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메의 성지, 일본을 향한 애증 -3부-
'널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로 시작하는 일본의 이모저모
# 추리소설과 19금 이야기와 신랑살해
일본의 추리소설은 크게 본격 추리소설과 사회파 추리소설로 나뉜다. ‘본격’이 고립된 공간에서 발생한 기괴한 살인사건을 아마추어 탐정이 해결한다가 골자라면, ‘사회파’는 경찰 등이 주인공으로 사건을 추적하며 사회구조적 부조리를 고발한다를 골자로 한다. 전자가 ‘소년탐정 김전일’이 좋은 예라면, 후자는 ‘CSI 형사 장르물’이 좋은 예다.
‘마츠모토 세이초’라고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자이자 아버지라고 칭송받는 일본의 국민작가는 ‘미스터리의 계보’라는 연작 소설집을 발표한 적이 있다. 거기엔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이는 단편이 있는데, 한 명의 남성에 의해 어느 산골 벽지 마을의 수십 명이 몰살당한 사건, 통칭 ‘츠야마 몰살사건’을 다뤘다. 이때 사건의 주된 동기로 꼽히는 게 ‘요바이’라는 마을 구성원 간 혼음 풍습이다.
➀ 츠야마 살인사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요바이’는 야간에 19금 러브러브를 위해 여성의 침소에 잠입하는 행위다. 이게 옛 풍습임을 고려하려 해도 다소 골 때리는 게 ‘잠입 대상에 대한 제한’이 없다. 요컨대, 미혼 아가씨 외에 유부녀, 과부 등 여성이면 그냥 오케이라는 그 심히 개방적인 스탠스는 결과적으로 마을 구성원 모두가 서로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흠좀무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일본은 전란을 숱하게 겪은 나라였기에, 마을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는 말이 있다. 툭하면 마을의 장정들이 대거 갈려나가는 상황에서, 가임기 여성들이 꾸준히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그 마을이 약화되는 것뿐만 아니라 소멸을 우려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마을 내 모든 여성들이 ‘야밤에 조용히’ 어떤 남자와도 잠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 했다.
거기에 당시에 TV가 있었나, 스마트폰이 있었나. 주중의 일이 끝나면 야간에 즐길 거리가 극히 드물었던, 특히 산골 벽촌인 니시카모 촌(츠야마 시 소재) 같은 곳에선 ‘19금 러브러브’만큼 좋은 오락도 없었다. 여성의 인권이 낮았던 시대이니, 이 ‘요바이’가 여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되었을지는 의문이다만, ‘츠야마 몰살사건’을 보면, 지역에 따라 다를지언정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 대한 여성들의 거부권 또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츠야마 살인사건’은 가해자와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죽어버려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현재로선 이 ‘요바이’를 거부당한 한 남자 ‘도이 무츠오’의 ‘폭주’로 규정되고 있다. ‘도이 무츠오’는 집안 내력인 결핵으로 마을에서 1인분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징병검사’에서도 면제 취급을 받아버리자, 마을에서 완전히 ‘남자 구실도 못하는 놈’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극도로 폐쇄된 환경이었던 산골 벽촌마을에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기 좋았고, 마을 내 가십거리만이 그들의 적적함을 덜어주니, 마을 구성원 모두가 아는 데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더욱이 그 소문이 “쟤, 결핵 걸릴까 찝찝하기도 한데, 러브러브하기에도 시원찮은 거 같아.”라면, 어지간한 남자가 아니라면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마을 내 모든 여자들에게 잠자리 거부를 당한다면 더더욱.
어떠한 분출구 하나 없이 새장 속에 눌러놓으면 뭐든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1938년 5월 21일 새벽, 엽총에 일본도, 도끼 등 온갖 흉기를 주렁주렁 달고, 도이 무츠오는 제 할머니를 도끼로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혈극의 문을 열었다. 유서엔 흉악범의 가족으로 손가락질받을 걸 우려해 죽였다곤 하지만, 앞서 조모는 그녀의 병간호를 위해 음식에 약을 타던 도이 무츠오를 ‘날 독살하려 한다’라며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었다.
