잊을 만하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노벨상 수상자 등을 보노라면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그 외길인생이 유독 일본에서 포텐이 터지는 듯하다.

 

 

오랫동안 한류전도사로서 한일 문화교류에 앞장서 온 일본 배우 구로다 후쿠미는 이 완벽주의 성향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일본인은 일의 완성도에 대해 100%를 목표로 잡는다. 아니, 되도록 120%라면 더욱 좋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도 기뻐하기 전에 어딘가 실수가 없는지 이곳저곳 점검해 본다. 실수가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타날 거라고 더욱 걱정한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 말한 ‘다산의 마지막 공부’의 ‘평범함이 쌓이고 쌓여 다다른 비범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질적으론 약간 결이 다르다 할 것이다. 그간 일본애들의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해 온 그 관습들의 영향으로 요컨대, 얘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일본은 닫힌 나라다. 단순히 섬나라라는 고립된 지리적 특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서로 간의 마음속 경계를 높게 세워서, 외관으론 하하 호호 어울릴 수밖에 없더라도, 실질적으론 서로 교류하기보단 따로따로 사는 걸 편안해하는 나라다. 잦은 접촉은 의심의 빌미가 되어, 제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 닫힌 세계 속에선 지금의 자리를 벗어날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다. 화(和) 문화라고, ‘각자의 자리에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살아간다’라는 나름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것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일본인들 하나하나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해 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면, 결국엔 지금의 자리에서 내가 해 온 일들을 하며 삶을 이어나갈 뿐이다. 별다른 열정이나 의욕이 없을지라도, 시간이 더해질수록 결국엔 실력은 늘게 되며, 사소한 거라도 계속 쳐다보고 쳐다보다 보면, 결국 그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가기 싫어도 가게 된다. 트집 잡히는 걸 극도로 꺼리기도 하니.

 


그 연원을 가늠해 보면 마냥 멋지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낭만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꽃이 피는 이로하’라고, 2011년 방영한 유명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쇠락해 가는 일본 전통 료칸(여관)에 대해 다룬 휴먼 드라마다.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 뒤쳐져가는 전통 료칸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회를 거듭하며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유치하고 미숙해 보일지 몰라도, 새삼 눈부시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우리나라도 전통을 잇는 시도가 많겠다만, 일본과는 좀 다르다. 일본은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라면, 우리에게 그건 특별한 것이라는 느낌. 유명해진 관광지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홍역을 겪으며 유명 프랜차이즈로 교체되어 가고, 지금까지 꾸려온 가업을 잇기보단 입신양명을 권하는 우리 네니, 바로 옆 자리 일본의 바보 같은 어리숙함에 조금은 눈길이 간다.

 

 

➂ 평범한 엄마여, 비범한 신화가 되어라

‘모성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프랑스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말했다.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건드려선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것인 건 아니며, 거기에 얽힌 담론들도 우리가 인위적으로 과도하게 떠받들어져 있음을 꼬집는 말이다.

 

 

위대한 모성에 여성들을 끼워 넣을수록, 즉 어머니를 성모 마리아로 신성하게 포장할수록, 정작 돌봄의 주체인 엄마들의 숨통은 더욱 조여졌다. 아빠는 육아를 하다 실수를 하면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인데, 엄마가 육아를 실수하면 “너는 그러면 안돼”라는 식의 이중 잣대를 형성한 것. 이것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결과적으로 모성신화가 ‘가사노동 여성몰빵’으로 변질되었음을 뜻했다.

 


이러한 모성신화의 폐해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곳 중 하나가 일본이다. 일본은 갓난아기의 민폐에 생각보다 훨씬 가혹한데, 이 민폐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허들 또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 그리고 이 용인되지 못한 모든 아이들의 민폐는 전부 그 아이의 엄마를 향한 비난으로만 이어져 엄마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전철을 탑승할 때, 아이가 있음에도 유모차는 무조건 접고 타야 하는데, 이 ‘유모차를 접지 않는 행위’는 ‘쓰레기를 방치하는 행위’보다 더 민폐로 간주된다. ▲베이비시터에게 아이를 맡겼다가 사망한 사건을 두고, 시터에게 아이를 맡긴 엄마를 오히려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아기와 외출하는 것마저 ‘왜 나왔냐’라고 훈계를 듣는데, 집에서조차 옆집에서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올까 봐 모든 장난감의 건전지를 빼둔다.

