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봄의 연작소설 『인정빌라』

집집마다 담긴 아홉 가지 이야기

by 김봄

서로를 기척으로만 감지하는 이웃 사이

빌라를 휘감은 방울토마토 넝쿨처럼

얽히고설키다 터져 흐르는 아홉 가지 이야기


2016년 ‘소년 범죄자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담아낸 첫 소설집 『아오리를 먹는 오후』를 통해 그만의 핍진하고 입체적인 작품 세계를 평단에 각인시킨 소설가 김봄이 8년 만에 연작소설집 『인정빌라』를 펴낸다. 『인정빌라』는 서울시 사당동을 배경 삼은 ‘인정빌라’를 중심으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작소설 형태로 엮어 낸 소설집이다. 작가는 서로 다른 고단함을 감내하며 사는 이들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드리우면서도 그들의 삶이 감상적으로만 비추어지지 않도록 입체성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정빌라』 안의 삶들을 무작정 안아 주고 싶다가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인 이기심과 과오를 동시에 읽어 내며 찝찝함과 죄책감을 함께 감각하게 된다. “대체되고 지연되면서도 하염없이 연결되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좀 더 생생하게 담아내고 싶었다.”라는 작가의 말이 알려 주듯 우리가 『인정빌라』에서 보는 것은 삶 그 자체다.


■집집마다 담긴 아홉 가지 이야기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의 시장과 골목을 지나면 소설가 김봄이 한 집 한 집 기워 낸 인정빌라가 나온다. 방울토마토 넝쿨이 건물을 뒤덮었으며 텃밭이 된 주차장에는 정확히 밥때 전까지만 대화를 이어 가는 세 명의 할머니가 앉아 있는 곳. 이 책은 인정빌라의 한 집 한 집을 세밀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며 집집마다의 이야기가 서로 얼마나 다르고 다채로운지 보여 준다. 햄스터를 키우기 시작하며 생명과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가는 4인 가족의 집, 언제라도 떠날 것처럼 캐리어를 정리하지 않는 애인 필과 사는 지연의 집, 홀로 강아지 메리와 살며 죽은 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고 전화를 거듭하는 진국의 집, 애인과 애인의 커다란 개와 함께 사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범준의 집, 사랑했던 이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안고 배낭 하나만큼의 짐만 갖고 사는 박하의 텅 빈 집, 딸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석희와 병철의 집, 그리고 빌라 맨 위층에 살며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성가시게 빌라를 돌보는 주인 내외 지성과 막례의 집까지. 우리는 이토록 다른 이들에게서 일관된 고단함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우리의 얼굴을 발견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소설가 김봄은 인물의 표면과 이면을 동시에 조명한다. 우리는 인정빌라의 이웃들은 미처 모를 인물들의 뒷모습을 본다. 빌라의 주인 막례는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귀가한 박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밥상을 내어주는 인정 많은 노인임과 동시에 매일 낮 빌라 앞에 친구 둘과 모여 앉아 빌라 사람들에 대한 입방아를 찧는 오지랖 넓은 이이기도 하다. 302호의 진국은 백화점 붕괴 사고로 딸을 잃고 강아지와 함께 홀로 살아가는 쓸쓸하고 정중한 사람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임대업에 종사하며 교묘한 술수로 임차인의 전 재산을 갈취하는 일에 종사했던 이이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는 인정빌라에서 펼쳐지는 삶이 그 인물의 전부가 아님을, 사람은 언제나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누구도 그 전체를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 대해 한마디로 단정 짓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그를 더 오래도록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문학이 다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일 테다.


