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트렁크) 기간제 결혼을 핑계로 살펴보는 가족구조에 대한 잡썰
지난 연말,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뒀던 ‘오징어게임’의 새 시즌 개봉에 앞서, 공유와 서현진 주연의 넷플릭스 멜로드라마 ‘트렁크’가 개봉했다. ‘오징어게임’에서 애먼 사람 붙잡고 딱지치기하다가, 자기가 이기면 싸다구를 시원하게 날려대던 나이스한 개새끼 공유가 여기서는 오랫동안 가정 학대에 노출되어 정신이 피폐해진 남자 ‘한정원’으로 분했다.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와 그 근처에서 발견된 의문의 시체로 시작하는 드라마 ‘트렁크’는 한정원(공유)과 노인지(서현진) 간 ‘기간제 결혼’이라는 독특한 설정의 로맨스에 미스터리를 더했다. 한정원의 전 부인이 직접 이 결혼을 주선했다는 골 때리는 배경 또한 ‘도대체 이것들은 뭔 생각인 건지.’라는 호기심에 몰입감을 더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갖췄지만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한정원의 저택을 무대로, ‘할말하않’스럽게 펼쳐지는 둘의 기간제 결혼이야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한정원의 전 부인, ▲결혼 직전 장모에게 소수자임을 전국적으로 까발려져 잠적한 노인지의 남친, 그리고 ▲수년째 노인지를 쫓은 스토커 등으로 무겁고 딥하면서 미스터리하게 전개된다.
제대로 정돈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겁고 딥하던 이야기는 나름의 작법을 거쳐 ‘서로 우연히 두 번 만나면 다시 시작하자’라며 해피하게 마무리된다. 그 공허하고 메말랐던 무채색의 두 인물이 한껏 색채감 가득한 풍경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활짝 웃으며 끝나는 게 마음 따뜻해지고 좋았다.
이야기의 메인은 피폐해진 영혼들의 정신적 치유라 할 것이다. 어머니의 자살에 따른 심각한 트라우마로 약물 등에 의존하던 한정원이 노인지를 만나, 그녀의 소소하면서 일상적인 터치 속에서 피폐해졌던 영혼을 회복하고, 오랫동안 눌러 붙었던 상흔을 벗겨내는 과정을 섬세한 필체로 그려냈다.
오랫동안 잠적했다가 나타난 남친 서도하를 향해 수년간 눌러왔던 회한을 토해내며 비로소 멈춰있던 자신의 시계를 돌리는 노인지 등은 한정원을 치유하는 그녀의 일면과 함께 여성 서사로서의 매력을 유감없이 쏟아냈다. ‘트렁크’라는 타이틀은 이야기의 시작이자 기간제 결혼업체 직원으로서의 노인지, 그리고 고철로 팔아버리고 싶어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끌고 온 노인지의 시간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 치유의 과정과 배우의 열연이 너무 눈부셔서 그런지, 드라마 정주행을 다섯 번 했다. ‘아주 오래 전에 한정원과 노인지는 만난 적이 있고, 그때부터 이미 호감이 있었다’라는 설정에 대해 누군가는 진부하다고 여기는 듯하지만, 나는 제법 괜찮았다. 진부할지 몰라도, 그게 앞서 말한 포인트들의 짜임새를 갖추게 했다.
다만 섬세하고 유려했던 노인지와 한정원의 서사와는 다르게, 나머지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작품은 이미지로 설명을 부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세련되고 감각적인 건 알겠어도, 너무 설명 없이 이미지로만 설명을 하게 되면 그 의도는 어땠을지는 몰라도 이해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한정원의 전 부인 이서연을 오롯이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스토커 엄태성의 캐릭터 또한 약간은 아쉽다. 정중한 얼굴의 가면으로 온전히 가려지지 못하고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그 야만과 폭력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가면에 조금 더 힘을 주는 묘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초반에 보여줬던 유능한 떡 공예가로서의 모습을 조금만 더 조명했다면 보다 섬뜩한 악인이 나왔을지 모를 일이다. ‘사술’로 폄하되는 그의 떡 ‘어레인지’가 처음에 잠깐 나왔다가 마는 게 아쉽다.
이외에, 몇몇 눈에 걸렸던 불필요해 보이는 설정들은 원작에 많은 손질을 가한 드라마가 원작에 보인 나름의 노력으로 봐야겠다. ▲굳이 노인지의 단짝친구를 레즈비언으로 했어야 했나, ▲꼭 남친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데 얼굴 한번 나오지 않는 엄마로 했어야 했나 등은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불요한 게 아니라 원작의 형을 보존하려는 작법이었다고 보면 이게 또 그런대로 맛이 난다.
