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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결혼과 가족의 불가능성, 드라마 '트렁크'/2부

(드라마 트렁크) 결핍 속에서 핀 환상의 꽃, 대물림되는 마음의 상처

by 꿈꾸는인형


#.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 어디 없나


① 결핍 속에서 피어난 환상의 꽃


아기를 키우다 보면 동요를 많이 듣게 된다. 너무나도 말랑말랑한 소리를 듣다 보면, 머릿속이 꽃밭이 되는 것 같아 ‘Unlucky Morpheus’나 ‘Kelly Simonz’s blind faith’ 같은 강렬하고 질주감 넘치는 파워메탈을 갈구하게 되는데, 틀었다간 바로 등짝스매싱일 것 같아 차마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육아는 내가 꽃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 같다.



공부 안 한다고 꾸중 듣고 이불 쓰고 울었어. 꿈나라로 갔죠. 방학 때 놀던 외갓집 앞마당. 빗자루 타고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 먼 앞날의 나를 만났죠. 오 멋지고 훌륭한 사람. 할머니 말씀이 딱 맞아! 하고픈 일 즐겁게 하는 그런 내가 될 거야 그런 내가 될 거야.
- 동요 '빗자루 여행'



나름 정 붙이고 듣는 동요인데, 듣다 보면 나름 재미있다. 사실 아이는 꿈을 꾸는 게 아닐 것이다. 잠들었는데, 할머니 말씀을 떠올리는 건 조금 이상하다. 그냥 이불 속에서 상상에 빠졌는데, 곧바로 빗자루 얘기를 하는 게 매끄럽지 않으니, 꿈나라라고 둘러댔을 것이다. 보통 2~3살부터 거짓말 시작이라고 하니, 저 아이도 충분히 차세대 피노키오의 계보를 이을 자격이 있다.



공상은 정서적인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 일조한다. 스트레스 받을 때 하는 딴 생각이 우리 몸 나름의 대응책이란 것. 공부 안 한다고 혼나서 울었다는 저 아이가 공상으로 빠져 들었듯, 공상은 상처 입고 지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데 탁월한 수단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발현된다.



‘환상수족’이 훼손된 육체-주체의 증거물이자 치유의 매체라고 할 때, 그 최대 소유주는 여성이다. 여성이 욕망과 기능, 생장력이 박탈된 육체를 강요당해 왔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민하는 ‘환상수족’을 경험적으로(또는 역사적으로) 획득해 온, 식물성의 육체-주체-여성들을 묘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이민하는 자신을 포함한 여성의 육체를, 결핍과 부재 속에 생장하는 환상수족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 시집 ‘환상수족’의 해설, ‘환상수족이 달린 식물성의 무성한/무한한 육체’




‘백치들’에서 문제는 아이의 주위에 가상의 부모가 될 만한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실제의 아버지를 현실 속의 다른 대상으로 치환활 수 없다면 불완전한 오이디푸스 구조로 인해 발생한 잉여의 리비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백치들’은 불완전한 부모를 몽상 속에서 완전한 부모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고 실재의 부모 혹은 아저씨들에게 환상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가족소설을 만들어내고 있다.
- 소설 ‘백치들’의 해설, ‘숨의 기원’



‘남성은 동물, 여성은 식물’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기초하여, 환상수족(幻想手足)의 저자 이민하는 훼손된 육체에서 여전히 실감이 존재한다는 ‘환상통’에 착안, 훼손된 여성의 육체에 식물의 환상을 투영한다. 그 발상, 동물과는 다르게 무한히 증식하는 그 환상은 자신을 훼손한 남성중심적 세계를 모조리 잠식하겠다는 의도에 어울린다. 그렇게 이민하의 환상은 자신마저 살라먹으며 잭의 ‘콩나무’ 마냥 스멀스멀 치솟는다.



