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 ‘시녀들’의 중앙에 있는 금발머리의 소녀, 마르가리타 왕녀를 자세히 보면, 아랫턱이 좀 튀어나왔다.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 즉, 부정교합인데, 지속적으로 이뤄진 근친혼의 결과물로 알려져 있다.
‘합스부르크 턱’이 최초로 있었던 걸로 현재 확인되는 건 막시밀리안 1세로, 스페인 왕실 초상화를 보면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그 부정교합의 정도가 심해진다. 카를 5세는 고기를 제대로 씹기 어려워 와인을 마시며 삼켜야 했다는데, 스페인 왕실 구성원들 또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늘 침을 흘려, 침 닦아주는 전용 하인이 있어야만 했다.
유럽 서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스페인에 뜬금없이 저기 유럽 중부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적 결함이 퀀텀점프하여 제 앞마당 마냥 쑥쑥 자라다가 기둥뿌리를 뽑아버린 게 특이한데, 가문의 위상과 영속에 목숨을 걸었던 유럽 왕가 간 ‘그들만의 리그’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혼을 정략적 도구로 아주 잘 활용했던 막시밀리안 1세가 보인 극강의 정치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베리아 반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피가 이식된 뒤, 스페인 왕가에게 이 ‘고귀한 푸른 피’를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푸른 피’는 북유럽 특유의 흰 피부에 살짝 푸르게 비치는 정맥으로, 자신이 오스트리아 황가 핏줄이라는 상징이었다. 북쪽 땅의 탱자를 남쪽에 심으면 귤이 나는 게 당연한 건데도, 탱자를 포기 못하다 보니 스페인은 골머리를 앓다가, 결국 아예 심지도 않기로 결정했는데, 바로 ‘근친혼’이다.
①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최고존엄 타이틀을 보유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가는 본디 스위스 한미한 산골자락에 자리한 약소한 가문에 불과했다. 로마제국 앞에 신성이라는 게 붙은 것처럼 이 황위는 보통의 제국과는 다르게 교황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교황이 더럽게 간섭해 대는 상황에서, 딱 봐도 조별발표에서의 조장 같아 보이는 황위를 얻고 싶은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합스부르크 가문은 아주 잘 활용했다.
지금이야 어느 시골의 지역유지였지만 나름 옛날에 옛날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뼈대가 있는 가문의 혈통이었다 보니, 신성로마제국의 황위에 이름은 올릴 수는 있었고, 제국의 선제후들도 수틀리면 바로 반 죽여놓기도 쉽겠다는, 바지사장으로서 사이즈가 딱 나왔다. 이런 걸 보면 어디서든 어찌 됐건 일단 족보는 일단 좋고 봐야 한다.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여유만 있으면 그렇게 양반을 사려고 했던 것도 다 선견지명이 있어서다.
아무튼 우리로 치면 흥선대원군과 비슷한데, 그 이후의 어깃장 놓는 행보마저 유사하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마자 파란을 일으키며 기존 권력구조를 뜯어고쳤다면,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 또한 황위에 오르자 잽싸게 근거지를 가문의 세를 불리기 어려운 스위스 산골자락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버리는 등 주어진 지위를 제대로 써먹으며 오히려 자기 가문의 기틀을 단단하게 굳혔다. 좋은 바지사장 고르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루돌프 1세 사후 1세기 정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침체기를 겪었는데, 막시밀리안 1세에 이르러 다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막시밀리안 1세는 루돌프 1세부터 두드러졌던 가문 특유의 정치수단이었던 결혼동맹을 유감없이 활용하며 가문의 영지와 세력을 크게 넓혔다. 얼마나 야무지게 했는지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유명한 시구도 만들어졌다.
중세 유럽의 가문들을 키워나가는 ‘크루세이더 킹즈 3’라는 게임을 즐겨하는데,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윤리관을 보여주는 게 언제나 골 때린다. 오로지 가문의 세를 넓히는 것만이 목적으로, 무엇보다도 ‘혈통 좋고 능력 좋은’ 후계자를 남기는 게 중요한 게임이다. 그리고, 그래서 게임을 하면 할수록 이야기는 개판 오브 개판이 되어간다.
