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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Feb 22. 2024

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 없이 끝낼 수 있었다?-1부-

고구려-당 전쟁, 병자호란과의 비교를 통한 IF역사물


# 알까기가 그리 재밌더냐?

KBS 정통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양규의 죽음 이후로 급격히 떨어진 퀄리티로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 한반도의 ‘반지의 제왕’을 바랐건만, ‘왕좌의 게임’ 꼴이 나는 건가 싶어, 심히 유감스럽지만, 아직 이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할 ‘귀주대첩’이 남아 있는 만큼 기대를 아주 버리진 않았다.


 

이 드라마로 인해, 한반도 3대 대첩 중 하나로만 알고 있던 ‘귀주대첩’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다이내믹했다. 단순히 고려군과 거란군 간 대병력이 맞붙은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고려군과 격전을 벌이던 거란군의 후미로 고려 기병이 제대로 뒷치기를 가한 ‘망치와 모루’의 정석을 보여준 전쟁인 것.


 

고려 기병대의 기 막힌 타이밍의 습격은 ‘반지의 제왕’에서 압도적인 규모의 사우론 병력을 마주하고도 냅다 들이박으며, 뭇 남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로한 기병대의 돌격을 떠올리게 했다. 귀주대첩의 고려 기병의 극적인 등장을 묘사한 고려거란전쟁의 도입부를 보노라면, ‘반지의 제왕’ 오마주 느낌이 없진 않다.


 

요나라 역대급 명장이라는 소배압과 그 휘하 정예병들을 일거에 쓸어버렸고, 그 여파로 더 이상 요나라가 고려를 넘보지 못하고 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고려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혔다는 한반도 3대 대첩의 귀주대첩이지만, 소갈머리가 이 모양이라서인지, 살짝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좀더 빨리 정리하면 안 됐나!? 뭐 이런 생각.


 

귀주대첩의 3차 여요전쟁이 발발하기에 앞서, 2차 여요 전쟁에서 고려 강조가 거란 소배압과 맞다이를 뜨기 위해 동원한 병력만 30만이었다. 기껏 30만 병력을 영끌해놨는데, ‘알까기’(彈棊(탄기), 바둑이라고 해석하기도)하다가 그걸 한방에 날려먹었으니, 깝깝하기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알까기’가 그리 재밌더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헛헛한 마음에 옛날 조상들이 병자호란으로 얻어터지고 나서 임경업전이나 박씨전 같은 썰로 정신승리를 한 것처럼, 요래조래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이민족의 침입에 얽힌 한반도의 두 가지 상반된 사례를 살펴보는 걸로 달려보자. 하나는 당나라 태종을 제대로 자빠뜨렸던 고구려의 방어전이고, 다른 하나는 청나라 홍타이지한테 제대로 얻어터진 조선 인조의 병자호란이다. 다만 결론은 좀 기괴하다.

 


 

# ‘드루와 드루와’ 중국담당 한반도 일진 ‘고구려’

중국의 민간전승이 연개소문을 극악무도한 괴물로 묘사할 정도로, 연개소문의 고구려는 당 태종 이세민의 뚝배기를 제대로 깼다. 원래 잘난 사람들이 한번 자빠지면 오래 간다고, 당 태종도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연이어 고구려를 때려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유언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RIP(Rest In Peace)하셨다. 확실히 개소문 형님이 난 놈이긴 하셨나 보다.

 


고구려 군의 對중국 방어전략은 수많은 산성을 연계시킨 방어체계에 근간을 뒀다. 까마득한 산자락에 성을 지어 공성전에서의 이점을 극대화시키더라도, 결국 성 하나하나로는 압도적인 규모의 병력차를 감당할 수 없으니, 수많은 산성을 그물망처럼 연결시켜, 쌈싸먹는 방식을 취한 것.

 


645년 5월 17일, 당 태종의 육군은 공격 일주일 만에 요동성을 함락시킨다. 이후 안시성으로 나아가는데, 불과 62km임에도 한 달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촌각을 다투는 전시에서 이 딜레이는 당나라가 숱한 저항에 직면했을 것을 암시하는데, 오늘날 이 길목에서 발견되는 성산자성, 마운산성 등 숱한 고구려 산성의 흔적이 이를 방증한다.


