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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n 26. 2023

서현의 나날.

12화. 과거.(08)

“야. 뉴스 봤어?” 활활 타오르는 불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 진짜. 처음부터 그놈은 도움이 안 됐어.” 이번에는 불에서 떨어진 곳에서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을 추천한 게 누구야?” “어떤 놈이야!” 이제는 여기저기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들렸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지 오래된 분수공원으로 비행 지구인들이 모여들었다. 건물이 무너져내려 여기저기 벽돌, 시멘트 덩어리가 널브러져 있었고 보기 흉한 철골이 튀어나오거나 불안하게 서로 엉겨 붙은 벽돌 들은 야생 동물들이 거주할 것 같은 스산한 동굴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이곳은 비행 지구인들이 탈선과 범죄를 모의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아. **! 어쩌지. 야! 어떡할 거냐고!” 덩치가 큰 지구인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유나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유나는 무표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을 바라봤다. “**. 진짜. 똑똑하다고 해서 믿었는데 일을 망쳐놨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네?” 덩치가 큰 고릴라 지구인은 과하게 어깨를 펴며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 채 험상궂게 인상을 쓰며 유나를 내려다봤다.


“휴..” 유나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크게 한숨을 쉬며 기지개를 켰다.


“이게 한숨을 쉬어?” 자신을 무시하는 유나의 반응에 고릴라 지구인은 더욱 거칠게 숨을 쉬며 다가왔다. 유나는 허세 가득한 그의 행동을 비웃으며 짙은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를 찾았다. “오늘은 피곤하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끝난 순간 짙은 어둠이 내린 공간에서 산처럼 큰 덩치를 가진 곰들이 어슬렁거리며 두발로 걸어 나왔다.


“이것들은 뭐야. 너네들한테 관심 없어. 저리 꺼져.”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힘으로 제압당한 적이 없는 고릴라 지구인은 그녀 앞을 막아선 곰 지구인들에게 욕설을 하며 위협했다. 하지만 큰 덩치를 가진 곰 지구인들은 두발을 이용해 당당하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와.. 이것들 봐라. 저리 꺼져!”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곰 지구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 하지만 그의 주먹을 정면으로 맞은 곰 지구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고릴라 지구인은 당황하여 몸을 움찔 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 새끼들.. 뭐야..” 흉포한 곰 지구인들 뒤에서 차가운 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처리해. 오빠를 만나고 제시간에 집에 가려면  지금 이동을 해야 돼.”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녀 앞을 지키던 흉포한 곰 지구인들이 고릴라 지구인을 둘러쌌다.


“뭐.. 뭐야!” 야! 빨리 도와줘!”


그는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겁에 질린 그들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 새끼들..” 지켜만 보고 있는 그들에게 욕을 한 뒤 도망가기 위해 흉포한 곰들에게 달려들었다.


“퍽.. 퍽.. 퍽! 퍽!”


“윽.. 억.. 아.. 악!!”


흉포한 곰 지구인들은 홀로 달려든 그를 집어 들어 바닥에 패대기치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쇠 파이프로 그의 몸뚱이와 팔 그리고 다리에 내려쳤다.


“정리했어?” 멀리 앉아 지켜보던 유나는 생명이 꺼져가는 벌레처럼 빌빌거리는 그를 지나치며 침을 뱉었다. 이미 묵사발이 되어버린 고릴라 수인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꿈틀거릴 뿐 그녀에게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공원 입구에 준비되어 있는 차량으로 이동했다. 공원에 있는 어린 지구인들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있었다.


“오빠. 보고 싶었어!” 그녀는 공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차량에 올라타며 말했다. “저놈은 왜 저렇게 만들었어?” 또래보다 덩치가 훨씬 큰 곰 지구인이 유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 몰라. 이번에 뉴스에서 떠든 사건이 나 때문이라고 말하잖아.” 그녀는 곰 지구인의 품에 깊이 파고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매혹적인 유나의 얼굴에 반해 거친 숨을 내쉬는 곰 지구인이 말했다. “맞을 짓을 했네. 잘했어. 우리 자기를 모함하는 놈들은 좀 맞아야 돼.” “역시. 자기뿐이야. 너무 좋아!” 유나는 한 층 더 애교를 부리며 그와 살을 비볐다.