열심히 가문을 키웠는데, 자식들이 다들 시원치 않다. 아내도 나이가 많아 더는 출산이 무리다. 그러면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를 가져 좋은 후계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시간이 지나면 보통 가장 혈통 좋고 능력이 좋은 건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가족과 친척들이다. 막장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금단의 사랑에 대한 우려는 어리바리한 후계자로 인해 게임오버 당하는 거에 비하면 사소하다. 그리고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내 아내도 나만 바라보지 않고, 내 아들이 사실은 내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자식들을 카드로 유력한 타국과 동맹을 맺는다. 신하들도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니 동맹은 필수고, 그래서 자식은 일단 많을수록 좋다. 옛날에 자식을 많이 낳아야 했던 게 이래서였나 보다. 그리고 결혼은 단순히 아군 확보만을 위한 게 아니다. 차후 동맹 국가를 꿀꺽할 수도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동맹의 자식들이 우연찮게도(?) 다 죽어버리고 내 아들과 결혼한 딸만 있다면, 다음 세대에 그 땅은 우리 것이 되는 거니까.
전쟁 한 번 하지 않고 나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진 프랑스를 꿀꺽할 때의 쾌감을 아는가. 아마 합스부르크 가문이 결혼동맹에 환장하는 게 바로 이 맛이 아닐까 싶은데, 왜냐하면 막시밀리안 1세의 행적을 보면, 뭔가 크루세이더 킹즈의 느낌이 강하게 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결혼으로 프랑스 부르고뉴와 이탈리아 밀라노를 먹었고, 자식들의 결혼으로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그리고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품에 안기는 쾌거를 이뤘다.
하는 족족 대박이 터지는 이 상황은 일단 나보다 상속 순위 윗줄에 있는 애들한테는 자객부터 보내고 봤던 ‘크루세이더 킹즈 3’ 플레이경험을 연상케 한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인 만큼 아니겠지만, 나는 플레이할 때는 자객 엄청 보냈다. 아무튼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장남 필립(펠리페)을 이베리아 반도의 이사벨라 여왕의 둘째 딸 후아나와 결혼을 시키는데, 이로써 합스부르크 종가가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게 된다.
② 대항해시대와 이사벨 여왕의 네 딸들
초창기 이베리아 반도는 게르만 민족 중 하나인 고트족이 서고트 왕국을 세워 지배하고 있었지만, 유럽의 영원한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의 침공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가 점하고, 북쪽 나머지 지역을 기독교 잔존세력이 결집하여 세운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점거했다.
이후 이슬람은 여러 번의 내란으로 왕조가 뒤집혔는데, 그때마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등으로 쪼개진 이베리아 기독교 국가들에게 밀렸다가 다시 되찾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베리아의 십자군전쟁’이라 할 수 있는 레콩키스타의 발발은 수백 년이 걸리긴 했지만 점차 기독교 국가들이 승기를 잡는 쪽으로 흘러갔고, 결국 이베리아의 남쪽,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이 함락되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이슬람세력은 완전히 밀려난다.
당시 이베리아 기독교 국가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2강 체제였다. 그러다가 두 나라 수장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함으로써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이라는 스페인의 모태가 등장했고, 이들은 이제 오래전에 손발 다 잘라놓고 숨만 쉬게 냅두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정리하여 레콩키스타의 종지부를 찍었다.
유명한 항해사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과 신대륙 탐험 협약을 맺은 게 이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 시절 유럽에서 바다에 함선을 띄운다는 건 지금으로 치면 우주에 로켓을 쏘는 것과 같았는데, 개인이 감당키 힘든 비용이라서 콜럼버스는 스폰서를 얻고자 여러 나라를 백방으로 뛰어다녀야만 했다. 이탈리아 사람이 이베리아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건 그래서였다. 그만큼 시작하기 쉽지 않았다.