오랜만에 울림을 주었던 드라마를 나름의 방법대로 기억하고 싶어서 이번 이야기를 쓰게 됐다. 두 가지를 더해볼 건데, 하나는 근대적 가족의 성립 등 가족구조에 대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가족 구조 속에서 대물림되는 마음의 상처에 대한 것이다. 드라마 ‘트렁크’ 속 기간제 결혼과 주인공 노인지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색다르게 곱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하여 근대적 가족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엔 주거공간에 대한 재정립이 한몫했다. 프랑스혁명은 시민사회의 부상을 가져왔고, 시민사회는 자신들의 주거지에서 공적인 역할을 덜어냈는데, 그 결과, 지금까지 귀족계급의 살롱으로 정치, 사교, 교육 등 여러 공적인 역할까지 수행했던 집은 이제 그 역할들을 시민사회의 광장으로 밀어내고, 사적인 역할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족만의 내밀한 공간이 된 것이다.
산업혁명의 발발 등 여러 사회구조의 변화 또한 ‘집’을 가족만을 위한, 보다 내밀하고 배타적인 사적 공간으로의 구축에 일조했다. 이제 집은 아버지가 바깥에서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올 동안, 어린이와 이들을 돌보는 어머니가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안식처로서 외부에 두터운 벽을 치기 시작했다. 이제 공적인 역할이 없는 프라이빗(private)한 곳이니 외부의 누군가가 여길 볼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16~17세기에 이르러 한편으로 어린이만의 순진무구함과 미성숙한 유약함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유약함과 순진함, 훈육의 필요성을 내포하는 어린이 개념의 등장은 동시에 그 어린이를 보호하는 어머니의 존재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제 여성은 이 어린이를 넘치는 사랑으로 보살펴주어야 하고, 어린이와 그를 보살피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가 임금을 벌어들여야 했다.
-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근대 가족과 프라이버시의 탄생'
나름의 합리성을 갖춘 가족 간 분업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남녀 간 위계를 조장하게 결과로 이어졌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남성의 원활한 사회활동을 위해 필수적인 동등한 가치의 노동이었음에도, 점차 남성의 사회활동을 위한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해 간 것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는 사회가 남성의 노동 재생산을 위해 성관계 등 여성의 가사노동을 무상으로 착취했다고 비판했다.
섹스와 성, 성욕 등 지극히 사적인 것들 또한 집에서만 하는 게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것으로 정리됐다. 그리고 그 어떠한 감시도 없는 곳에서의 성충동의 분출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성욕을 제한케 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아내의 성적 표현, 예를 들면 ‘관능적인 쾌락에서 오는 경련’ 등은 매우 해롭다고 믿어졌는데, 당시의 의학계는 아내를 만족시키면 남편의 수명이 깎이거나 성기능이 훼손될 수 있다는 흠좀무한 조언을 건넸다. 아내들은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남편에게 종속되어 갔다.
그간 별생각 없이 냅두고 있었는데, 한번 손대니까 맛들려서 계속 건드리듯, 성에 대한 잣대는 전방위적으로 디테일해졌다. 일반적인 성관계 이외는 다 부정한 것, 질병으로 규정되고 규제되었다. 즉, 부부간 아이를 낳기 위한 목적의 성관계가 아닌 여러 행태들은 페티시즘, 노출증, 동성애 등으로 하나하나 규정되었고, 새로운 공포와 혐오의 대명사로 타겟팅되었다. 그래서 근대적 가족의 탄생이 ‘변태의 발명’을 낳았다고 보기도 한다.
드라마 ‘트렁크’에서의 ‘기간제 결혼’이라는 골 때리는 설정이 계속 눈에 밟히는 건 이러한 관념의 영향이라 할 수도 있겠다. 외관은 결혼일지언정 보통의 결혼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간제 결혼’이다 보니, 노인지가 한정원에 집에 있는 게 허용되지 않은 타인이 프라이빗한 공간을 점하는 것 같고, 노인지가 한정원과 같이 잠을 자고 몸을 섞는 게 혼외정사의 느낌이 솔솔 나는 게, 영 넘어가지지가 않는 것이다.
지금이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연애결혼 또한 근대적 가족 등장에 따른 소산이다. ‘사생활의 역사’에 따르면, 이전까지의 결혼은 두 당사자가 아니라 집안 간의 문제였고, ‘연애결혼’이란 말은 1797~98년 이후에 사전에 처음 등장했다. ‘부부애’라는 단어 또한 그 이전엔 거의 쓰인 바 없다고 하니, 당시엔 결혼에 로맨스가 딱히 없었던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아간다는 ‘연애-결혼-가족’의 도식은 나무랄 데 없이 낭만적이지만, 마냥 하나로 취급하기엔 각각의 개성이 한계가 된다. 밀물과 썰물처럼 요동치는 로맨스에 수십 년을 가져가야 하는 결혼이란 성을 쌓는다는 건, 결국엔 그저 파도가 밀려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결혼의 불안정성을 부각시켜, 성 쌓기 이후의 단계로 나아가기보단 성 쌓기를 반복케 한다.
