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도쿄 시부야의 청소부 히라야마.
화면을 가득 채우는 어둠과 빛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어떤 의미였을까.
1. 이해하기 어려운 화면
그건 그의 마음 속이었을까, 과거였을까, 꿈이었을까.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관객으로서 히라야마의 삶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주인공이었고, 그의 삶과 주변 인물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를 온전히 보았다고 할 수가 없다.
히라야마는 올드팝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덧없는 사랑을 한다. 나무 사진을 찍는 걸 즐겨 하고, 독서를 꾸준히 한다. 그의 일상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하는 짧은 대화와 표정으로는 그를 알 수 없었다. 다른 작품의 등장인물보다 어려웠다. 생각을 읽어낼 수가 없어서였다.
감정표현이 풍부하지 않고 덤덤한 성격이라, 놀람과 흥분, 열정 같은 선명한 감정을 보기 힘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청소 일은 왜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열심히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오다가 이런 삶을 꾸려나가게 된 건지. 정보는 빈약하게 주어진다. 슬픈 건지 기쁜 건지, 삶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른다.
모르는 걸 극대화시키는 알 수 없는 화면이 가끔 나왔다. 서사는 따라갈 수 있었지만, 검고 흰 화면은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왜 나온 건지, 어떤 맥락인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잠을 자다가 나온 꿈인지, 불현듯 생각을 그려낸 것인지. 그 화면이 나오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나는 평범하다는 기준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름대로 평범이란 걸 가슴에 품고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낯설고 이상하다. 히라야마는 좋아하던 여자의 사정을 알고 서러워야 할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고 춤을 추며 맥주를 마신다. 청소 일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자신의 손이 더러운 것으로 여겨져도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 안에 있을 설움과 분노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지 않는다. 이런 특성이 평범하지는 않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의도하고 계산하기 전에 불쑥 튀어나오며 표정이나 말투, 행동으로 드러난다. 히라야마에게는 그런 게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나에게 히라야마는 특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감정을 예측했지만 그 예상이 반복적으로 뒤집혔다.
그러나 히라야마에게 느끼는 낯섦으로 인해 혐오감을 느끼진 않았다. 관찰하며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그가 순간에 표출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인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노을이 지며 올드팝 카세트 테이프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억눌린 슬픔과 열정 속에서 히라야마가 희열을 느꼈고, 그 희열이 노을에 의해 산란되었다. 완전한 절망도 아니고 희망으로 가득차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인 한 사람의 삶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의 삶을 지켜봤던 시간이 쌓여서 느리게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완벽한 날들이란 그렇게 알기 어려운 순간들이 모여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아름다웠다. 알 수 없는 삶을 관찰하고 그의 일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음 속에서 이유를 모를 감동이 치밀었다. 삶은 꾸려나가는 것만으로도 울림이 있다. 결국 완벽한 날들이란 어떤 삶이더라도 살아가는 것 자체에 주어진다.
2. 그와는 다른 삶을 사는 누이.
남매는 히라야마의 조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다.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 보이는 누이와,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울고 웃는 히라야마의 삶은 대조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인은 부와 높은 지위를 바라면서도 낭만을 잃고 싶지 않다.
흰 화면은 히라야마, 검은 화면은 누이 같다. 흰 화면은 바라는 게 없다. 그 자체로 존재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낭만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일어난다. 사람들은 낭만을 바라며 술을 마시고 드라이브를 하고, 해외여행을 가서 크루즈를 타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낭만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어떤 행동을 해도, 마음 속이 지옥같은데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반면 마음 속이 낭만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무엇에서도 낭만을 느낄 수 있다. 히라야마는 그런 사람인가보다.
검은 먹은 흰 화면을 집어삼키려 한다. 경제적인 부와 높은 지위를 꿈꿀수록 우리 마음은 검어진다. 끝을 모르는 길에 들어선다. 지위, 부, 끝없는 싸움을 하다가 마칠 검은 색깔이다. 흰색은 검은색에 잡아먹힌다. 억눌리고 짓밟힌다. 우리 마음이 그런 마음으로 생겼나보다. 세상에 낭만을 아는 사람이 적은 건, 검은색에 물들기 쉽고 흰색을 지키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검고 흰 화면을 누이와 히라야마의 관계로 본다.
3.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카메라
나는 히라야마의 삶을 관찰하면서도, 그 모든 관찰이 카메라 화면의 움직임에 의해서라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영화를 볼 때면 그 세계에 속한 것 같다. 전지적인 관찰자로서 모든 장면을 본다. 카메라를 따라갈 뿐이라는 걸 잠시 잊는다. 화면이 맥락과 동떨어지게 바뀔 때 나는 촬영된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삶의 서사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었다.
빔 벤더스는 괴상한 화면으로 관객들이 히라야마의 삶에 몰입하는 걸 깨버린다. 관객은 스스로의 관찰을 인식한다. 히라야마의 삶에 설득되던 것도 멈춘다. 빛과 어둠이 퍼지는 이상한 화면으로 관객은 영화에서 분리된다. 히라야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감독에 의해 의도적으로 멀어진다.
관객은 영화 내부에 속할 수 없다. 관찰자로 전락한다. 히라야마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의 삶에서 빠져나간다. 이 이야기가 영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실제 사람의 삶을 지켜본 게 아니다. 몰입이 깨지는 현상으로부터 퍼펙트 데이즈란, 만들어진 것이란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만들 수도 있다. 만들어진 퍼펙트 데이즈이기에.
지금까지 세 가지 측면으로 알 수 없는 화면을 이해하려 했다.
1. 이해를 넘어 아름다움으로
2. 낭만과 현실 사이
3. 카메라를 인식하는 관객
이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리는 건, 영화의 제목인 “퍼펙트 데이즈”로부터이다.
퍼펙트 데이즈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가기를.
낭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