이베리아는 당시 유럽의 시각에선 변방이었고, 실크로드로 유명한 유럽의 동방무역로는 이미 레드오션이기도 했거니와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 같은 오스만제국이 움켜쥐고 있었다. 거기에 이미 옆나라 포르투갈은 항해왕 엔리케를 필두로 아프리카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판국이었으니, 한방이 필요한 상황에서 콜럼버스의 제안은 이사벨 여왕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 회심의 한 수는 스페인에게 막대한 부를 물려주는 토대가 되었다.
여담으로,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찾아내며 스페인의 본격적인 신대륙 발견에 나서자 필연적으로 포르투갈과의 영토분쟁에 휩싸이게 됐는데, 양국은 단순하지만 무식하게 해결했다. 대서양을 기준으로 세로로 선을 그어 서쪽은 스페인이 먹고 동쪽은 포르투갈은 먹기로 한 것. 이러면 딱 신대륙은 브라질만 포르투갈에 들어가는데, 중남미 아메리카에서 브라질만 포르투갈 어를 쓰고 나머지 국가들이 스페인 어를 쓰게 된 게 이래서다.
한편 이사벨 여왕에겐 네 명의 딸이 있었다. 첫째 이사벨, 둘째 후아나, 셋째 마리아, 넷째 캐서린. 첫째는 이웃나라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와 결혼했는데, 얼마 못 가 사망했다. 마누엘 1세는 A/S 해달라고 떼를 썼고(...), 결국 셋째 마리아와도 결혼하게 됐다. 사실 아라곤-카스티야 왕국에 왕자가 없어 여차하면 ‘어? 나두?’ 싶었던 것. 인도 신항로 개척으로 일군 막대한 부로 유명한 관광명소인 제로니모 수도원, 벨렘 타워 등을 짓으며 때를 기다리던 그의 꿈은 유감스럽게도 후아나가 카를 5세를 낳으며 그냥 꿈이 되었다.
참고로 마누엘 1세와 셋째 마리아 사이의 장녀 이자벨이 앞에서 말했던 바로 카를 5세의 배우자인 ‘포르투갈의 이사벨 황후’. 이때부터 뭔가 쌔한 느낌이 오지만 아무튼.
막내 캐서린은 영국으로 시집갔는데, 하필이면 남편이 그 유명한 헨리 8세. 캐서린은 헨리 8세, 앤 불린 등과 함께 한반도 아침드라마 같은 치정극 하나를 완성해 냈는데, 이 스토리는 영화 ‘천일의 스캔들’, 드라마 ‘튜더스’ 등으로 제작되는 등 지금도 열심히 재생산되는, 시대를 뛰어넘는 인기 콘텐츠로 자기매김 했다. 결국 캐서린이 왕자를 낳지 못해 일어난 사단이라 할 수 있는데, 어찌 됐건 이 일을 계기로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하지 않는 교황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는 먼 훗날 독일 제3제국의 흡혈귀 잔당과 바티칸 교황청 십자군을 상대로 ‘역발산기개세’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노스훼라투와 그를 사역하는 반 헬싱의 후손이 비밀리에 자리 잡게 된다. (응?)
둘째 후아나는 앞서 말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시집가게 되는데, 남편은 막시밀리안 1세의 장남 펠리페 1세. 그는 상당히 인물이 출중했고, 후아나는 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오가며 지냈는데, 이사벨 여왕이 사망하고 카스티야의 왕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후아나는 너무 남편을 사랑했던 나머지 정신을 놓고 ‘광녀 후아나(Juana la Loca)’라고 불리게 된다.
아버지인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는 딸의 광증에 대한 추문을 잠재우고자, 그녀를 예전에 신대륙을 포르투갈과 반으로 쪼갰던 장소인 토르데시야스 성에 유폐한다. 그리고 이걸 계기로 당시 연합체였던 아라곤-카스티야를 하나의 아라곤으로 흡수합병하고자 했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반발로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 결과, 아라곤-카스티야의 이베리아 반도와 신대륙을 포함한 여러 식민지, 신성로마제국의 드넓은 영토가 모두 후아나의 장남 카를 5세에게 몰빵 되는 희대의 잭팟이 터졌다.