▲모종의 사유로 이혼했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지 못해 결국 서로가 재결합한 부부를 다룬 SBS드라마 ‘연애시대’, ▲카사노바에게 아내를 꼬셔달라고 하고 결국 이혼했지만 다시 처음부터 만남을 시작하게 되는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등등. 결혼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다시금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한다는 지극히 소탐대실스러운 작법은 연애 위에 쌓은 결혼이 어디까지 격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일 것이다.
한국의 가족소설(가정을 배경으로 가족관계를 다루는 소설)에는 특유의 가부장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다뤄진다.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에게 빨대 꽂은 것들로 여기는 가부장의 폭압에 신음하던 가족구성원, 특히 딸들은 온갖 학대를 당하는 엄마를 연민하면서도 엄마처럼은 안 살겠다는 일념 아래, 이 굴레를 벗어나는 수단으로써 결혼에 희망을 건다. 아비와는 다른 완벽한 남자와 만나, 여기와는 다른 장밋빛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들의 도피처로서의 결혼은 대개 비극으로 끝나는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아빠와 다른 남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편 또한 한국의 가부장제에 익숙해진 남자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그저 그녀가 가졌던 환상의 장막을 벗겨낼 뿐이다. 결국 그녀는, 결핍된 주체로서 환상의 장막 너머의 대상을 사랑했던 딸은 다시 새로운 욕망의 유랑을 떠나게 된다. 다다르지 못할 이상향을 찾아서 말이다.
유랑길에 오른 딸 등이 기존 결혼제도 자체에 메스를 들이대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부속품을 바꾸는 걸로 해결이 안 되면 제품이라도 통째로 바꿔봐야 한다. 그래서 드라마 ‘트렁크’는 예전에 ‘부부끼리 사이가 좋아도 각방 쓰면서 살자’라며 신선한 충격을 줬던 JTBC 드라마 ‘아내의 자격’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싶다. 기간제 결혼은 여성들이 갈구해 왔던 새로운 부부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도의 일환인 것이다.
불문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재클린 살스비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라는 책에서 근대에 등장한 연애결혼이 그 이전 시기의 가문 간 결합으로서 혼인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의 연애결혼은 부양능력이 되는 남자가 가정을 잘 돌 볼 수 있는 여성을 찾는 사실상 성별분업에 걸맞은 짝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순전한 연애감정만으로 이 행위의 제도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외관만 남녀 간의 자유로운 만남이라는 비판은 연애를 결혼의 전 단계가 아니라 연애를 결혼과 분리시켜 그 자체에 주목하는 움직임과 이어진다. 한국은 대략 90년대부터라 할 수 있는데, ‘이토록 두려운 사랑’에 따르면, 법과 제도에 관심이 많았던 이전의 페미니즘과 달리 일상의 변화에 관심이 많았던 90년대의 영 페미니즘이 고유한 존재로서 자신을 승인받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로서 ‘연애’ 자체에 집중한 바 있다.
영 페미니스트들의 관심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연애가 더 이상 결혼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관계 맺음의 장으로 등장하면서 사랑과 연애, 결혼과 성이 일치해야 한다는 근대 이성애의 규준이 깨어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근대에 등장한 ‘이성애 핵가족의 승리’라는 서사가 한국에서 통용될 수 있었던 시기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정도까지라고 봅니다. 90년대 와서 이것이 깨지기 시작하는 거죠.
- 이토록 두려운 사랑, 김신현경
이와 함께, 그녀는 남자가 여자에게 대시(고백)하여 연인이 되는 한국 특유의 대시 문화에 대해, 그녀는 절묘한 한국형 사랑, 결혼, 성의 분리라고 평했다. 더 이상 연애가 결혼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자는 이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도 되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데, 이 대시를 통해 ‘법’이 강제할 수 없는 책임을 어느 정도 ‘문화’로 강제한다는 것이다. ‘(결혼까진 모르겠고) 니가 고백해서 사귀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뭐 그런 거.
기존의 제도에 대한 반발로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키고, 결혼에 이런저런 메스질을 하는 게 나쁘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결혼의 근간은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기간제 결혼’이 밝게만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둘 사이의 아이 같은 결혼의 본질은 도외시했기 때문이겠다. 하긴 이런 거 다 따질거면 꿈은 왜 꾸겠나.
결론적으로 완벽한 결혼을 이루지 못했다는 실망은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게 표출된다. 로맨스를 위해 결혼을 부숴버리기도 하고, 결혼 자체에 메스를 들이대 신박한 발상을 꺼내 놓는다. 다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시도들이겠다만, 애초에 연애와 결혼을 분리해서 따질 요량이라면, 결혼이라는 제도의 용법을 넘어 과도하게 낭만을 요구하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하지 않나 싶다.
요컨대 자신의 결핍을 두고, 쓸데없이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는 건 아니냐 싶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