이민하의 환상이 남성 중심의 세계로 인한 여성의 훼손에 발원지를 뒀다면, 김숨의 환상은 불완전한 오이디푸스 구조에 연원을 둔다. 그리고 그녀의 환상은 ‘자랑할 만한’ 것을 갖지 못한 백치들, 아버지들에게 ‘빛나는’ 무언가를 선사하는데, 한때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던 그들을 결국 긍정하고 끌어안았다는 지점에서 환상수족과 구별된다.



이렇게 주어진 여건을 치유, 변혁하려는 매개로서 그녀들이 활용한 환상이 불륜에도 힘을 보태준다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백지연 문학평론가는 불륜에 대해 “가족 질서를 뛰쳐나오는 순간적인 일탈행위를 통해 금기 위반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낭만적이고 심오한 정열의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킨다.”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주인공들은 결혼과 사랑을 통해 순수하게 행복해질 수 없다. 고독의 숙명은 주인공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고통의 시간은 지속된다. 서하진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불륜’은 그러한 의미에서 숙명적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의 방식이다. 결혼에서조차 아버지와 가족의 존재를 보상받을 수 없는 불행한 주인공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상구의 삶이 바로 불륜의 사랑이다.
- 소설 ‘라벤더 향기’의 해설, ‘삶의 모욕을 견디는 불온한 사랑’



좋은 말이다. 다만, 굳이 이혼이 있음에도 불륜을 선택한 그 근거로 상대에 대한 분노 외에 지금까지 여성을 구속하고 훼손해 온 가부장제까지 끌어와 덧대는 걸 보노라면, 뭔가 배보다 배꼽이 큰 느낌이다. 그런다고 검은색이 하얗게 되는 것도 아닌데. 물론 이혼이라는 칼로 그간의 관계를 딱 잘라내는 것보단 불륜이라는 독을 먹이는 게 이 관계를 더 찐하게 쥐어짤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 아닌 소설이라면 응당 그래야겠다.



불륜을 일상에서의 비상구로 간주하던 서하진의 인물들은 그 근원적인 한계로 탈주와 회귀를 반복하게 된다. 기존 가족구조에 대한 환멸로 결혼에 기대를 걸었지만 실패했다. 다시 불륜이라는 ‘낭만적 환상’으로 피폐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 또한 꽃과 향기의 세계가 아니라 악취와 구토의 세계임에 좌절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들의 타인에 향한 갈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만으로 수축한다.



그 수렴의 끝, 서하진의 인물들이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며 자아내던 ‘꽃과 향기’의 이미지들의 끝에는 이민하의 환상수족이 있을 것이다. 훼손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놓아버릴 수 없는 자신을 식물로 이미지하고, 주어진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환상의 수족으로 범람하는 것. 우리나라의 여러 드라마가 결혼제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다만 라캉의 환상공식, 결핍된 주체가 환상의 장막 너머의 대상을 갈구하며 끝없이 유랑한다는 그 공식의 근본적인 기제는 주체의 결핍에 있다. 유랑의 끝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주체의 내부에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결혼, 불륜 등으로 표상되는 환상의 머리끄댕이 잡고 울고불고할 게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훼손에도 한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② 유전병처럼 대물림되는 마음의 상처


드라마 ‘트렁크’에서 노인지의 전 남친 서도하가 수년간의 잠적을 끊고 나타나,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서도하가 이런 말을 한다. “네 엄마가 아니야. 너야. 우리면 됐잖아. 애초에 날 바꿀 필요도, 누구에게도 인정 같은 거 받을 필요 없었다고. 네 욕심이 내 인생을 아작 냈어. 아직도 내 탓을 하고 싶어? 난 네가 제일 무서웠어.”