도이 무츠오는 자기 마을사람들 30여 명을 살해했는데, 주요 타깃들은 요바이를 거절한 여성들이었다. 이미 자기와 요바이를 수차례 가졌음에도 거절한 이웃집 안주인, 요바이를 거절한 것을 소문내고 다닌 중년 여성, 자기와 깊은 사이였음에도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여성 등등. 그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그 가족들이나 그들을 보호하려던 마을 사람들이 휘말려 수십 명이 참살당한 것.
마을 모두에게 병신 취급을 받았음에도, 요바이를 거절한 여성들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결국 여성을 자기보다 낮게 보는, 즉 함부로 해도 되는 ‘소유물’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아니었을까. 요바이도 ‘마을 여성들은 우리 것’이라는 소유 의식에, 다른 마을 남자들은 걸리면 반 죽여놓았다고 하고, 다른 건 몰라도 ‘내 것’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부정당할 때의 수치심이 그 무엇보다 크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이다.
마을사람 수십 명을 사살하고 도이 무츠오는 자살했다. 단 한 명의 살인범에 의해 마을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릴 뻔한 이 몰살사건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본격 추리소설인 시마다 소지의 ‘용와정 살인사건’을 비롯하여, ‘스기사와 마을’이라는 유명 괴담의 모티브로 차용되는 등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존재감을 강렬하게 과시하고 있다. (‘스기사와 마을’은 처참한 살인사건으로 마을이 소멸해 버렸음에도, 여전히 마을이 한 맺힌 귀신들에 의해 존립하고 있다는 괴담)
지금의 시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혼음풍습, 요바이의 소멸은 예상외의 물건의 등장으로 쉽게 소멸했다. ‘전구의 보급’이다. 요바이는 야간에 몰래 들어가 러브러브를 가진 뒤, 조용히 빠져나와야 하는데, 전구는 밤에도 불을 환하게 켜놓을 수 있어, 요바이의 성공률을 극단적으로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거기에 ‘요바이’를 ‘성폭행’으로 바라보는 근대화에 따른 인식의 전환도 기여했는데, 이게 조금만 빨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➁ 첫날밤 엿보기, ‘의외의 속사정’
우리나라는 ‘첫날밤 엿보기’라는 풍습이 있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번쯤 봤을 법한데, 혼례를 치르고 밤이 되어, 신랑과 색시가 한방에 들어가 거사를 치르려고 하면, 굳이 몇몇 남정네들이 (간혹 아낙네들도 있음), 문 창호지를 누가 봐도 알아챌만한 크기로 구멍을 뚫어놓고, 그 안을 보며 마치 야구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음흉한 표정을 짓던 장면이 바로 ‘첫날밤 엿보기’다.
다만, ‘19금 러브러브’는 앞서 말했듯 오락거리가 극히 드물던 당시에 옆나라 이웃처럼 내가 하든, 남이 하는 걸 보든(?), 강렬한 재미를 보장했겠지만, 이 ‘첫날밤 엿보기’ 자체는 통념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초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이 ‘재미’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신랑 살해’ 예방이다.
옛날에는 조혼이 흔한 일이었다. 아이 사망률이 높으니 일단 많이 낳고 본다는 다산다사의 시대에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선 일단 결혼부터 빨리 시켜야 했다. 가임기 이전에 결혼시키는 걸 기본으로 한다고 쳐도, 최소한 출산은 초경을 고려해서 해야 했기에, 결과적으로 여아가 남아보다 나이가 많게 되는 ‘연상연하’ 커플이 흔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알고 보면 작금의 ‘연상연하’도 유고한 역사가 있는 일종의 레트로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첫날밤’은 사실상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임기 이전’에 결혼시키더라도, 잠자리는 ‘초경 이후’에 갖게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신랑이 오늘 처음 만난 중학생 누나 앞에서 쫄아서 어버버 하다가 그냥 잠들어버렸다’가 더 설득력 있겠다.
