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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Mar 08. 2024

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 없이 끝낼 수 있었다?-2부-

고구려-당 전쟁, 병자호란과의 비교를 통한 IF역사물


(1부에 이어)



당시 조선 조정이 받아본 장계에 따르면, 청나라의 진격은 다음과 같았다. 12월 9일 오전, 청나라 3만 병력이 압록강 북방 20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12월 11일 새벽, 청나라 군은 460리를 남하하여 평안도 안주를 통과했다. 12월 13일 심야, 580리를 주파하여 개성을 통과했다. 청나라 군이 매일 230리(80km) 이상을 주파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은 조선이 강화도 파천을 아니 그 준비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내막은 이랬다. 홍타이지는 동로군(창성  영변  한양)에 1개 부대, 서로군 (의주 → 안주  개성  한양)에 전군, 본진, 후군 3개 부대를 배치했다. 이때 서로군 전군 중 기병 일부를 떼어 선발대를 구성하여 한양으로 내달리게 했다. 조선군으로선 똑같은 청나라 군이었지만, 사실은 각각의 부대가 달랐던 것이다.

 


12월 9일 장계 속 청나라 군은 총 병력 3만이 아니라, 서로군 전군의 본대 4,000명이었다. 적 병력을 과대하게 인지했던 것이고, 앞서 출발한 선발대 300명은 아예 탐지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고 있었고, 12일 11일, 13일 장계에 등장하는 병력이 바로 이 소수정예였던 이 선발대였다.


 

과대포장된 청나라 군대에 얼어버린 조선 조정이 강화도 파천에 실패한 순간부터 조선군의 아웃복싱 전략은 사실상 나락으로 향했다.


 

병자호란의 조선은 고구려와는 사뭇 양상이 다른데, 요인은 세 가지 있다. ▲(예비대의 부재) 왜란 등으로 피폐해진 조선으로선 산성을 기반으로 방어전을 수행하는 게 고작이었다. 고구려는 당 태종이 안시성을 우회할 경우 뒷치기를 가할 10만 병력이 있었지만, 조선은 홍타이지가 대놓고 패싱을 해도 추격할 군사가 없었다. 몇몇 거점에 예비대가 있었다지만, 대부분 보병이라 기병을 뒤쫓을 수도 없었다.


 

▲(저지력이 떨어지는 산성 방어전략) 고구려와는 달리, 조선의 산성들은 주요 길목에서 가까우면 3~40리, 먼 곳은 1~2일이 걸리는 곳이었다. 방어로는 최고였지만, 최악의 경우, 평안도는 진격을 저지할 게 전혀 없는 아우토반이 되어버린다. ▲(선 조치 후 보고 불가) 당시 조선은 설령 전쟁에 패했더라도 상부에 명령 없이 출격에 나서는 걸 벌하지 않았다. 나서봤자 얻어터졌겠지만, 구국을 위해 나서봤자 문책만 당했다.



 

# 너도 한방, 나도 한방... 믿을 건 마마뿐?!


인파이터 청나라는 아웃복서 조선을 구석에 제대로 몰아넣었다. 삼남에서 올라오는 근왕군은 족족 박살 났고, 평안도의 간헐적인 구원시도도 파상적으로 밀려오던 청나라 군을 만나 또 족족 털렸다. 함경도의 병력은 연이은 패전소식에 기세가 꺾여 남한산성 인근에서 나서질 못했고, 마지막 피니시로 세자들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됐다.


 

완벽하게 남한산성을 포위하는 데까지 성공한 청나라 홍타이지는 조선이 스스로 대가리 박으러 나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실제로 홍타이지는 두 달 반에 걸쳐 조선을 말려 죽일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홍타이지로선 지금 조선을 밟아놔야 차후 명을 요리해 나가는 데 차질이 발생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홍타이지는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병자년 12월에 선빵을 때려, 정축년 1월 10일 남한산성까지 완벽히 몰아넣었는데, 1월 17일 갑자기 강화를 맺으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 전황도 시간도 모두 홍타이지 편이었음에도, 굳이 대화를 요구했고 응하지 않자 대포를 쏘며 이야기하자고 하는 등 또라이같은 행보를 보인 것.


 

굳이 자신의 우위를 내려놓는 기괴한 포지셔닝은 결과적으로 한 달도 되지 않아 대치를 종결시켰다. 조선 인조가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머리 박고 군신의 예를 갖춘 ‘삼전도의 치욕’을 굉장히 굴욕스러운 역사라고 하지만, 사실 오히려 이것보다 더 막장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당시의 맥락을 보면, 이 정도에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정축년 1월 10일과 17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구범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는 청나라 군에 ‘마마(천연두)’가 창궐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병자호란 이후, 홍타이지의 조카인 보호토가 처벌을 받았는데, 죄명은 홍타이지 어영 근처에 있던 자신의 부대에서 마마가 발생했음을 알고도 끝내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여진족들은 천연두에 특히 취약했다. 그래서 누르하치 때부터 ▲마마 환자를 탐색하는 ‘사두관’이라는 관직을 두었고, ▲‘생신’(마마 면역 미보유)과 ‘숙신’(마마 면역 보유)으로 사람을 구분하여 철저하게 역할을 분담시켰으며, ▲천연두가 터지면, 어떤 상황이건 간에 아닥하고 ‘피두소’에 들어가 자발적 격리를 당했다.


