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아~, 오늘 숙제 너무 많아. 수학이랑 국어였나? 오후에 옆집 형이랑 축구하기로 했는데.”
“아이, 씨~, 학원 숙제도 장난 아닌데, 학교 숙제까지?오늘 게임은 못하겠다.”
지훈이랑 서준이 말처럼 오늘은 정말 숙제가 많다. 하필이면, 수학도 너무 어려워서 수업시간에 설명을 들었는데도 도저히 못 알아먹겠다. 푸는 법은 커녕 문제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갑자기, 사탕과 초콜릿이 먹고 싶다. 달달한 간식을 먹고 나면,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서 어려운 수학문제도 잘 풀 수 있지 않을까? 편의점에서 파는 초코바와 사탕을 생각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학교 끝나고 집에 가니?”
우리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까 할아버지가 귀엽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고는, 사탕을 사줄 테니 편의점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조금전까지 간식을 생각하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걸까?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학교 안전교육 시간에 낯선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다. 지훈이와 서준이는 싫다고 했고 나도 안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도 알겠다며 다른 길로 갔다. 조금 미안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안전 교육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지훈이, 서준이와 헤어지고 집 근처에 왔는데 아까 그 할아버지가 다시 나타났다. 우연히 다시 만나 반갑다며, 이번에도 편의점에 가자고 했다. 안 될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장난감도 사 주시겠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편의점은 밝은 데 있고, 사람도 많은 곳이다. 빨리 들어갔다 나오면 괜찮을 것 같아 할아버지를 따라 편의점에 갔다.
장난감과 과자를 고르는데, 할아버지가 엄마는 어디서 일하시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아는 대로 잘 말씀드렸다. 편의점을 나와서 집으로 가려는데, 할아버지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 앞까지 왔다.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내일 또 보자고 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사준 간식을 먹고 수학 숙제를 했다. 간식을 먹어도 수학 문제는 잘 풀리지 않았다. 결국, 숙제는 포기하고 할아버지가 사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다음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어제 그 할아버지를 또 만났다. 오늘도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주겠다고 하셨다. 또 할아버지를 따라 가는 것이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어제 편의점에서 봤던 새로 나온 과자가 자꾸 생각났다. 동그란 모양의 옥수수 볼을 깨물면 그 안에 초콜릿이 들어있는 과자였다. 할아버지와 편의점에 가는 게 왠지 나쁜 일 같았지만, 새로 나온 과자 하나만 사 먹고 다시는 안 가겠다고 다짐하면 될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오늘도 할아버지는 우리 부모님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짧게 대답하고 과자를 골랐다. 평소에는 비싸서 사 먹지 못했던 고급 초콜릿과 젤리도 골랐다. 할아버지와 편의점에 나와서 손잡고 집으로 가는 길, 할아버지가 좋은 곳이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어딘데요?”
“삼촌 농장이야. 거기 가면, 강아지, 고양이, 오리 다 볼 수 있어.”
“정말요?”
“그럼! 내일 삼촌 차 타고 갈래?”
“음…”
“여기서 가까워. 차로 10분이면 바로 가는데?”
부모님의 허락 없이, 낯선 어른을 따라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배웠다. 왜 할아버지는 학교 선생님과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걸 자꾸 하자고 꼬시는 걸까? 마음이 너무너무 불편해졌지만, 간식까지 사준 고마운 할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일도 내키지 않았다. 대답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나를 골목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 집으로 가는 길 아닌데요?”
조금전까지 친절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했다. 내가 농장에 가겠다고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할아버지가 무서웠다. 눈치만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내 몸을 만졌다. 싫다고 했지만,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나를 혼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몸을 다 만진 할아버지가 말했다.
“삼촌이 이랬다는 거, 선생님이나 부모님한테 말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무서웠다. 할아버지가 내 몸을 만졌다는 걸 말하면 엄마와 아빠는 무지하게 화를 낼 것 같았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따라가서 간식까지 얻어먹었다는 걸 알면 선생님도 나를 혼내실 것 같았다. 혼나는 게 무서워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왔다. 스쿨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5분 정도 더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검은색 자동차가 내 옆으로 와서 섰다. 지나가는 차 인줄 알았는데 그 할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학교 가니?”
“네.”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괜찮아요. 스쿨버스 타면 돼요.”
“삼촌이 데려다 주면 되는데 뭐하러 스쿨버스를 타, 그냥 삼촌 차 타~!”
친절하게 말했지만, 어제 골목에서 날 무섭게 한 것도 있어서 별로 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끈질겼다. 내가 계속 안 탄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럼, 오늘 삼촌이랑 농장에 갈 수는 있어?”
“농장이요?”
“그래, 삼촌 농장에 놀러 오기로 했잖아. 강아지, 고양이, 오리도 있다니까? 동물 안 좋아해?”
“좋아해요.”
“그럼 가자. 삼촌이 간식이랑 장난감도 많이 준비해놨어. 와서 보면 깜짝 놀랄 걸?”
“정말요?”
“그럼! 여기서 가까운데 학교 가기 전에 잠깐 동물들만 보고 갈까?”
“음…”
“잠깐만 보고 가. 10분이면 다 볼 걸?”
엄마는 분명 안 된다고 하실 것 같았다. 하지만, 동물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잠깐이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스쿨 버스는 동네 이곳저곳에 다 멈추기 때문에 학교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할아버지 자동차는 한 곳만 들르기 때문에 동물만 잠깐 보고 간다면 지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자동차로 다가가 조수석의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희미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미영아, 안 돼! 타지 마~!”
엄마 목소리인 것 같은데,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할아버지가 얼른 차에 타라고 재촉했다. 인자하게 웃으면서 손짓하는 할아버지를 거절할 수 없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미영아! 타지 말라고!”
어디선가 또 다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집이 있는 방향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엄마가 베란다에 서서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조수석의 문은 열렸고 할아버지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아채려는 순간이었다. 그 때, 누군가 내 배에 팔을 감고 뒤에서 세게 끌어당겼다. 몸이 뒤로 넘어갔다고 생각했을 때, 푹신한 감촉이 등에 와 닿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떤 아줌마가 내 밑에 깔려 있었고, 나를 태우려던 할아버지의 차는 조수석 문을 연 상태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멍해 있는데, 밑에 깔려 있던 아줌마가 괜찮냐고 물어본다. 아줌마의 상태를 보니, 내가 괜찮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줌마는요?”
“괜찮아. 근데, 네 이름이 미영...이니?”
“네, 박미영이요. 아줌마는요?”
“진희야. 허진희.”
날 도와준 건 고맙지만 좀 이상한 아줌마 같다. 아까 뒤로 자빠지면서 머리를 다치기라도 한 걸까? 멍한 얼굴로 나를 본 다음, 할아버지의 차가 빠져나간 골목길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보았다. 아빠가 휴일에나 입는 추리닝에 머리도 안 감은 지 한참 된 것 같고…우리 반 지훈이네 삼촌처럼 백수 같았다.
“아줌마도 이 동네 살아요?”
“아니, 서울에 살아.”
“그럼, 여긴 왜 왔어요?”
“사람 좀 찾으러.”
약간 바보같아 보이는 것 같은데 사람이나 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조금 전에, 이 아줌마가 날 도와줬으니까 나도 이 아줌마를 도와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누구 찾아요? 제가 도와 드릴까요?”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찾은 것 같거든... 방금.”
-끝-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인물, 단체, 지명 및 장소는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