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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길 Mar 16. 2022

떨어지는 시력을 느끼며

안경을 닦고 다시 쓴다. 껌뻑이다가 다시 벗고 눈을 비빈다. 다시 멋지게 써보는 안경. 그래도 흐릿한 글자들. 시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것이야 이 전철 안에서만은 아니다. 또한 떨어지는 것은 입맛이며, 기억력, 몸 곳곳, 뭐뭐 더 많아질 것. 그래도 이렇게나마 작은 종이에 글자를 쓸 수 있으니 괜찮다. 누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으니, 아직 다행한 일 아닌가.


이렇듯 나를 지켜주고 있는 내 눈, 그래 내 몸이다. 이내 몸 어디 무엇을 얼마나 더 써먹어야 하나. 이 눈으로는 무엇을 더 보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래, 눈이 있으니 방향을 잡는 일에 더 써먹어야 할까. 방향을 잘 보고, 그곳에 내가 있으니, 내 모습을 뚜렷이 보는 일에 끝까지 써먹어야 할까.


아니 체력이 더 떨어져도 할 일이 있다. 눈을 감고, 귀 닫고도 얼마든 할 일이야 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고 있는 움직임이 곧 나 자신임을 느껴함이리라. 하, 그런데, 내 느낌이라며 따지고 붙들어 봐야 뭐 달라지는 게 있다고, 시시콜콜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 또한, 누가 내가 하는 일을 본다든지, 내가 누구의 일을 보는 것이, 나와 그 누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만 보면, 무척 달라진 것이 있는 듯, 고만고만하게 우쭐대는 나는 인간 군상의 하나다. 그래 인간 군상, 도토리 키재는 군상들. 그래서 크게 떠들 일도 없고, 뭐라 변명할 일도 없는 것 아닐까.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냥 어떤 걱정이나 아쉬움 없는 것처럼 고개를 곧곧이 세우고 있는 일. 그래 그런 인간 군상일 뿐.


그럼에도 덜 아픈 척, 덜 배고픈 척, 덜 슬픈 척 해야 한다. 이렇게라도 살아 있어야, 나 또한 아직 존재해 있어야, 서로 눈으로 보고 보아주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리라. 눈으로든 귀 아니 몸 어느 곳으로든 '너 거기 있구나' 라며 확인해야 한다. 점점 떨어지는 몸의 기운을 분명 확인할 때마다, 그래 아직 ‘나로구나, 내 몸이로구나’ 눈을 껌뻑여야 한다.  


아무리 눈이 아프도록, 이 전철 세상이 두겹 세겹 만겹으로 보고 보아도 뭐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러하오니, 한 번은 목숨 아프게, 더 한 번은 몸 더욱 아프게, 그래, 내 안경 세게 움켜쥐듯, 두 손 꼭 움켜쥐고 외쳐야 한다. 아, 고마운 눈코입귀목몸팔다리들아 사랑해! 이렇게. 지금, 글자를 쓰고 보게 해주어 고마워! 


(200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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