 

유감스럽게도 홍타이지는 ‘생신’이었고, ‘마마’의 ‘ㅁ’ 자만 들어도 국정이고 나발이고 피두소로 빤스런하는 남자였다. 가오고 나발이고, 개똥밭을 구를지언정 일단 사는 게 중요한 법이다. 이런 자기 보호가 극에 달한 남자의 어영 부근에서 마마가 생겼으니 청나라가 압살이네,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네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 홍타이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청나라 ‘생신’ 병사들의 사기가 떡락하여 무단이탈이 발생했고, 동맹군으로 참전한 몽고 군에게도 슬슬 퇴각하려는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청나라 군대 전체를 뒤흔드는 위기였고, 홍타이지로선 마지막 남은 가오라도 챙기기 위해, 조선과 급하게 강화를 맺으려 한 것.


 

어찌 보면, 조선에는 잘된 일이지만, 너무 아쉬운 대목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호란 한 달 전부터 이미 천연두가 만연해 있었으니, 사전에 청나라에 천연두 창궐에 대한 게 흘려질 수 있었다면, 그럼 이런 대규모 전격전 또한 애초부터 돈좌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천연두 때문에 명나라도 깊숙이 쳐들어가는 걸 피하던 애들이었는데.


 

기존 전례에서 너무 속 편한 결론을 낸 것도 아쉽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바로 수도를 공략하는 전격전을 구상하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조선은 그런 건 없을 거라고 낙관했다. 그 전엔 꾸준히 전격전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에도, 자취를 감추게 된 건 아마 ‘역시 오랑캐는 오랑캐’라 얕잡아 보던 조선의 인식이 기저에 있지 않았을까.

 


 

# 인간의 지능은 끝이 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결국 외세의 침공이 있을 때, 아무리 산성을 거점으로 극한의 방어전을 펼친다고 해도, 한 번의 대규모 요격은 필요하다. 공세종말점까지 버티겠다는 한반도 특유의 극단적인 아웃복싱은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전 국토가 유린되고, 국력에 영구적 손상까지 오는 걸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도 조선도 요격을 계획했었다. 다만, 그게 고구려는 주필산 전투로 한방에 훅 가버렸고, 조선은 초기 대응 실패로, 남한산성이 인조의 피난처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반격의 거점을 상실하여 삼남의 속오군 등이 각개격파 당했다. 어찌 보면 조선은 기회조차 갖지 못한 거지만, 전투양상을 보면 있었어도 별 차이 없었을 듯하다.

 


요동지방과는 다르게 평안도는 유목민족들의 아우토반이 되기 일쑤이니, 고려의 강조가 양규가 흥화진 등 압록강 일대에서 시간을 벌 동안 30만을 이끌고 올라온 건 어찌 보면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포위진을 형성한 것까진 좋은데, 유목민 특유의 돌파력을 무시했다가 쌈싸먹기 전에 털렸을 뿐.

 


조선이 여진족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ADSL’급 진군속도를 무시했다가 캐망했던 건, 어쩌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한반도 특유의 뿌리 깊은 전통의 슬픈 답습 아니었을까.


 

그래도, 고구려가 주필산 전투에서 캐망해도 결국엔 당나라를 밀어냈던 것처럼 고려도 플랜B가 있다면 괜찮은 거다. 고구려가 천라지망 같은 산성 간 연계체계로 기어이 당나라를 밀어냈다면, 고려는 무엇을 갖춰야 했을까. 고구려와 같은 연계체계를 갖추기 어렵다면, 조선 병자호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생화학 전쟁’이다.

 


한반도는 삼국시대부터 마마(천연두)가 툭하면 창궐하는 등 질병신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던 곳이었고, 만주족들이 특히 마마에 취약했던 만큼 천연두를 제어하진 못하더라도 발병 정보만 수시로 흘릴 수 있다면 유목민족 특유의 전격전을 계획 수립 시부터 꺾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할 때, 총과 칼이 원주민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지만, 정작 원주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바로 천연두였다. 이 병균은 스페인 코르테스의 원정 시, 2,000만에 달했던 멕시코 원주민을 16만으로 줄여버렸고, 피사로의 잉카 침공 시엔 잉카족 대부분을 몰살시켰다.

 


고려의 플랜A가 강조의 통주 전투였다면, 플랜B는 천연두를 활용한 생화학전이었으면 어땠을까. 너무 현대전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싶으면, 그냥 강조가 유럽 신대륙 원정대처럼 천연두를 전파하는 질병의 사도(?!)였다면 어땠을까. 도끼로 난도질당해서 죽을 때, 강조의 눈앞에 누가 있었나. 거란군 NO.1 요 성종, 야율융서다.

 


만약 이때 야율융서가 천연두의 사랑을 받고, 그 여파로 요나라 지휘부, 나아가 황실까지 쑥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고려거란전쟁은 귀주대첩 없이 순탄하게 끝나고, 여차하면 고려의 영토가 요동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소소한 정신승리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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