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랑하고 사랑 받고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사실상 일반 교양에 가까운 심리학 과목을 가르치면서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즐기는 마음으로 강의하고 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이론과 방법론적인 깊이보다는 자신에 대해 마침 한번 돌아보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적 지혜'를 바라는 수업이기 때문에, 준비할 때도 강의할 때도 필요 이상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개요의 시작은 '정신건강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서 중간시험 기간인 지금 대인관계 파트를 넘어 스트레스 대처까지 커버했다. 원래 발표불안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고, 발표나 강의 장면은 나에게 일종의 쇼 스테이지이기 때문에 논문심사를 받을 때도 별로 떨리지는 않았다. 강단에 선 입장에서 학생들의 눈빛이 가장 살아있다고 느낀 강의내용은 단연 대인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독자로 태어나서 독자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은 본연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남과 관계 맺고자 하는 소망 - 이것을 '대인 동기'라고 한다. 타고나길 자폐 경향이 있거나 아동기 애착외상(트라우마)에 가까운 부모의 거부나 방임으로 인해 아주 빈약한 '자기감'을 가지게 된, 그래서 성격장애가 된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이라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대인 동기를 가진다. 대인 동기에는 생존을 유리하게 하는 기능도 있는데, 특히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사람들을 응집하게 하는 것도 대인 동기 덕분이고, 커뮤니티에서 동떨어져 은둔하는 자와 같이 고독한 라이프스타일을 택할 때 단명할 위험이 높은 점도 대인 동기가 심리적 욕구이자 생존본능임을 뒷받침한다.
성인 즈음 되면 대인 동기가 가장 강하고 또렷하게 발휘되는 영역이 다름 아닌 사랑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것이 유전자의 존속을 위한 본능이라고 했고, 발달심리학자들은 연령대에 맞는 발달 과업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청소년기에 친구 관계에 집중되었던 주의가 사랑할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요즘 20대가 연애에 소홀해진 것이 사회문제로 다뤄질 만큼 성인기에 사랑은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우선의 관심사 중 하나인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사랑은 뭐지?
사랑은 감정인가? 흔히 사랑을 느낀다라고 하니까. 그런데 대다수 심리학 분야에서 사랑은 감정 상태가 아닌 '능력'으로 이해된다. 심리학에서 정의한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결여돼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어릴 때 살아남기 위해 매달려야 했던 주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번번히 거부 당해 남과 관계 맺는 것을 회피하는 어른이 되면 타인이라는 존재는 언제든 자신을 내치고 상처 줄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므로 감히 사랑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자신은 너무나 불안한 존재이므로 사랑 받기 바라지만, 사랑을 끝없이 의심하고 시험하려 드는 사람은 상대가 주는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하므로 사랑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운이 좋아 사랑하고 사랑 받더라도, 섣부른 단정과 불가피한 갈등을 다룰 수 있는 기술 부족으로 사랑이 가져오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견디지 못해 매번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짧은 연애만을 반복하는 사람 또한 사랑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사랑이라는 능력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서른 셋을 바라보는 나는 요즘에 와서야 사랑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있다. 여태껏 내가 간주했던 사랑은 그냥 관계를 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호감을 사고 정기적으로 만나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정의할 때 서로 애정 관계라고 한다면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덮어두었다. 나는 텅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혼자서는 영화 한 편을 진득하게 보지 못할 정도로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어서 채워버려야 할 궁핍처럼 치부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정기적으로 만날 사람을 찾는 것이었고,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일부 해외에서 일부 보내면서 오래 보아 온 친구관계를 다지지 못했던 나에게 스케줄을 채우고 정기적으로 만날 가장 그럴싸한 구실이 관심, 호감, 사랑이었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만 한다면 주말을 보내기를 바라고, 애써 공통점을 찾지 않아도 함께 할 활동을 찾아 와주고 다음 번에 또 보기를 바란다니. 오늘도 내일도 예정된 궁핍을 한 번에 매워주는 사랑 관계라는 것은 나에게 고독감을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때로는 너무 바빠지기도 했지만, 스케줄을 가득 채울 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의 할 일을 가장 잘 해낼 수 있었다. 원인을 파고들고 싶지 않은 공허의 이유를 사유할, 상념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빈 시간은 모두 남들과 보내고 일할 때는 무아지경으로 일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사랑인가? 하는 생각은 불필요했으므로 성찰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내 몸 같이 사랑하기에는 나도 나를 애틋히 아껴본 적이 없는데 알 턱이 없었다. 때때로 불안해질 때는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렸고,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으면 화를 냈다. 화를 견디지 못한 사람은 떠나보냈고, 붙잡을 수 있으면 붙잡고 안되면 아닌 대로 다음 스케줄을 채워줄 사람을 찾으면 됐으므로.
나의 상담자는 나를 다시 보게 된 것이 거룩한 사명감으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상담료를 오만원은 더 깎아도 될 것 같이. 그러면서 내가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또 마법같이 사랑은 충분히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제가 너무 불안한데요? 라고 말해도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건, 처음 나를 중학생 때 보았고 사투하고 나아졌다가 다시 나빠졌던 그 세월을 서로간에 답답해 하면서 견뎠던 내공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사랑을 해. 네가 바랐던 것 같은 사랑을. 그렇다면 알아줄까요? 아니, 사랑은 알아주리라는 조건부로써 하는 것이 아니야.
서른 셋을 바라보는 나는 요즘에 와서야 좋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 받고 있음을 알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그 것을 하고 싶다. 이 고민을 20대 초반에 할 걸. 나이가 다 차서 남들은 결혼을 하고 첫 애를 볼 때 하려니 참 뒤늦고 어렵다. 하지만 지금보다 빠를 날도 또 없을 것이다.
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그래서 어떤 날에는 내 기분이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나에게 무엇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그저 후회 없이 해버리는 것.
상담자는 나에게 지금이 기회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내 첫 남자친구를 봤고, 그 후에도 상담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몇 명의, 꽤 많은 '남들'을 봐왔다. 학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그와는 상담 관계가 너무 길어져 상담자인지 멘토인지 역할이 불분명해졌다는 이유로 내가 다른 상담자를 찾았으니까 햇수로 7년 만이다. 과거의 상담 주제는 엄마와의 관계, 진로, 나의 강박에서 오는 불안감, 이따금 상담 주제가 사랑이 될 때는 왜 걔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에 불과했다. 사랑해서 불안해요. 이 불안을 어떻게 견딜까요. 저에게는 맥심이 필요해요. 울며 불며 부끄럽게 나의 불안에 대해 말할 때 상담자는 나를 흥미롭게 쳐다본다. 서른 셋을 앞두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나의 첫사랑이, 첫사랑할 능력이 나에게 있기를 그도 바라고, 나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