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토지 17권을 마무리했다. 귤색 표지의 17권은 총 21권짜리 토지에서 막바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희가 벌써 마흔 여덟이 되었다. 이상현의 부인인 시우 어머니를 보고 서희가 그가 보낸 세월을 막막하게 그려보다가, 그게 곧 자신의 세월이라는 걸 깨닫는다. 서희도 이제 손주가 있는 할머니다. 그럼에도 청정하고 아름답다. 어린 서희일 때 떼를 쓰는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투와 행동에서 그런 걸 보여주는 게 놀랍다. 길상이의 자유를 얽어매인 감정도 그려지고 마지막 장면에서 해도사가 자유는 외롭고 쓸쓸한 거야라고 한 말에 나는 새로운 관점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나 자신도 얼마나 자유를 오래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나에게 자유는 사람들로부터의 자유였다. 학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학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저 추악해 보이기만 했다. 그들의 생각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이 들고 버거웠다. 사람들과 있으면 나는 왠지 모르게 괴로워지고 마는데, 그건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이 느껴져서인 것 같다. 어떨 때는 그들의 표정과 말하는 게 역겹게 느껴질 때도 있다. 추잡해 보이기도 하고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기심에 똘똘 뭉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견디는 게 어렵고 숨이 막혔다.
그래서 사람들을 하나 둘씩 놓아버렸다. 내 주위에서 멀리 떠나가도록 두었고, 혹은 나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차단시키기도 했다. 나 스스로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싫었고 가십거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인식에서 사라지고자 하였다. 그게 내가 원하던 자유였다.
같은 학교라는 이유로 얼마나 맞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견뎌야 했는지 모르겠다. 근처에 있기만 해도 불쾌하고 역겨울 때가 많았다. 번들거리는 기름기 같은 그들의 생각들이 나를 피곤하게 만드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로부터 사라지고, 그들도 나에게서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많은 사람들을 지우고, 사람들로부터 지워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고요가 찾아왔다. 나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졌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대신에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대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의 유년기와 십대는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수많은 기억들이 그곳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나의 이십 대는 아주 멍하니 비어 있었다. 내가 돌아보면 이십 대에 크게 그립거나 남는 기억이 별로 없다. 아주 가끔 여행을 가거나 한 게 떠오를 뿐, 십대만큼 꽉꽉 차있는 느낌은 전혀 없고 바람이 통과하는 허전한 길목만이 느껴진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 사람들을 지워내는 과정에서 내 경험과 기억도 같이 지워진 건 아닐까? 어째서 이렇게 기억나는 게 적은 걸까. 단순히 내 기억력이 나빠졌다기엔 왜 옛날 일들은 선명한 걸까.
나는 이렇게 세월을 느낀다. 토지의 최서희처럼 서른 하나의 나이에 세월을 느끼고 그 지나간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왜 기억나는 게 이렇게 적을까. 단순히 힘이 들고 덜 들고를 떠나서 의미있는 게 이렇게 없단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들, 왜 이토록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실처럼 연약하고 희미하기만 할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유로워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허망하기만 할까. 그러면 나 자신은 자유롭든 자유롭지 않든 불행 속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행복은 무얼까. 행복은 무엇이기에 잠시 왔다가 사라지고, 오래 붙들고 있으려 하면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또 어느 순간엔가 견딜 수 없이 충만해지는 걸까. 지금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고 이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자유의 것이라는 걸 나는 깊이 인식한다.
자유, 그 단어는 이런 느낌이구나. 모든 사람들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면 외로움이 찾아오는구나. 그러나 내가 바란 내 몫, 이 허망한 자유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게 또다른 길이 아닐까. 내가 바라마지 않던 이 고요함 그리고 고독 속에서 어쩌면 나는 더 많은 것들을 놓아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