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차니즘에도 '클라쓰'가 있다.

달라도 너무 다른

by 김채원

몇 달 전, 남편과 부부상담을 받으러 갔다. 다툼과 갈등이 길어지니 나는 우울해졌고 남편은 지쳤기 때문이었다. 우리끼리 아무리 얘기해봤자 결국엔 싸움으로 이어지길 여러 번, 할 수 없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러 갔다. 아담한 체구와 온화한 인상을 가진 60대 여자 선생님께 상담을 받았다. 선생님은 우리 이야기를 열심히 메모까지 해가며 들으시고는 MBTI 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다. MBTI 검사라면 포털사이트에 검색만 하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검사가 아니던가?


"저.. 어제도 스마트폰으로 MBTI 검사했는데요?"

"아 그래요? 결과가 어떻게 나왔나요?"

"ISFP요"
"에이~ 아닌데? 내가 얘기해보니까 절대 S는 아닐 것 같은데. 인터넷에 떠도는 검사는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어요. 다시 한번 해 봐요."


선생님의 예상대로 나는 ISFP가 아니라 INFP였다. 결과지에 있는 INFP의 특징을 찬찬히 읽어봤다.


마음이 따뜻하고 조용하다.

자신이 관계하는 일이나 사람에 대해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다.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에 대해 열정적인 신념을 갖는다.

자신이 지닌 내적 성실성과 이상, 깊은 감정, 부드러운 마음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지만 조용하게 생활 속에서 묻어난다.

이들은 너무 많은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주변 사람들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이상과 실제적인 현실 상황을 검토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체로 내 성향에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특히 마지막, '너무 많은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에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남편은 ISTP였다. ISTP의 특징도 읽어봤다.


말을 적게 하며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생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일과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의 일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이들은 상황을 민첩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으며, 가능하면 일을 수행하기 위해 투입하는 노력을 절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 계획을 실천하는 것에 집중하고 성취할 때까지 인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노력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열성과 적극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

또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 정보, 계획을 개방하고 타인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분석', '관찰', '파악' 등 단어 몇 개만 봐도 '딱 우리 남편 얘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을 절약', '노력을 최소화'라는 표현을 보면서 이상한 승리감에 웃음이 배실배실 새어 나왔다.


우리 부부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잘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석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독한 귀차니즘. 우리 둘 다 자꾸만 살이 찌는 건 우연이 아닐 거다. 우리는 자주 서로를 게으름뱅이라고 손가락질하곤 했는데 남편의 MBTI 결과지에 '노력을 절약'한다는 표현이 떡하니 쓰여 있는 걸 보니 남편이 나보다 더한 귀차니즘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 우리의 귀차니즘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클라쓰가 다르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줄 아이템을 구비하길 좋아하고, 나는 그런 아이템조차 관리하기 귀찮아서 집안에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으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남편은 집 안에서 쓰레기를 버리러 쓰레기통까지 가는 노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방마다 쓰레기통을 놔두는 사람이고, 나는 방마다 놓인 쓰레기통을 비우는 게 귀찮아서 쓰레기통은 베란다에 하나만 두는 사람이다. 남편은 화장지며 세제, 샴푸 같은 것들이 갑자기 떨어져 마트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대량으로 사서 쟁여놓는 사람이고, 나는 산더미 같은 짐을 팬트리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게 귀찮아서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사는 사람이다. 이 대목에서는 남편이 한 번 더 큰소리를 친다.


"나처럼 한꺼번에 많이 사야 싸게 살 수 있어!"


그러면 나는 지지 않고 대꾸한다.


"몇 천 원 아끼자고 짐 더미를 이고 지고 살고 싶지는 않아!"


마치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싸움을 보는듯한 두 귀차니즘의 대결은 쓸데없이 팽팽하다. '똥 묻은 개'가 남편, '겨 묻은 개'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어쨌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남다른 귀차니즘 클라쓰를 뽐내던 와중에 남편이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그것은 바로 스마트홈. 남편의 새로운 기술은 어느 날 택배가 오면서 시작됐다. 택배의 정체는 '갤럭시 홈 미니'. 그 녀석이 도착한 이후로 남편은 손가락 한 번 까딱하기가 귀찮아 하루 종일 빅스비를 불러댔다.


"빅스비, 티비 켜줘."

"빅스비, 거실 전등 켜줘."

"빅스비, 안방 에어컨 켜줘."

"빅스비, 엘리베이터"


이 광경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웃긴데, 왜냐하면 우리 집은 고작 24평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빅스비한테 티비를 켜주라고 말할 때 티비 리모컨은 바로 옆에 있을 때가 많고, 거실 전등을 켜주라고 말할 때 거실 전등 스위치는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을 때가 많다. 나 같으면 '갤럭시 홈 미니'를 검색하고, 주문하고, 설치하고, 집안의 기기들을 연결하느니 리모컨으로 에어컨을 켜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는 게 훨씬 편할 것 같은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귀차니즘이다.


물론 남편도 나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게으름뱅이라는듯 쳐다볼 때가 많다. 그런 시선이 느껴질 때면 나는 MBTI 결과를 다시 한번 들먹인다.


"이게 누구신가? 노력을 최소화하는 ISTP님 아니신가?"

"노력을 최소화한다니! 효율을 추구하는 ISTP라고 불러주시게."


어휴, 말이나 못 하면 정말. 오늘도 우리 집에는 효율을 추구하는 척하는 노력 절약형 귀차니즘 한 명과, 성가신 일은 싹부터 잘라버리는 가지치기형 귀차니즘 한 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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