 

 

이처럼 일본의 여기저기에서 아기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론, 이게 그들에겐 ‘자기 영역의 침범’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자신과 타인 간 경계를 칼 같이 긋는 그 특유의 성향은, 대세에 묻어가고 약자들의 호소에 가혹한 성향을 보이는 풍토와 맞물려 여성들의 자녀돌봄을 거들어주려는 것보단 이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을 떠넘기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변형됐다.

 

 

실질적인 육아 도움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다. 애초에 남성들이 육아에 동참하지 않아도, 가족이 도와주면 괜찮을 텐데, 일본은 가족 간 관계가 끈끈하지 않아 친정과 시댁에선 도움을 거의 주지 않고, 엄마들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보육원 같은 공적인 도움도 마땅치 않다. 애초에 보육원을 짓는 것 자체도 인근 주민 반대로 무산되며, 기존의 보육원들은 조금만 아기 소리가 나도 시끄럽다는 인근 민원에 줄기차게 시달린다. 아이러니하게 보통 여성 고령자의 민원이 많다고.

 

 

이 옴싹달싹할 수 없는 환경이 일본을 장인정신의 나라로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엄마들에겐 제대로 가스라이팅을 가하여, 그녀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장 고통받고 있음에도 오히려 남편에게 자기가 육아를 제대로 못하고 있어 죄송하다며 고개 숙이는 뜨악할 만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 사회적 불합리를 지적하고 개선을 부르짖기엔 애초에 어떠한 희망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새장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닐까.

 

 

결국 엄마들에게 행한 자녀양육 짬처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괴한 문제로 되돌아왔다. 발달심리학의 유명한 실험으로 아이들의 공감능력을 테스트하는 ‘샐리와 앤’ 실험에서 유독 일본 아이들이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1년 정도 뒤쳐진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서구의 기준으로 진행된 실험이라서라고 하기엔 한국과 중국 아이들은 오히려 서구 아이들보다 공감능력이 더 앞서나갔기에, 안 그래도 한국과 중국에 라이벌 의식이 있던 ‘배려와 공감의 나라’ 일본으로선 아주 제대로 멘털이 털려버린 셈.

 

 

일본의 심리학계가 원인으로 제시한 건 지나치게 엄격한 일본의 자녀양육. 순종과 복종을 중심의 방식이 공감능력을 저해한다는 것인데,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가 뭐만 하면 사회 전체가 엄마만 싸잡아 비난하는 풍조라면, 내가 엄마라도 극도로 예민해진 나머지 아이에게 아이에게 과도한 통제를 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찬? 소통? 아이가 어떤 해찰을 할지도 모르는데 과연 할 수 있었을까.

 

 

한 가지만 더 보자. 엄마에게 자녀양육을 몰빵하고 문제 생기면 욕만 하는 환경에서, 남편과 가족들에게 자녀 문제로 죄송하다고 엄마들이 연신 고개를 숙일 때, 그녀들의 속은 과연 어떨까. 그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속이 썩어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본은 아동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인데, 대략 우리나라의 3배를 넘어간다.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욕조에 빠뜨려 죽이거나 그 내용도 끔찍하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들의 이야기다. 대학시절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거기서 보면 신들은 항상 인간을 만날 때 인간으로 변하여 나타나는데, 인간이 신을 마주하게 되면 화를 입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변신’은 신들의 특징이고, 그래서 ‘변신이야기’라는 것. 모성신화도 이러한 맥락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평범한 엄마들을 신으로 만들어버리면 그 엄마들에게 남은 건 죽음에 이르는 고통뿐이라는.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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