대학시절, 심리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이런 말을 했다. 부모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보호소에 수감되는 아이가 간혹 방송에 나오는데, 이때 방송을 보자마자 입양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 아이는 어른과의 상호작용에서 배운 게 오직 폭력뿐이라, 입양 초기엔 잠잠하다가 나중엔 폭력을 일삼게 된다. 이를 무시한 케이스는 대다수가 파양되며(법이 바뀌어 요즘은 파양이 쉽진 않다), 이제 아이는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는다.



‘너도 네 엄마와 똑같다’라는 말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딸에겐 지극히 잔인한 비수일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굴레는 피할 수 없다. 유전병만이 대물림되는 게 아니다. 부모가 조부모에게 물려받은 마음의 상처 또한 대를 이어 내려온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찌 됐건 자녀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에게 받은 방식대로 자기 자녀를 대하기 때문이다.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에서는 따뜻하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엄마의 사랑이라는 게, 누군가에겐 그 어떤 것보다도 처절하고 독하게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굴레일 수 있음을 다양한 사례로 설명했다. 가족상담 분야의 권위자인 저자 이남옥은 반복되는 가정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엄마와 자녀 간 감정적 유착에서 오는 엄마의 사랑은 아이가 원하는 애정이 아닌 엄마의 감정적 해소일뿐이라고 말했다.



빠른 아이의 발달을 보여주고 싶었던 엄마는 아이에게 기어보기를 시켜봅니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그래도 아이가 따르지 않자, 아이의 두 다리를 강제로 붙잡고 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안정애착 유형의 엄마는 관점이 자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지는 않습니다. 아이에게 자신의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 1부 엄마가 주는 사랑, 아이가 원하는 사랑



미분화된 사람들은 '그래, 네 생각은 이렇구나. 나랑 다르구나'가 아니라, ' 내가 슬프면 너도 슬퍼야 돼. 내가 이렇게 힘든데 넌 어떻게 그럴 수 있니?‘의 시선으로 자녀를 대합니다. 엄마가 슬프면 자녀도 함께 슬퍼해야 하고, 내가 고통스러우면 자녀도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워야 하고, 다른 관점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 아빠가 너는 어떻게 좋을 수 있니?‘ 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강요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행동을 거스르면 경제적 지원을 끊거나 극단적인 관계 단절의 행동을 보입니다.
- 2부 엄마, 이제는 나를 놓아줘



사실은 그닥 아름다운 게 아닐 수도 있는 엄마의 애정은 자녀의 날개를 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녀의 가정에까지도 영향을 끼친다. '투사적 동일시'라고, 부모의 감정쓰레기통이었던 자녀가 무의식적으로 억눌린 감정의 해소를 남편과 자녀에게 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유년기를 되풀이하는 가정이 되고, 남편도 결국 자신의 부모와 같아진다. 남편을 샌드백으로 하는, 부모와의 왜곡된 화해라 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자기가 받았던 상처가 다시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해진다.


간혹 이러한 학대 아닌 학대 속에서 아이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소위 주변에서 철들었다고 칭찬하기 일쑤인 ‘어른아이’들의 기저엔 종종 ‘미분화’가 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녀가 개별화되지 못했음을 말하는데, 이런 자녀들은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나머지, 일생동안 엄마에게 얽매이며, 주체로서 바로 서지 못한 채 엄마의 객체로서 결핍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어른아이’들이 결혼했을 때 파국을 마주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주느라 정작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 아이들은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제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면에 쓰게 된다. ‘가짜 감정’의 저자 김용태는 표면적으론 배려하고 배려받는 관계를 형성하겠지만 그 근간은 사실 상대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정서적인 관계가 아닌 일종의 업무적인 관계라고 말했다.


서로가 각자의 가면을 보고 만났으니 그 위에 성립한 결혼 또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결국 결혼 안에서 찾을 게 아니라, 결혼 너머 자신들의 원가족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제시된다. 문제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상황에서 부부갈등을 결혼 안에서 해결하는 것은 달을 보아야 함에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이다. 환상의 장막 너머 낭만에 언제나 실망하는 건 당연하다. 애초부터 거기에 원하는 건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트렁크’의 노인지가 굳이 양성애자 남자를 배우자로 골라 결혼식만 잘하면 된다며 목을 매던 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 남자의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남자를 샌드백으로 하여 엄마와의 왜곡된 화해를 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왜곡된 화해라는 게 결국 엄마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으로 귀결되겠지만 말이다.




