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방인 Nov 28. 2023

안녕하세요, 뉴질랜드살이 N년차 입니다.

넌 왜 뉴질랜드에 왔니?


내 나이, 3n살. 30살에 접어들면서 한국을 떠나왔고 여기 내가 지내고 있는 이 곳. 뉴질랜드로 왔다. 새로운 것 투성이다보니 한국에서 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제법 많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되면 서로를 알아가기위해 많은 질문을 주고 받는다. 얘기를 나누다보면 나는 이 나라에서 성장하지도 않고, 가족들과 떨어져 이 곳에 혼자 지낸다고 하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물어본다. 아니, 꽤 여러 명이 나에게 물어봤다.


“넌 왜 뉴질랜드를 왔니?” “넌 왜 뉴질랜드를 선택했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로망의 나라는 ‘캐나다‘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전에 어떤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도시적인 모습도 아니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침엽수림이 우거진 뭐 그런 흔히 볼 수있는 사진을 보고서 “캐나다… 가고 싶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결정한 곳은 뉴질랜드였다. 정확히 말하면 뉴질랜드에 오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대학교 2학년 2학기를 마치자마자 나는 1년 휴학 후에 이 곳으로 어학연수를 오게되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 곳에서 어학원을 다니면서  약 10개월을 생활하였다. 여행이 아닌 첫 해외살이의 시작이었다. 다행히도 새로운 곳에 가는 걸 두려워 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엄마가 “뉴질랜드 다녀올래?”라고 했을 때 큰 망설임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살의 눈에는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너무나 신기한 곳이었다. 멜팅 팟이라 부를 만큼 다양한 국가와 인종의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이 곳의 생활에 적응을 할 때 쯤, 신선한 충격들이 결국 나를 이 곳에 오게 만들었다.  


# 어느 날, 큰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이렌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어디에서 나는 소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소방차는 보이지 않았고, 그 소리에 모든 차와 보행자들은 일시정지했다. 내 기억에 분명 자동차들이 지나가도 되는 신호였는데,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나면서부터는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보면 “그게 뭐? 당연한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만해도 한국에서는 소방차, 앰뷸런스, 경찰차가 사이렌을 켜고 지나가면 아무도 신경을 안쓰던 시절이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보고 자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우리나라에서도 경찰차, 소방차, 앰뷸런스가 지나갈 때만큼은 양보를 해야하는데”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나는 오클랜드 CBD에서 어학원을 다녔고, 하버브릿지를 건너 노스쇼어지역에서 살았었다. 어느 날, 학원을 끝나고 시내에서 놀다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아마 퇴근시간 즈음이었을 것이다. 꽤 많은 승객들이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나는 버스노선 운행 시작점에서 탑승한지라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버스 뒷문 바로 뒷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해 그 날도 그 자리에 앉았다. 내가 탑승한 정류장을 시작으로 몇 군데의 정류장을 지나가는데, 한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탑승했다. 그 중의 한 승객은 휠체어를 탔으며 그 당시 보호자가 같이 있었는지, 혼자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튼, 보행이 가능 한 승객들은 휠체어를 탄 승객 뒤에서 먼저 탑승하길 기다렸으며, 그 승객을 보고 버스기사는 바로 내려서 그 승객의 휠체어가 쉽게 올라탈 수 있도록 버스와 보도블럭사이에 보드를 연결하고 탑승을 도와줬다. 뉴질랜드의 버스에는 휠체어, 유모차등을 가지고 탈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 자리까지 승객을 도와주는 버스기사님을 보고 놀라고, 아무렇지 않게 버스 탑승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에도 놀라고, 이미 같이 버스에 타 있던 승객들이 가만히 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놀라웠다. 글로는 길지만 사실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다. 그 누구도 빨리 안간다고 짜증내는 승객도 없고, 오히려 그 승객이 잘 탈 수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 행동들이 다같이 더불어 사는 일상이라는 듯이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이 충격이었다. 그 시간이 한 2-3분이나 됐을라나. 내가 겪은 이 상황들이 ‘한국이었다면?’을 대입해보니 모습이 그려졌다. 물론 모든 기사님들이 그러시는건 아니지만, 도와주는 것을 귀찮아하는 기사님들, 기다리는 승객들은 구시렁거리거나 인상쓰며 눈치주는 모습들.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는게 익숙했다. 지금은 저상버스로 거의 변경된 것으로 알지만 몇년전까지만 해도 저상버스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었다. 이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이 곳의 시민의식을 느끼며 ‘뉴질랜드는 이런 나라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 밖에 내가 지내면서 사소하게 느꼈던 여러 감정들이 모여서 내가 한국을 돌아간 이후에도 이 곳에 가고싶다라고 생각을 하게되었다. 내가 이 곳에 N년 전에 이 곳에서 살겠다고 다시 돌아왔을 때, 나의 이런 경험을 말하면 신기하게 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진짜 이런 것 때문에 다시 오고싶었다고?”라고 생각하지않나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