■기척이 포옹이 되기까지

우리는 이웃의 얼굴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간다. 이웃의 존재는 대체로 문 여닫는 소리나 복도에서의 작은 대화 소리 등 기척으로만 감지된다. 인정빌라 역시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건물 전체에 정체 모를 지독한 냄새가 풍겨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조차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문 닫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요즘 통 안 보인다거나 하는 증언이 전부다. 이때, 방울토마토 넝쿨의 이파리가 창문을 넘어 방 안을 엿보듯 서로를 향해 손을 뻗는 이들이 있다. 막례가 진국이 키우는 강아지의 안부를 챙길 때, 하루하루 삶에 치이는 병철의 어깨에 지성의 팔이 감길 때, 그렇게 기척이 포옹이 되는 순간 인물들은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이름 모를 이웃에게 무심하게 굴 때가 대부분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다정을 무작정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정빌라』는 기척이 포옹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용기와 온기를 포착하는 작품이다. 그 순간을 손에 꼭 쥔 채 이 겨울을 맞이해 봐도 좋을 것이다.



■본문 발췌

며칠 비가 왔고, 또 며칠은 바싹 마른 날이 이어졌다. 장마철 무거운 공기 속에서 톡 쏘는 냄새는 배양이 된 듯 더욱 강렬해졌고 건조한 날이 이어지자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건물 골조 사이에 묻혀 있는 하수 배관을 타고 부패한 단백질 냄새가 온 세대를 돌고 돌았다. 물은 흘러 내려갔지만 냄새는 허공을 꽉 채운 채 제 위력을 과시했다. 이제 세입자들은 그 냄새를 참아 낼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끝말잇기」에서, 57쪽


집 안이 너무 적막했다 메리가 움직이면서 방바닥이 긁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꺄옹꺄옹 하는 애교 섞인 우는 소리도 더 이상 없었다. 진국은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진국은 휴대전화를 들고 연락처를 뒤졌다. 진국이 제일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안산에서 빌라를 지어 팔 때 분양을 맡았던 상록이었다. 두 번 정도 벨이 울리는가 싶더니 뚜뚜 소리와 함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으로 진국은 자신이 짓는 발라마다 감리를 맡아 처리해 줬던 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연결음 없이 뚜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진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홍 코끼리」에서, 119~120쪽


우리는 아버지가 옮겨 갈 병원을 찾는 일부터 병원비 지불 문제, 간병인을 구하거나 휴무일에 교대를 해 주는 문제까지 사사건건 부딪쳤다. 누구도 손해 보지 않고 공평하게 일과 비용을 나누려고 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공평해지지 않았다. 서로 뭘 그리 잘했느냐고 다투다가, 네가 사람이냐를 따지다가, 세상 둘도 없이 몰염치하고 인정머리 없는 새끼라고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주고받는 얕은 말들은 점점 더 강도가 높아졌다. 저 새끼 내가 죽이고 나도 죽고 말지, 싶은 충동이 손끝에서 떠나지 않아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와 당신의 이야기」에서, 145쪽


“꼭 알던 사람 같아요, 할머니.”

박하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박하는 숟가락 가득 밥을 퍼 올렸다.

“잘한다. 그렇게만 하면 돼, 암, 암.”

막례가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막례의 얼굴에 정숙의 얼굴이 겹쳐 보인 건 그때였다. 박하는 밥을 씹어 삼키면서 이 잠깐의 상상이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빌었다. 이 상상이 기억을 이기기를 말이다.

―「아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223쪽



■작가의 말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는 첫 단편집을 낸 직후부터 내내 ‘인정빌라 세계관’ 안에서 소설을 쓰고 발표했다. 인정빌라는 사당동에 위치한 다세대주택이고 내가 자라온 환경과 비슷한 공간이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번 책 안에는 내가 5퍼센트 정도 담겨 있는데 나는 그 5퍼센트 정도의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확장시켜 나갔다. 인정빌라 각 호에 사는 인물들은 나인 동시에, 나의 가족이고, 이웃이면서, 타자이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고,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중심이 해체되고, 모두가 저마다의 색을 발산하며 비슷한 무게 추를 지니고 사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고 대체되고 지연되면서도 하염없이 연결되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을 좀 더 생생하게 담아내고 싶었다.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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