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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Sep 23. 2024

'우려먹기 끝판왕' 은하영웅전설, 스페인 왕가 근친혼

(2부) 비너스의 단장, 옷을 벗는 마하, 시녀들


# 시녀들, 이베리아 반도의 추억


한창 패션 테러를 저지르고 다니던 대학생 시절, 운 좋게 학교 프로그램으로 2주에 걸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국가를 탐방하는 이베리아 반도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당시에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터라 비용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대준다고 해도 가네 마네로 고민이 많았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가길 잘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내 유일한 유럽여행이었으니.

 

 

당시 우리를 인솔하던 여행사 직원에 따르면, 이 해외탐방은 여행사가 코스를 짜는 게 아니라 고객이 직접 코스를 짜는 일종의 테크니컬 트립으로, 어디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여행이 아니었다. 인솔자였던 교수님의 강한 의지로 이베리아의 어지간한 관광지는 다 집어넣었는데, 이게 말로만 들으면 참 낭만이 넘쳐도, 실제로 겪으면 조금 거시기하다. 거기 다 가보려면 하루 대부분을 버스에서 보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니.


 

그래도 난 그 여행이 좋았다. 버스의 창 너머로 우리와는 결이 다른 이베리아의 풍경을 한껏 눈에 담고, 그러다가 가이드가 들려주는,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을 유적과 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그러다 나른해지면 잠이 들고, 어느덧 눈을 뜨면 도착한 관광지에서 그 구석구석을 꾹꾹 눈에 눌러 담고, 그 순간순간들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사실 첫 유럽이니, 뭔들 싫었겠나.

 

 

교수님의 추억여행이라는 음모론(?)이 돌던, 그 코스에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이 있었고,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술관을 가봤다. 그때 가이드가 가면서 일장 연설을 풀어놓던 게 바로 바로크 시대 최고의 화가이자 스페인 5대 화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 루벤스, 렘브란트와 함께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했던 화가다. 카라바조와 렘브란트는 강렬한 명암대비, 루벤스가 생동감과 화려한 색채와 생동감이 특징이었다면, 벨라스케스는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었던 화가로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였던 티치아노 베첼리오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6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크게 피렌체파와 베네치아파로 나뉘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으로 대표되는 피렌체파는 선으로 표현되는 데생을 강조했다면, 벨리니와 조르조네, 티치아노 등의 베네치아파는 색채와 빛을 통한 표현에 집중했다. 벨라스케스가 후대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곤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베네치아파는 티치아노 베첼리오에 이르러 업계에서 글로벌 천상계로 발돋움했고 유럽 각국의 왕이나 귀족들은 그에게서 초상화 한 점을 얻고자 안간힘을 쓸 정도였다. 마치 기술력 하나로 ‘매그니피센트 7’를 쥐락펴락하는 엔비디아와 같은 그 전문직 특유의 폭풍간지는 당시 유럽 최강의 군주로 군림하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와 연을 맺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티치아노는 붉은색을 잘 쓰는 화가였다. 그 정도가 상당했는지 그가 가장 즐겨 썼던 붉은색을 ‘티치아노 레드’라고 따로 명명할 정도였는데, 그래서 티치아노의 그림 대부분은 붉은색이 메인인 경우가 많고, 붉은색이 두드러지지 않으면 전반적으로 불그스름한 느낌이 있다. 그가 붉은색을 가장 아낌없이 사용한 그림은 카를로스 5세의 왕비를 그린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여왕’이 아닐까 싶은데, 참 우아하고 세련된 색감이다.

 

 

벨라스케스, 포르투갈의 여왕 이사벨라

 

 

실제로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그림이었는데, 책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커다란 크기였던 것에 놀랐다. 하긴 황제가 사별한 황후를 그리워해서 그려달라고 한 그림인데, 크게 크게 그려야 실제의 모습과 겹쳐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카를로스 5세는 티치아노를 극진히 총애했다. 그림을 그리던 티치아노가 실수로 붓을 떨어뜨리자 직접 주워주며 “티치아노 정도라면 황제의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지.”라는 쇼맨십을 날린 일화가 아주 유명한데, 우리로선 가벼운 드립 정도로 치부되겠다만, 당시 엄격한 신분제 사회 속에서 일개 화가를 황제와 동급으로 떡상시켜주는 멘트였던 만큼 그 시대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올 만큼.

 

 

황제가 그 정도 멘트까지 날려줬는데, 그림 딱 그려주고 정리하는 깔쌈한 비즈니스 관계에 그칠 수 없었는지 티치아노도 스페인과 오랫동안 나름의 관계를 맺어갔다. 그 결과,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당시 회화의 불모지로 여겨지던 스페인의 예술 수준을 한층 높였고, 벨라스케스 등 후대 스페인 화가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벨라스케스, 비너스의 단장

 

 

벨라스케스가 그린 유명한 그림으론 비너스의 나체를 그린 누드화, ‘비너스의 단장’(거울 속의 비너스)이 있다. 서구 미술의 주요 양식 중 하나인 ‘누드화’를 두고 골 때리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여신의 누드를 그리는 것까진 용인해도, 인간의 나체는 엄격히 금했다는 것. 그래서 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단장’과는 달리, 벨라스케스를 인생의 스승으로 여겼던 후대 스페인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문제가 됐다.

 

 

본디 르네상스 누드화는 벌거벗은 인간의 몸으로 현현한 그리스 신들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뭐든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듯, 점점 누드화는 포르노가 되어갔다. 여신을 그린다고 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림을 의뢰한 고객들은 자기 애인의 벗은 몸을 모델로 하여 여신들의 나체를 그리게 했고, 굳이 해도 되지 않을 노골적인 자세 등을 잡게 했다. 그렇게 그리스 신들은 고귀한 고대의 아름다움 찬미라는 미명 아래 자기를 받드는 이들의 성욕 해소 도구가 되어갔다.