다만, ‘크루세이더 킹즈 3’를 하다 보면, 결혼으로 땅을 꿀꺽하게 되면 처음엔 그 심플함에 환호하게 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생각보다 내부정리가 힘들다. 가령 프랑스를 통째로 꿀꺽하긴 했는데, 그 휘하의 신하들의 세력이 나와 비등비등하거나 오히려 우세하다면, 얘들을 한번 밟아주지 않으면 내 후계자로 넘어갈 때 나라가 정말 개판이 된다.
카를 5세의 치세 또한 교통정리를 위함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유럽엔 종교개혁이 휘몰아쳤는데,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극한의 가톨릭으로 진화한 에스파냐로선 그 열풍은 ‘저것은 해로운 새다’였고, 이에 카를 5세의 전쟁의 부피는 더욱 넓고 두툼해졌다. 그는 개신교를 KO 직전까지 몰고는 갔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라는 사실상의 판정패를 당한다. 이후 그는 그는 오스트리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스페인과 신대륙 등을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주고 물러난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종가인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분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나뉘게 되었다.
③ 고려 왕건 집안도 그러다 망했어
고려 창업군주 왕건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용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이 피를 유지코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혈족끼리 결혼을 했다. 여기는 이래도 됐겠다 싶은 게, 왕건은 부인만 29명이었고, 그래도 나름 자가발전(?)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있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러지 못했다.
외부로 눈을 돌리려고 해도 그놈의 ‘급’을 맞추려고 하다 보니 영 쉽지 않았다. 가톨릭을 믿어야 하고, 스페인과 어깨를 견줄만한 귀족이어야 하며, 기타 등등의 필터링을 거치고 나면 결혼을 할 상대가 남아나질 않았다.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막대한 부가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였다 보니, 누가 호기롭게 어깨 한번 견주어보려고 해도 어깨빵만 당하고 끝날 판이었다.
오랫동안 좋은 후계자를 얻지 못한 펠리페 2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공주를 세 번째 왕비로 들이며 펠리페 3세를 낳았는데, 이 여식은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의 딸,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과 스페인 카를 5세의 딸이 낳은 자녀로, 카를 5세 때의 쌔한 느낌이 다시 밀려온다. 펠리페 3세는 멀리 돌아가지 않고 그냥 바로 분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직행했고,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와 결혼하여 펠리페 4세를 낳았다.
유감스럽게도 펠리페 4세는 펠리페 2세와 동일한 상황에 처했다. 이번에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을 하고, 자녀도 여덟이나 낳았는데, 딸 마리아 테레사(추후 루이 14세의 아내)만 남기고 죄다 요절했다. 결국 펠리페 4세 또한 펠리페 2세와 똑같이 오스트리아로 시집간 자신의 여동생의 딸, 마리아나와 결혼하여 마르가리타와 프로스페로, 카를로스 2세를 얻었는데, 여기서의 마르가리타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속 공주.
(벨라스케스,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
프로스페로는 이미 근친혼이 많이 누적된 만큼 태어났을 때부터 병약하여 몇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귀한 왕자인 만큼 의학 외에 온갖 주술에도 손을 뻗었는데, 이 그림은 그 주술적 조치의 일환을 보여준다.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의 저자 나가노 쿄코에 따르면, 초상화 속 왕자의 여아 옷은 마귀의 눈을 속이기 위한 당시의 민간 풍습이었고, 옷에 달린 방울 또한 멋내는 도구가 아니라 마귀를 쫓기 위한 부적이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프로스페로는 네 살 때 죽고 말았고, 사실상 마르가리타가 왕위를 얻는 게 확실히 될 즈음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기적의 아이'라 불렸는데, 유감스럽게도 실제 모습은 기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안 카레뇨 데 미란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근친혼 폐해의 결정체였다. 지적인 능력은 나름 괜찮았다곤 하지만, 합스부르크 특유의 부정교합은 정점을 찍어 이젠 대화에도 지장이 생겼고, 걸을 때는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없어 벽이나 책상 등에 의지해야 했다고 할 정도로 신체적인 결함이 심각했다. 그리고 왕가를 이어야 할 유일한 남자 후계자임에도 불임이었다.
