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에세이, 2022.07

by 정훈



최근 몇 주간 주일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 탁자가 대 여섯 개 있는 작은 카페이다. 주일 오전 시간대라 내부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 커피를 시키고 노트북을 꺼내서 회사 일을 하거나 글쓰기를 하곤 한다. 혹은 창 밖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카페에서는 큰 사거리 건너의 구립 도서관이 보인다. 나도 자주 가는 3층 도서관 건물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고 앉아있다. 3층에는 긴 책상 위에 노트북과 학습서를 올려놓고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2층에는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편안한 소파에 앉아 하루의 소일거리로 책이나 신문을 읽는다. 맨 아래층에는 부모와 같이 온 꼬마들이 빼곡히 들어찬 낮은 책꽂이 사이를 오가며 좋아하는 책에 눈을 고정한다. 도서관은 나에게 아무런 목적 없이 방문해도 환영해주는 조용한 친구 같다. 서고를 걸을 때면 “이것은 어때? 너 캠핑에 관심 많잖아? 아이들 교육은 이 책을 봐봐!”라고 온전히 나에게 관심 가져주는 좋은 친구 말이다.


카페와 도서관 사이에는 낮은 둔덕이 있다. 제법 넓은 공간에는 벚나무, 아카시아, 동백나무 몇 그루가 있고 키 작은 상록수들이 군데군데 뭉쳐서 자라고 있다. 바닥에는 토끼풀이 가득하고 그 위에 하얀 꽃들은 으깬 두부를 뿌려놓은 듯 보드랍다. 토끼풀을 지나칠 때면 멈추어서 네 개의 잎을 가진 줄기가 있는지 유심히 보곤 한다. 대부분은 못 찾고 포기하지만 운 좋게 눈에 띄면 기분도 좋아진다. 자세히 보면 우리가 초록색으로 부르는 저 나뭇잎이나 풀잎들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색을 가진다. 초록색 스펙트럼에서 하나씩 꺼내온 듯 진한 색들도 있고 부드러운 연두색 종류도 있다. 거기에 햇빛이 비치면 초록색은 훨씬 다채롭게 자신만의 색으로 반짝인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모두 비슷하게 살아가지만 다들 다르며 저마다의 의미가 있을 테니 말이다.


둔덕과 카페 사이에는 가게에서 내놓은 탁자가 듬성듬성 놓여 있다. 내부보다는 오히려 여기에 손님이 많다. 가족 단위의 손님이 오늘도 보인다. 정면에는 네다섯 살짜리 딸과 엄마 아빠가 앉아 있다. 검은색 유모차를 옆에 두고 분홍색 토끼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집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떼어 아이에게 주고 있다. 아빠는 물수건을 꺼내 아이의 손을 닦아준다. 검은색 탁자와 은색의 금속 의자들은 햇빛 가리개를 비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옅은 구레나룻을 가진 얼굴이 불그스레한 아이 아빠는 어쩐지 어디서 본 사람인 듯 익숙하다. 가족의 풍경은 10년 전 나와 우리 가족의 모습을 닮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아이 아빠는 지금의 나의 모습처럼 변하겠지.


창밖의 풍경과 한가롭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창문 너머의 나를 내가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평소의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아마도 무엇엔가 쫓기듯 분주하고 불안한 모습으로 보일 것 같다. 항상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게 비칠 것 같다. 안정된 직장, 부족하지 않은 형편, 내 소유의 집…. 언제부터인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 비슷한 생활이 반복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삶은 얼마나 남아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면 무엇인지 모를 텅 빈 아쉬움과 조바심이 마음속에 밀려온다.


그래서인가? 요즘은 소소한 변화를 시도한다. 운동을 핑계로 가격이 좀 나가는 중고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운동에 미친 사촌 동생과 내년에는 철인 3종 경기 하프 도전하는 것을 내기해버렸다. 술자리에서 했던 반 농담의 약속이지만 마음이 설레었다. 얼마 전 돈을 내고 글쓰기 수업도 신청했다. 수강할지 말지 만지작만지작 고민했지만 신청 버튼을 완료했을 때 마음이 후련했다. 나를 위해 돈을 투자하는 게 나를 소중히 대우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관심 가지고 듣던 글쓰기 수업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수업에서 연습한 단문들을 정리하여 오랫동안 멈추어 있던 개인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너무 잘 쓰려고 하지 말고 계속 쓰는데 신경 써야지.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금 이 시각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가족들은 교회 출석을 하고 있지만 나는 한동안 그들을 데려다주고만 있다. 어느 순간 하나님에 대해 경외함이 무뎌지고 지극히 형식적 예배를 드리게 되며 사람들과의 교제도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어 갔다. 가족에게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멈추어서 돌아보는 것은 자신에 대해 거룩하고 따뜻한 배려인듯하다.. 문득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너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안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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