 

 

19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독실한 카톨릭 성향을 지녔던 스페인 왕가의 영향인지, 아니면 피레네산맥이 문화적 방파제 역할을 한 것인지, 유럽의 계몽주의 바람을 만끽하지 못한 채, 여전히 종교의 위세가 드높았던 옛 중세 암흑기의 세태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KBS 명작 스캔들’(저자 한지원)은 “여전히 중세 기사도의 전통과 영웅의 허장성세가 뒤섞여 있었고, 이단을 심판하여 무서운 형벌을 내리는 종교재판이 기염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한마디로 국가가 하나의 거대한 교회인 형국이었다.”라고 말했다.

 


고야, 옷을 벗은 마하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The Naked Maja)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린 최초의 누드화로서, 안 그래도 누드화가 포르노가 되어가는 세태를 한탄하던 높으신 분들이 ‘잡았다 요놈!’하기 딱 좋았다.

 

 

여기서 ‘마하’는 ‘옷을 잘 입는 여자, 멋쟁이 아가씨’라는 뜻인데, 이 모델이 누군가인지를 두고 의견이 나뉜다. 첫 번째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꼬시기 위해 화장을 하러 고야의 작업실에 드나들다가 고야와 눈 맞았다는 알바 공작부인인데, 그녀의 초상화와 마하가 닮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두 번째는 당시 스페인 재상이었던 마누엘 고도이의 애첩인 페피타 투토로, 이 그림의 의뢰자가 고도이이고, 그의 저택에서 발견되었으며, 투토의 초상화와 마하가 닮아 설득력이 있다. 다만, 인기가 있는 설은 알바 공작부인. 워낙에 유명한 사교계 인물이었으니, 이런 식의 스캔들이 사람들의 입맛에 더 맞았을 것이다.

 

 

고도이가 은밀히 소장하고 있던 이 작품은 그가 실각함에 따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덕분에(?) 고야는 종교재판에 끌려갔다. 여차하면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 고야는 당시 그림이 발견될 때 같이 있었던 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단장’을 엮어, 티치아노의 ‘다나에’와 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단장’을 따라 그렸다는 극한의 회피기동을 감행했고, 그 결과, 고야는 어찌어찌 처벌을 면했다. 다만, 그간 이뤄온 사회적 위신에 많은 실추가 있었고, 안 그래도 청각장애로 음울해졌던 그는 한층 더 흑화했다.

 

 

마지막으로,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녀들’에 대해 떠들고 넘어가자. 그때 가이드가 했던 말로는 이 그림이 현대미술의 시발점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아직도 와락 느낌이 오진 않는다. 지금 우리에겐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때에는 혁명적이었다고 여겨지는 그 간극들을 이해한다는 건 재밌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참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벨라스케스, 시녀들

 

 

가이드는 말했던 것에 이것저것 덧붙이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타인의 시점 도입, 당시 미술은 화가가 본 것을 그리거나 화가가 들은 것 또는 상상하는 것을 그리는 방식만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왕과 왕비를 그리던 순간을 담았는데, 화가의 시점이 아니라 왕과 왕비의 시점이다. 이것은 그림의 공간이 캔버스에 국한된 게 아니라 관람자가 있는 캔버스 바깥으로까지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빛을 이용한 원근법 사용. 당시의 원근법은 색채원근법으로 가까운 것은 진하게 멀리 있는 것은 연하게 표현했는데, 이 작품은 빛의 밀도를 이용해 원근법까지 더했다. 우리의 눈은 어두운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빨려가는 경향이 있는데, 앞면에선 오른쪽에서의 빛이 마르가리타 왕녀와 그 일행들을 비추고, 뒷면에선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근위기사를 비춰, 그 사이의 어둑어둑한 공간에 역동적인 입체감을 살려냈다는 것.

 

 

다만, ‘시녀들’은 그 엄청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목적 등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못했다. 사진으로 치면 스냅샷 같은 이 그림은 메인이 마르가르타 왕녀인지,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인 건지, 아니면 우리를 보고 있는 벨라스케스 자신인 건지 불분명하다. 제목은 왜 ‘시녀들’인 건지, 애초에 제목도 ‘시녀들’도 정확한 게 아닌데, 1666년 스페인 왕실 미술품 목록엔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공주의 초상화’라고 적혀 있고, 다른 궁정 문서엔 ‘벨라스케스 초상화’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 벨라스케스의 걸출한 회화적 역량과는 다소 상반되는 듯한 이 이질적인 텍스트적 모호성은 숱한 예술가와 비평가들 사이에서 이 그림이 뮤즈로서 자리 잡게 했다. 피카소가 대표적인데, 그는 자신의 장기인 큐비즘을 한껏 활용해 ‘시녀들’의 리메이크작을 수십 점 남겼다. 물론, 큐비즘이 오브제의 극단적인 해체를 통한 단순화, 추상화가 특징인 만큼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한 리메이크를 떠올렸다간 ‘내 감동 물어내’가 될 순 있겠다.

 

 

이 그림을 아예 정치적 선전물로 보는 해석도 있긴 하다. 마르가르타 왕녀는 절대군주로 유명한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증손녀인데, 펠리페 2세부터 골머리를 앓게 하던 왕실 후계문제가 펠리페 4세에 와서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저자 나카노 교코)에 따르면, 사실상 왕도 국민도 왕위를 이을 남자아이의 탄생을 체념하였는데, 더 이상 왕자가 태어나지 않으면 마르가리타에게 왕위를 정식으로 계승하게 하고 싶다는 일종의 고지라는 것.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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