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극을 하고 있구나!

연극리뷰 / 굴(Dear Bau) 하땅세극장

by 김봄

12월 14일 연극 <굴>을 봤다. 극단 하땅세의 연극은 언제나처럼 오밀조밀한 데다 재치 있으면서도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뭔가를 담고 있는데, 이번 연극도 역시 그러했다. 감상적이었다는, 감상은 절대 아니다.

1. 우리 시대의 연극이란

인공지능 시대의 연극은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할까. (비단 연극뿐 아니라 읽기와 쓰기, 말하기와 듣기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매 순간 속도전을 치르고 있는 현대사회 안에서 태초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연극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정해진 답이야 없겠지만, 편린에 가까운 정보들이 스모그처럼 깔린 데이터 스모그 시대를 사는 우리가, 미디어와 매체가 수없이 개입된 네트워크 안에 사는 우리가, 무대 위 배우의 연기를 실시간 체험하는 연극이라는 장르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가장 직접적이면서 직관적으로 감정을 극대화할 수 있어서 일 것이다. 즐기는 동시에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목격자가 되는, 같은 공기 안에서 숨 쉬며 공유하고 전유한 것들을 날 것 그대로의 느낌으로, 대단히 극적인 장치를 통해 몰입하고 감응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날고기고 하여도 인간의 신체로만 구현되는(아직은) 무대 위 생생함을 어찌 넘어설 수 있을까. 물론 아직은 말이다.

2. 암전, 그리고 명전

연극 <굴>은 카프카의 소설을 기본 텍스트로 삼고 있다. 『변신』, 『법 앞에서』, 『단식 예술가』, 『독수리』, 『프로메테우스』, 『유형지에서』,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 그리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중 일부를 연극으로 제작한 <위대한 놀이/윤시중 연출/하땅세>도 담아내고 있다. 아울러 이명우 연출의 <태담 : sense training>과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과 <만종>, 그리고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까지 차용된다. 타블로 비방이나 카니자의 사각형, 주디스 버틀러와 안토니오 다마지오까지 언급된다. 물론 이 모든 참조는 참조일 뿐, 관객이 무대를 감각하고 사유하는 것에 우선할 수 없다.


이 연극에서 가장 특징적이었던 부분은 무대 전면, 스크린을 통해서 배우와 관객에게 지시문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배우도 지시문에 따라 연기를 이어가고, 관객도 연극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마다 지시문을 따른다. 지시문에 적힌 대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암전'을 들으면 눈을 감아야 한다. 조명이 꺼지지 않아도 관객이 눈을 감는 것으로 '암전'은 달성된다. 효과적이면서 보다 극적으로. 그리고 또다시 어디선가 '명전'이라는 외침이 들려오면 관객들은 눈을 뜨고 전환 이후의 장면에 몰입하면 된다. 만들어진 무대를 보는 게 아니라 관객인 내가 무대의 일부로 합류하여 연극 속에 참여한다.

연극은 여섯 명의 배우들의 아주 사적인 기억과 더 내밀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이 연쇄되어 흘러간다. 어떤 배역으로 호명되지 않은 채 배우들은 자신의 이름 그 자체로 등장한다. 2024년 역사시비 프로젝트 중 1월 윤한솔 연출의 <수치심>에서도 배우들의 사적인 기억들로 흐름이 만들어졌는데, 그와 골조는 비슷했다. 하지만 <굴>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는 사적인 고백 너머, 각각 새로운 또 하나의 텍스트로 구성되고 연출된다. 연출이 적시한 여러 텍스트들과 상호텍스트성으로 얽혀 또 다른 창달적인 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다. 연극이라는 직접 체험의 정수는 이런 지점에서 극대화된다. 암전과 명전을 여러 번 반복하며 연극에 개입하고 동참하는 사이, 배우들의 진짜 삶과, 무대 위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은 관객으로 위치하기보다는 그들의 옆자리, 혹은 뒷자리에 자리를 움트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곁을 내주고 켜가 쌓인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배우들이 다 같이 꼬아놓은 줄을 넘을 때, 열까지 수를 맞춰 셀 때, 그리고 또다시 마지막 '암전'이라는 외침을 들을 때, 연극의 첫 시작부터 쌓아 올렸던 감정을 울컥 토해내고 만다.


어떤 이야기들은 큰 흐름을 가지고 흘러가지만, 또 어떤 이야기들은 여러 조짐들이 가늘게 퍼져 스며들기도 한다. 연극 <굴>이 지향하고 있는 쪽은 후자인 셈이다. 여섯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묶음으로 완전히 묶이지 않아도 괜찮다. 이 연극은 어떤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라고 만들어진 연극이 아닐 테니까. 배우는 물론, 하땅세 단원, 관객까지 모두 '연극하기'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으니까. 2시간의 여백 없는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은 관객이었다가 타자의 삶에 목격자가 되고, 나아가 한 울타리 안에서 <굴>이라는 연극을 완성해 내는데 일조한다. 자연히 관객들은 낱낱의 배우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삶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다 배우와 관객으로 만나 그들이 만들어낸 어떤 이야기를 접했던 거라고, 먼발치에서 남의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연극하기’를 수행했으므로!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연출의 역할이다. 무대 전환을 할 때마다 소품들을 치우거나 정비하는 과정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연출이 직접 무대로 뛰어들어 묵묵히 물건을 주워 올리고 바닥을 정돈한다. 연출이라는 자리는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리가 아니라 무대 위 세계를 설계하는 동시에 그 세계 안에서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할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들어주는 것임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3. 우리에게 연극이란

나는 모든 문화예술 장르 중, 연극과 춤, 노래가 가장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글을 읽고 써야 한다) 오로지 인간의 신체로만 채워진 어떤 것. 정교한 만큼 구멍이 생기고, 섬세한 만큼 투박해지는 기묘한 인간성, 그건 우리가 연극이라는 장르에 매혹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연극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겨울, <굴>을 보면서, 나만의 새로운 '굴'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굴 속으로 들어가든, 굴을 먹든, 어떤 굴절이 일어나든, 이 낯선 환기는 우리에게 말로는 다 못할 감흥을 선사할 테니까. 아주 연극적으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은 어린이날, 어린이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