혹여나 하여, 프랑스 공주와 결혼을 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남쪽에서 귤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억지로 탱자를 만들려던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5대 만에 대가 끊겨버렸다. 이후 이 무주공산이 된 스페인을 두고, 프랑스 루이 14세가 ‘에... 우리 손자 순번이 제일 빠른 듯?ㅎㅎ’ 요러고 치고 들어오자,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1세가 ‘뭔 소리? 원래 합스부르크 가문 꺼야!’라고 맞받아치게 됐는데, 이게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다.
저기 루이 14세는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이자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나인 마리아 테레사의 남편이었고, 저기 레오폴트 1세는 ‘시녀들’의 주인공, 펠리페 4세의 딸이자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인 마르가리타의 남편이자 숙부(...)였는데, 사실 마르가리타의 딸이 낳은, 레오폴트 1세의 외손자가 요절하지만 않았어도 프랑스가 손자 명함을 들이밀지도 못했을 테니, 오스트리아로선 빡칠 만도 했다.
전쟁의 양상은 오스트리아의 불세출 명장 사부아 공자 외젠이 프랑스를 열심히 후드려 패며, 오스트리아가 주도권을 잡아갔지만, 결과는 프랑스의 판정승으로 끝나, 스페인에선 부르봉 왕조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여담으로 이 사건은 먼 훗날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부수적 효과를 낳았다. 본디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는 천혜의 요새로 초창기 수도로선 적합했지만, 본격적인 국가팽창을 감당하기엔 너무 좁았다. 이에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로 수도를 이전했는데, 그 결과 마드리드는 프랑스 왕가의 색깔이 덧칠된 반면, 톨레도는 옛 수도로서 오스트리아의 색감이 오롯이 남게 되었다. 각기 달랐던 시대의 수도를 보는 맛이 생긴 셈.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얼마 가지 않아 분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생겼다. 사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얻어터지기만 하던 프랑스가 이길 수 있었던 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1세 다음으로 등극한 요제프 1세가 병사한 까닭에 진영의 구심점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측 스페인 국왕 후보였던 카를 6세가 황위를 잇게 되었고, 스페인 국왕까지는 더 욕심내기 어려워졌다.
문제는 카를 6세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었고,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어야 했던 것. 카를 6세는 사전에 손해를 감수하며 타국과의 여러 협상 등을 맺어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위에 오르자, ‘그딴 건 모르겠고 일단 털자!’를 외치며 여러 국가들이 합심하여 오스트리아 공략에 뛰어들며 벌어진 것이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전쟁. 이를 기점으로 이 쪽 합스부르크도 서서히 옆나라 신흥강국 프로이센에게 밀려났지만, 그래도 절멸되진 않았으니 스페인 합스부르크보단 나은 건가 싶기도.
# 글을 마치며
‘로쟈’라는 필명의 문학연구가 이현우는 고전 문학을 ‘텍스트-무한’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수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새로운 해석이 가해지는 가운데 그것을 버텨내는 텍스트, 우려먹고 우려먹어도 계속 읽을거리가 남는 무한한 텍스트가 바로 고전이라는 것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리기엔 약간 머뭇거려지기는 해도. 여전히 우려먹어지는 은하영웅전설도 텍스트-무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오랫동안 유럽을 주름잡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보니, 여러 분야에서 그 족적을 느껴볼 수 있었고, 그것을 하나로 엮어보는 건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마냥 좋은 이야기로만 다뤄진 게 아니었는데, 그렇기에,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친 건데, 당시의 시대가 강제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무너져 내린 셈이니까. 그 굴곡진 흔적은 어찌 보면 긍지의 잔재인 셈이다.
개인적으론 각 챕터별로 분량을 딱딱 맞추고 싶었는데, 마지막 3부가 1부와 2부를 합친 것과 맞먹어버렸다. 분할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이런 거 딱 질색인데,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보다. 다음 이야기에선 보다 칼 같은 분량 나누기에 도전해 보는 걸로 마무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