#. 과연 한정원이 노인지의 목을 안 조를까?


드라마 ‘트렁크’에서 한정원이 노인지에 대한 마음이 커져갈 때쯤, 갑자기 한정원의 환상 하나가 이야기에 뜬금없이 비집고 들어온다. 침대에 누워 잠이 든 노인지의 위에 갑자기 한정원이 올라타, 이불을 뒤집어 씌워 죽일 듯이 목을 조르는 환상이 그것이다.



결국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리 에필로그가 밝고 화사했더라도,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치유의 서사가 눈부시긴 했지만, 그 서사에서 각자의 부모에 대한 게 일절 없었다. 한정원의 아빠는 의식 없이 병실에 누워만 있다가 전 부인에게 싸대기 연타를 맞다가 하직했고, 노인지의 엄마는 대사 속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두 인물이 부모와 마주하여 그들에게서 얻은 상처를 정리할 여지는 없었다.



근본적인 결핍을 해소하지 못한 만큼, 사실상 두 사람은 내적으로 어떠한 진일보를 하지 못한 채 제 자리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한정원은 제 엄마를 무자비하게 패고 유린하던 아빠를 따라 목을 조를 여지가 있겠고, 노인지는 제 엄마와는 구별되기 위해 서도하에게 했던 걸 그대로 한정원에게 답습할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각별하게 여기니 다를 수도 있겠다지만, 누군들 결혼할 때 서로를 각별히 여기지 않았을까.



그러니, 두 사람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옳다. 오케이. 좋다. 오늘도 한 커플 찢었다.



지금까지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를 통해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봤다. 근대에서 시작한 연애결혼은 그 특유의 불안정성으로 가족을 꾸려나가기보단 자신들의 낭만을 충족시켜 줄 결혼에 얽매이게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들의 자아를 섬세하게 살피는 건 좋지만 가족에 대한 생각이 도외시되어 가는 건 조금 유감이다.



그렇다고 또 결혼을 넘어 가족으로 왔을 때 트러블이 없는 건 아니다. 근대의 가족구조는 아름다운 모성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을 남성에게 예속시켰고, 프라이버시의 내밀한 공간 속에서 숱한 야만과 폭력을 낳게끔 기능했다. 그 아래 구성원들은 당신들처럼 살지 않겠다며 치를 떨지만 유감스럽게도 상처의 대물림을 피해가진 못한다.



완벽한 결혼과 가족이라는 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같은 거다. 쓸데없이 그걸 풀겠다고 달려드는 순간 서로 피곤해진다. 자신의 결핍 해소를 위해 피해자가 가해자를 수용해야 한다는 해법도 좀 그렇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누구나 마음 속의 나무에 옹이 몇 개는 달고 사는 법이니, 삶이 크게 저해받지 않는 거라면 그냥저냥 품고 가는 것도 낫지 않겠나 싶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백치들에게 ‘빛나는 환상’을 부여하는 김숨 작가가 눈부시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경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을 품겠다는 건, 그들에 대한 연민이라는 순간적인 감정의 발로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건 타인에게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그 편하고 쉬운 길을 놔두고 고단하지만 유랑의 끝으로 향하는 일면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 참고서적 -

문화정치학의 영토들(2007, 이진경 외)

이토록 두려운 사랑(2018, 김신현경 저)

환상수족(2015, 이민하 저)

백치들(2006, 김숨 저)

라벤더 향기(2000, 서하진 저)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2018, 이현미 저)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2020, 이남옥 저)

가짜 감정(2014, 김용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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