그러면 뭐 하러 신방 앞에 다들 모여 있을까. 이 첫날밤엔 종종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예컨대, 한 동네에서 같이 살던 연인과 야반도주를 하기 위해, 신부가 신랑을 목 졸라 죽인다던가. 아니면 몰래 숨어 들어온 연인이 신랑을 때려죽인다던가.
당시 결혼은 기본적으로 족외혼이었다. 근친상간에 대한 우려도 우려지만, 그래야 마을의 생존력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외부의 새로운 피를 꾸준히 수혈해야 마을의 양적 질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뿐더러, 예상치 못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우리 마을을 도와줄 동맹이 생기게 된다. 유럽이건 어디건 보통 동맹은 결혼으로 맺어진다.
거시적으론 더할 나위 없겠다만, 미시적으론 다소 문제가 있는데, 당사자들끼린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신랑은 꼬맹이라 아무것도 모른다 치더라도, 사춘기를 맞거나 지났을 신부는 이미 마을에 자주 어울렸던 사내와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뜨거운 열정에 야반도주를 결심할 정도로.
만약 신부가 연인과의 야반도주가 성공해 버린다면, 신부의 마을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저 마을과 결혼시켰더니, 우리 애 초상 치렀다’라는 말이 나오면 어느 마을이 그 마을과 결혼 얘기를 꺼내려하겠는가. 그 순간 그 마을은 대외적으로 고립되어 버리고, 이건 결국 그 마을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든다. 옛날 사극에서 연인들이 결혼 전날 야반도주를 하려다 걸리면 경을 치던 게, 좀 안쓰럽긴 해도 나름 이유는 있던 셈.
그래서 마을 구성원들은 ‘불침번’을 선다. 아무것도 모를 꼬마신랑에게 별 탈 없이 하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마을의 존립이라는 ‘큰’ 목적을 위해 자칫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될 수 있는 신부와 그 연인의 ‘사소한’ 반발을 ‘원만하게’ 원천봉쇄할 수 있도록. 물론 ‘19금 러브러브’가 일어나면, 일단 그건 그거대로 ‘메데타시, 메데타시’(경사 났네, 경사 났어)다.
➂ 너만 조용히 하면, 우리가 산다
골칫덩이를 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골칫덩이를 제대로 마주하여 하나하나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골칫덩이를 무시하고 축소, 은폐하여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 누구나 첫 번째가 정석이고 옳다는 걸 알지만, 막상 그 상황에 마주하면, 누구든 두 번째를 택하고픈 유혹에 빠진다. 그게 쉽고 편하니까.
이 쉽고 편하다는 걸, 개인적인 위선이나 나태로 일축하면 안 된다. 한때 ‘화냥년’이라는 욕의 어원으로 여겨졌던 ‘환향녀’가 있다. 앞서 ‘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 없이 끝낼 수 있었다?’에서 다룬 병자호란과 주로 연관되는데, 아웃복싱을 계획했지만, 인파이팅을 구사한 청나라보다 발이 느려, 오히려 뒤지게 처맞았던 경기의 씁쓸한 부산물이다.
청나라는 승리의 전리품으로 수많은 조선인 포로를 끌고 갔는데, 여기엔 지체 높은 양반집 규수 등 수많은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의 일부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이후가 더 문제였다. 정조를 못 지켰다는 이유로 사실여부와는 무관하게 이혼을 요구당했고,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신풍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해달라.”라고 하였다. 전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여기서 신풍부원군 장유는 봉림대군 즉, 효종의 장인이었다. 어떻게 따지면 나라님보다 윗줄로 볼 수도 있는 사람부터 며느리 내치게 해달라고 징징거렸으니, 나라 곳곳에서 환향녀들에 대한 시선이 어떠했을지는 굳이 일일이 보지 않아도 뻔할 뻔자라 하겠다. 결국 며느리와의 이혼은 허락되었고, 조선의 최고 어른은 골칫덩이를 눈앞에서 치우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전에 천수를 다하셨지만.