그는 유나의 적극적인 애교와 스킨십에 흥분하여 그녀를 껴안으려 했지만, 유나는 그의 품에서 몸을 빼며 거리를 뒀다. “벌써 집에 도착했네.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고혹적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음에 봐.” 그녀는 차에서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가 내린 차량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유나는 시야에서 차량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방긋방긋 웃으며 지켜봤다.


“퉤. 더러운 새끼. 이 짓거리는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어.” 시야에서 차량이 완전히 사라지자 침을 뱉으며 옷의 먼지를 털어내는 듯한 행동을 하며 말했다. “아.. 후..”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며 집으로 향했다.


“탕. 탕. 탕.” 집으로 올라가는 오래된 철재 계단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보였지만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다리에 힘을 주고 걸어 올라갔다. 그녀는 오래된 현관문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휴.. 진짜 지겹다. 어서 탈출해야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짙은 어둠이 그녀를 반겼다. 유나는 가족의 밝고 따뜻한 인사보다 적막한 어둠이 좋았다. “아. 씨.” 어질러진 방의 상태를 보고 욕설을 뱉고 싶었지만 고개를 좌, 우로 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발로 밀어 보행할 수 있는 좁은 길을 만들었다. 유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의자에 앉아 낡고 곰팡이가 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또래에 비해 영특한 유나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분노하고 불만이 가득했다. 학교 또는 대외 활동을 할 때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부모가 부유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보다 좋은 결과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더 적극적으로 대외 활동에 참여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과목에서 최우수 학생이 되었지만 명문 대학교 입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리더 역할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성적이 우수한 탓에 덜떨어진 부유한 집안 애들의 뒤치다꺼리나 했다. 그런 일을 할수록 유나의 마음 깊은 곳에는 더욱 깊은 분노가 쌓였다.


“엄마. 오늘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발표를 하게 되었어요. 오실 거죠?” 그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던 유나는 드디어 그들 그룹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일 년에 한 번 진행하는 학부모 참관 수업에서 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부유한 지구인들의 눈에 들어 명문 대학 입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단, 훌륭한 결과물 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중요했는데 특히 학부모 참관 수업에 부모의 참여 가능 여부가 중요했다. 대체적으로 주변부에서 거주하는 지구인들은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았고 다양한 문제로 인해 자녀 교육에 소홀한 경우가 많았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어린아이를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부모들은 참관 수업에 참여할 여유도 관심도 없었다. 학부모 참관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증표였다. 이러한 이유로 부유한 지구인들은 부모들의 참관수업 참여 여부와 부모의 직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머! 우리 딸 대단하네. 언제 하니? 당연히 가야지.” 유나의 부탁을 받은 소현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유나는 안도하며 엄마에게 일정을 알려드린 뒤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정말 꼭 와 주세요. 제가 평소에 엄마에게 부탁드리는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부탁드릴 정도의 일이면 저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죠?”


소현은 냉랭하고 사무적인 딸의 부탁에 섭섭해하며 말했다. “알았어. 꼭 갈게. 그런데 조금 섭섭하네.” 엄마의 섭섭하다는 말을 들은 유나는 작게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몇 년 동안 학교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는 행사에는 한 번도 참여를 안 하셨잖아요.” 여전히 차갑게 자신을 쏘아붙이는 딸에게 화가 난 소현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얘가 버릇없게 말을 하네. 그리고 내가 일부러 안 갔니? 일이 바빠서 그런 거지.” 이제 유나도 짜증스럽게 말했다. “맨날. 그 일이 바쁘다는 말씀은.. 휴.. 아니에요. 아무튼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여해 주세요.” 유나는 엄마에게 짜증을 낸 뒤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소현은 아무런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업 참여를 위해 학교에 방문한 학부모들로 인해 작은 교실에는 발을 딛일 틈도 찾기 힘들었다. 유나는 발표 준비를 하며 교실에 엄마가 도착했는지 확인했으나 아직 엄마는 도착하지 않았다. 유나는 불안했지만 이번만큼은 간절하고 강하게 부탁을 드린 만큼 꼭 참여하실 거라 믿었다. 그렇게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발표 준비에 집중했다.


“유나야. 발표 준비 끝났니? 이제 시작한다.” 선생님이 유나에게 말을 한 뒤 참관 수업에 참여한 학부모들에게 유나를 소개했다. 선생님이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급하게 엄마를 찾았지만 교실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 순간 유나는 절망했고 준비한 발표는 그녀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결과를 남긴 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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