 

수 차례 시도에도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당나라 지휘부에선 안시성을 우회하여 오골성을 공격, 곧바로 평양성까지 내달리자는 전격전이 제안된다. 이 제안을 당 태종은 수용하지 못하는데, 아직 안시성의 좌우에 건안성과 신성이 건재 상황에서 내부로 치고 들어갈 경우, 되려 쌈싸먹힐까 염려해서라고 한다.


 

당나라는 육로 침공에 더불어 원활한 군수물자 보급을 위한 해상 침공까지 병행했다. 당시의 육로만으로 보급을 수행하기엔 막대한 양을 나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 당나라 수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비사성과 건안성으로 함락한 뒤, 안시성 등에서 육군과 합류해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진격은 건안성에서 막혔다.


 

비사성과 건안성 사이에는 벽류하 등 주요 강자락에 고구려산성이 집중적으로 축성되어 있었고, 성산산성, 외패산성 등 중대형 산성을 중심으로 긴밀한 협력체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산성들은 수시로 당나라 군을 급습하며 병력을 갉아냈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당 태종은 퇴군을 결정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이 다소 지난하여 위풍당당했던 전쟁 초기와는 달리, 극히 소수의 병력만이 생환하게 되었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버려두고, 곧장 오골성, 평양성으로 진격하지 못한 이유는 오골성으로 가는 길목에 20개가 넘는 고구려 성이 모루처럼 버티는 상황에서, 건안성 등 요동반도의 고구려산성의 저항으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던 자신을, 안시성 양 사이드의 건안성과 신성의 10만 군사가 후려쳤을 때의 타개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당 태종의 뚝배기를 깨버릴 수 있었던 요인은 세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공격 전부터 이미 사기를 떨어뜨리는 까마득한 높이에 자리 잡은 한반도 특유의 산성, ▲주요 진격로마다 자리 잡은 고구려 산성들의 체계적인 연계, ▲언제든 당나라 군에게 냅다 들이박을 수 있는 예비전력의 보존이 그것이겠다.

 


 

# 여진족님 한반도 아우토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한 뒤, 강제로 개점휴업에 돌입한 사무라이들의 칼 끝이 자기에게 향할까 봐 두려워, 조선을 침공했다. 개막장의 끝을 보여주던 명나라 만력제는 조선만큼은 뜬금없이 온 국력을 쏟아부어서 구원했는데,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만주의 여진족이 급격히 세를 불리게 됐다.


 

청나라 창업군주 누르하치에 이어 즉위한 홍타이지는 자신이 황제를 칭하는 데 있어 뜬금없이 조선과 상담해야겠다며, 광역 도발을 시전하였고, 아직 왜란 시 명나라 만력제가 베풀어 준 하해와 같은 은혜가 사그라지지 않았던 조선은 ‘어디 너님들 따위가 최고존엄 명나라에 비빔? ㄲㅈ’를 시전하며, 보기 좋게 도발을 걸려주셨다.


 

당시 조선은 정묘호란으로 청나라에게 뚜까 맞은 적이 있었던 만큼 나름 최적화된 방어전략을 수립해 뒀었다. 오랜 전란으로 전력이 극도로 약화된 만큼, 청나라의 공세를 직접 꺾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지구전을 펼쳐, 청나라가 공세종말점에 도달, 스스로 지쳐버리는 방식의 전략을 구축했다.


 

복싱으로 따지면, 인파이팅이 아니라 아웃복싱을 취한 것인데, 이 방어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북방의 주요 침공루트였던 평안도 주요 요충지에 산성을 구축하고, 여기서 방어하여 진격을 지연, ▲조정은 강화도로 튀어 극단적으로 전황을 장기화, ▲호남, 영남 등 삼남의 속오군을 불러들여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반격을 개시.


 

청나라는 유목민족 특유의 저돌적인 전격전을 구사하였는데, 여기서 특이한 건 평안도의 주요 산성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곧바로 서울로 내달렸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공세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건, 오래되지 않은 전례가 있었기 때문인데, ‘정묘호란’이다. 이 전쟁에서 평안도를 하나하나 점거하던 청나라는 강화도 파천에 성공한 조선의 아웃복싱에 말려 결국 강화를 맺게 되었다.


 

시간이 끌릴수록 청나라에 불리하다는 판단이 선 홍타이지는 곧바로 조선 한양으로 진격시킨다. 2개의 루트에 4개의 군세로 나뉘어 파상적으로 이루어진 진격은 지금과는 달리 실시간 첩보가 불가능한 당시의 한계를 제대로 파고들어 조선 조정의 의사결정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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