이 ‘며느리 버리기’는 사실상 가문의 명예를 위해 구성원을 살해하는 명예살인과 궤를 같이한다. 여성은 극단적으로 말해 가문의 소유물인데, 여기에 하자가 생긴다면, 명문가의 타이틀에 흠집이 가고, 다른 명문가와 어깨를 맞댈 수 없을 우려가 생긴다. 그러니, 물건을 수리할 수 없다면 폐기처분하여야 지금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앞서 다뤘던 ‘요바이’, ‘첫날밤 엿보기’와 비슷하다. 가문을 위해 며느리를 버렸다면, ‘첫날밤 엿보기’는 마을을 위해, 꼬마신랑이 오자마자 죽어나가는 걸 막고자 신방을 엿봤다. 마을의 소멸을 막기 위해 ‘요바이’는 마을 사람 모두와의 혼음을 허용했다. 한 집단의 번영과 존속을 위해, 무시당한 개인을 내팽개쳐버린다면, 바로 '신랑살해', ‘츠야마 몰살사건’ 같은 게 벌어지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얼핏 봤을 땐 우리나라와 일본은 서로 너무나도 다른 바다 건너의 이웃이지만, 근본적인 면에선 서로 크게 다를 건 없는 듯싶다. 개인보단 집단의 논리를 중시하며, 골칫덩이를 풀어내는 것보단 깎아내리고 버려버리는 두 나라를 보노라면, 지리적 특성에 따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심해 이질적으로 느껴질 뿐.
# 글을 마치며
일본의 사회심리학자 야마기시 토시오 교수는 일본을 ‘안심할 수 있지만 신뢰할 수는 없는 사회’라고 말했다. 사회 구성원 간 배신이 일어날 경우 제재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 ‘안심’할 수는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장치가 없다면 상대가 나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이라는 ‘신뢰’는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일본은 길을 가다가 지갑을 흘렸어도, 걸어온 길을 다시 되짚어가 보면 떨어뜨린 자리에 지갑이 그대로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공공질서가 대단한 나라지만, 개인적으론 이것이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설령 호의로 상대를 찾아주려 했어도, 이 상대가 나에게 고마워한다기보단 트집을 잡거나 해코지를 가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높은 것이다.
가령, 눈앞에서 지갑을 떨어뜨린 게 보여 그 사람에게 주워주러 갔더니, 그 사람이 되려 지갑 속 금액이 모자라다고 훔쳐간 돈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면 어쩔 것인가. 훔쳐가지 않았다는 증명을 위해 쓸데없이 진을 빼느니, 그냥 놔두는 게 속편 하지 않겠나. 일본에 국한된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의식을 잃은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가. 그저 호의였는데, ‘갈비뼈가 부러졌다, 병원비 내놔라’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만약 그 사람이 죽어버렸다면?
결국 하나둘씩 우리나라도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지금이야 우리가 뜨악하는 일본의 문화가 어느 순간 슬쩍 우리나라에서도 만개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FT아일랜드와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해서 가깝지만 먼 이웃 일본에 대한 썰을 풀어보았다. 극한의 평범함을 추구하되, 갇힌 세계 속에서 극한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칼과 사쿠라’의 사람들, 이 독특한 특성의 근간을 이루는 그 특유의 괴랄한 지리적 특성을 걷어내고 본다면, 우리나라와 일본은 참 많은 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애증이 사실 동족혐오였나 보다.
다만, 닮아간다고만 하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당장 스포츠에서 한일전이라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것이며, 만약 진다면 그날로 선수들은 비행기가 아니라 바다를 헤엄쳐서 귀국해줘야 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우리네 정서다. 여기서도 무조건 한발 앞서 나가야 하는 법이니, 일본이 ‘안심할 수 있지만 신뢰할 수 없는 사회’였다면,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꾸준히 나아가 ‘안심할 수 있지만 신뢰할 수도 있는 사회’가 되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