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한강을 건넌다. 살얼음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당산철교 아래 멀리, 덜컹 소리마다 오래된 흑백 영상 같은 것들이 째깍째깍거린다. 이래저래 당산철교는 익숙한 이름이 되어서일까, 언제나 고향 입구 다리쯤 되어 보였다. 이 철교는 어쩌면 나와 서울의 기억을 잇는 다리가 되었던 것.
결혼 전이었으니, 아마 30년은 되었을 듯싶다. 당시 KIST 시스템공학연구소에서는 올림픽 정보화 프로젝트 일환으로 시작된 아시안게임을 준비하였고, 이를 위해 전국체육대회를 국제 규모 경기로 확대 개편해 체육정보화 프로젝트를 국책과제로 수행하였었다. 이때 체육정보화란 컴퓨터 자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PC란 개념이 막 태동하기 전이었기에 당연히 대형컴퓨터에 단말기를 통해 경기결과를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월드컵 추천방식도 큰 구슬을 섞어 놓고 그 중에 무작위로 선택하여 조별 추첨을 하고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방식으로 토너먼트 경기종목의 경우 사람이 큰 구슬을 골라, 그 속에 있는 번호를 선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연구소의 우리 팀에 있는 터치방식의 단말기를 이용해 토너먼트 종목 팀 매치를 추첨해보자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그 프로그램 개발을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의 씨름 끝에 보름 정도 밤샘으로 프로젝트가 끝났다. 끝낸 그 날 오후, 2호선 전철을 타고 역삼동에서 당산역을 가다가 무려 4시간을 탄 적이 있었다. 물론 졸다가 지나치고 깨서 반대로 갈아타고, 갈아탄 것이 한 바퀴 돌고 나서 또 반대로 갈아타고, 그 때마다 당산철교에서 들리는 소리가 왜 그리 달콤했던지, 그렇게 오가며 졸았을 때도 당산철교 위였다.
결혼 후, 성남에 살면서 장모님 집을 들락거렸을 때도 잠실에서 당산역을 지나 합정역에 내렸었다. 서교동으로 이사와 강남역의 과총회관으로 출퇴근했을 때도 당산역은 오랫동안 매일 두 번씩 지나쳤던 것. 대전에서 양평동으로 이사와 혜화역 예총회관으로 출퇴근 전철을 탈 때도 역시 당산역을 이용했다. 또한 아현초등학교 앞 동네로 이사와 8년 넘게 살며 한 달에 몇 번씩 당산역 당산철교를 지나다녔던 것 같다.
최근 10년 가까이 문래동에 정착해 살면서 당산역을 지나쳐야 했고, 여의도로 사무실을 옮기며, 또한 당산역에서 9호선 국회의사당역으로 갈아타며, 멀리 당산철교를 보면서 갈아타고 다닌다. 이러한 당산철교와의 인연은 그래서 각별한 추억의 영화 장면이 수없이 흐르고 흐를 수밖에.
30년 넘게 당산철교를 지나치면서, 오래된 기억이나 최근 탔던 2호선 당산철교나 그 앞뒤가 섞인다손 뭐 특별할 것도 없어진 듯하다. 이제는 안경을 벗어야 지금 쓰는 글씨가 또렷해지는 시기가 되었다. 혹시 그 사이에 더 변한 것이 있을까? 사고와 의지가 흐릿해져가는 글씨들 틈에서 세상 온갖 것에 눈치를 보는 일에 익숙해진 요즈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저 혼자 글 쓰는 것만 좋아했지, 글이 경제생활 수단으로 이어지는 것에 관심조차 없었던 시절을 뒤돌아보면, 당산철교의 추억이 떠오르기 전에, 이젠 삶의 멍에 무게가 스멀스멀 심장을 녹아내린다. 이래저래 나이 들어도 그래도 쓸 것이 있어, 더 먹고 살아내야 하는 일은 어쩌면 글에 대한 나만의 본능일는지도 모른다. 아내나 자식들에게 내 글맛만큼 더 맛있게 느껴주는 걸 해주고 싶은 것도 또한 같은 본능일는지 모른다.
당산역 중간 쯤, 찬 안개비가 더 짙게 깔린다. 그 밑으로 흐르는 지난 시간들이 어느 찰라보다 짧게 지나쳐 내 것들을 움켜쥐고 숨는다. 글이란, 돈이란, 자존심이란, 삶이란, 또 추억이란 서로 도토리 키 재기하는 것들이라서, 뭐 그리 자랑할 것도, 아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일이라며 내 시간은 숨어버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