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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더밍 Jun 12. 2020

꼬불꼬불하고 맵고 짠 당신


  요즘따라 불쑥 자꾸만 생각나는 당신. 여러 이름으로 불렸을 당신은 내게 아빠, 라는 존재였지요. 꾸물거리며 움튼 거대한 능구렁이 같은 안개들이 풍경 너머의 산마다 걸려있는 오늘은 아침부터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매일 마주하다, 드물게 마주하다, 이제는 어쩌다 겨우 마주하는 당신은 아마도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영영 마주할 수 없게 될 테지요. 몇 줄 적었을 뿐인데 괜스레 뺨에는 방울방울 눈물이 춤을 춥니다. 그렇게도 많은 방울들이 춤을 추고 손을 잡아 제 주위를 빙빙 돌며 저의 안녕을 축원해주었는데도 저는 여전한 것 같아 이제는 지겹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제가 평소 냉정하다며 섭섭해하는 당신은 아마도 저의 방울들을 내심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돌고 돌아 벗어나려 애썼지만 결국 당신과 나는 무척 닮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어릴 적 우리 집 베란다에는 항상 라면 한 박스가 있었습니다. 심심하면 간식처럼 내어 먹던 라면이 친구의 집에서는 불량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먹지 못하는 식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먼 훗날이었습니다만 당신의 집에서는 술에 흠뻑 취해 기분 좋은 당신이 잠들기 전에 의식처럼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적에 작은 상을 펴고 고사리 손으로 따르던 술 한잔에 벌겋게 신이 난 당신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있고, 제가 조금 어릴 적에는 당신에게 칭찬이 듣고 싶어 어떻게 하면 맛있는 라면을 끓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물을 조절하다 파를 넣어보고 끓는 내내 손을 부지런히 놀렸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등 뒤에서 흐뭇해하며 주섬 주섬 소주병과 잔을 챙기던 당신의 달뜬 들썩거림은 처음으로 라면을 끓이게 된 원동력이기도 했지요.

  당신은 참 꼬들꼬들하고 맵고 짠 라면을 좋아했어요. 없으면 엄마에게 불호령을 내렸던 김치는 반드시 때깔 좋은 묵은지여야 했고요. 당신이 달큰하게 취해 무탈히 잠드는 게 다행이었던 시절에는 당신의 고집대로 살아갈 수 있게 최대한 도왔습니다. 그게 기쁨이었고 평안이었으니까요. 저는 당신이 좋아하는 짠기를 맞출 수 있는 물 조절 능력자가 되었고, 스윽 눈으로 스치기만 해도 면발의 익은 정도를 알 수 있는 초능력자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라면 하나는 지금도 자신 있게 끓일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머리가 커져 우리가 드물게 마주하게 된 시절부터 저는 더 이상 당신의 라면을 끓이지 않았어요. 당신의 고집으로 나머지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거든요. 당신은 자꾸만 구석으로 내몰려 어느 날부터 우리 집 베란다에는 라면 박스가 사라졌고 찬장 안에 대여섯 개의 라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종종 검게 변해가는 당신의 얼굴과 한껏 쪼그려 흔들거리는 뒷모습에 제 마음도 흔들거려 라면을 끓여주고 싶어 질 때도 있었지만 결국 끓이지는 않았습니다. 엄마에게 미안했어요. 당신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

  공부에 전념하던 고3의 어느 날 울면서 걸려온 엄마의 전화가 생각납니다. 당신이 위급하다고 급히 병원으로 오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저는 올 것이 왔다며 당황해하지도 않고 차분히 동생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당신은 누런 잿빛으로 변한 채 허공을 보고 있었고 당신의 친구들은 끊이지 않고 찾아와 울며 속상해하다 차가운 제 낯빛을 보며 괜찮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며 가셨습니다. 저는 울음이 나지 않았어요. 다만 빨리 지나가길 바랬을 뿐.

  그런데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거란 의사의 선언이 무색하게도 당신은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병대에서 수색대 업무를 하며 산을 많이 탔다던 당신은 회복력이 남달라 기적처럼 술 냄새만 맡아도 토악질을 해대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의 일이었지요. 당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쑥스러워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자식들이 아니면 돈을 쓰지도 않는 짠돌이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피곤해하는 집돌이가 되었지요. 내 어릴 적 당신은 달리는 관광차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다 도착과 동시에 쪽잠을 자고 돌아오는 차에서 다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당신은 어느 날 동네의 기적으로 불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다니는 가게마다 당신의 변화에 대해 축하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잊고 지낸 지 십여 년 만에 저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당신은 다시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마시는 당신도 괴롭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지금의 저는 어쩌다 만난 날이면 당신에게 라면을 끓여줍니다. 폭삭 늙어버린 당신은 이제 꼬들꼬들하고 맵고 짠 라면은 먹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묵은지도 속이 쓰리다며 이제는 겉절이를 좋아한다고 옅은 미소로 고개를 떨궜습니다. 떨구는 고개를 바라보며 제 뺨에는 까무룩 잊었던 방울들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늙어버렸구나, 당신은. 영영 팔팔하게 살아 우리의 골칫거리로 남으리라 생각했던 당신이, 결국 어쩔 수 없이 늙어버렸습니다.

  종종 분식집에서 꼬들꼬들하고 맵고 짠 라면을 마주할 때 나는 젊은 날의 당신을 만난 것 같아 왈칵 방울들을 쏟아냅니다. 술을 좋아했던,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당신과 노란 단무지 같았던 병상의 당신과 거실 한구석에 둥글게 몸을 말고 앉아 하염없이 티비를 보던 순한 얼굴의 당신. 그리고 말간 국물에 적당히 퍼진 라면을 좋아하게 된, 자꾸만 어딘가로 고개를 떨구는 당신이 생각납니다. 방울들이 지쳐 집으로 돌아갈 때쯤 다시 숟갈을 들어 꼬들꼬들하고 맵고 짠 라면을 먹으며 다짐합니다. 곧 머나먼 길을 떠날 당신에게 올여름에는 꼭 당신을 위한 라면을 끓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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