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리할 때마다 레시피를 꼭 찾아본다. 검색해서 나오는 레시피 중에 제일 따라 하기 쉬운 걸 고르는데, '소금 약간', '설탕 적당히' 이런 표현이 나오면 무조건 스킵한다. 약간, 적당히 할 거면 처음부터 레시피를 찾아보지도 않았을 거다. '충분히 볶으세요'라는 말에 멸치를 재로 만들고 '푹 삶으세요'라는 말에 냄비를 태워먹는 나란 인간은 '약간'이나 '적당히' 같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건 정확한 계량이다. 그렇지만 15g, 20ml처럼 너무 정확한 레시피도 스킵한다. 계량할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밥 숟가락 계량이다. 특별한 장비도 필요 없고 알아듣기도 쉬우니 나한테 딱이다. 거기에 라면처럼 몇 분 끓여야 하는지까지 알려주면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요즘엔 밀키트 제품을 많이 이용한다. 필요한 재료가 필요한 양만큼만 딱 들어있어 헷갈리지도 않고 재료 넣는 순서와 익히는 시간까지 자세히 나와있으니 근사한 한 끼가 뚝딱 완성된다.
최근에 비빔국수를 만드려고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찾다가 충격적인 레시피를 발견했다. 할머니 유튜버로 유명한 박막례 할머니의 레시피였다. 제목부터 "대충 만드는 레시피"라고 쓰여 있길래 얼마나 대충 만드나 궁금해서 영상을 재생했다.
참기름: 닐라믄 많이 니코 생각대로 니면 돼 (알아서 넣으라는 뜻)
간장: 이만큼 뉘서 간이 맞것다 싶으믄 그만큼 맞춰주면 돼요 (이것도 알아서 넣으라는 뜻)
식초: 약간 (나에겐 너무 어려운 약간)
고춧가루: 얼마나 넣는지 말 안 해주심
깨 가루: 적당히
마늘: 두 스푼
소금: 싱거웁갑신께 소금 쪼끔 뉘께요 (싱거울 것 같으니 소금 조금 넣겠다는 뜻)
여기까지도 혼란스러웠는데 간을 한 번 보시더니 싱겁다며 간장을 조금 더 넣으셨다. 제목대로 정말 대충 레시피인데 신기하게도 정확히 계량한 레시피보다 훨씬 맛있을 것 같았다. 입 안에 군침이 가득 고일만큼 집중해서 보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완성된 비빔국수를 드시기 직전에서야 갑자기 설탕을 안 넣은 게 생각났다며 설탕도 봉지째 대~충 뿌리셨다. 푸하하. 웃음이 나면서 '아 이건 찐이다.' 싶었다.
사실 우리 엄마도 요리를 대충(?)한다. 간장을 통째로 들고 휘리릭 한 바퀴 둘러주고, 설탕이나 고춧가루는 봉지째 들고 대충 탈탈탈 뿌린다. 그렇게 만들면 요리할 때마다 맛이 달라질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한결같이 맛있기만 하다. 나는 대충 만들면 맛도 정말 대충인데 엄마들은 대충 만들어도 손맛이 다르다. 이게 바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나는 요리 말고 다른 일도 대충 하지 못한다. 이 말은 내가 늘 완벽한 결과물을 낸다는 말이 아니다. 대충 해도 될 부분에 지나치게 힘을 쏟느라 결국 중요한 부분은 놓치고 만다는 뜻이다. 청소를 할 때도 시작할 때는 의욕이 넘쳐서 침대부터 들어내고 침대 아래까지 구석구석 닦다가 금세 기운이 빠져서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눕기 일쑤다. 보이지도 않는 침대 아래만 번쩍번쩍 닦았으니 힘은 힘대로 쓰고 티는 하나도 안 난다. 주부 경력 8년 차쯤 되니 이제는 눈에 잘 띄는 곳부터 청소를 다 끝내고 나서 시간과 체력이 남았을 때만 침대 아래에 손을 댄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대충 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서툴고 낯선 일일 수록 중요하지도 않은 부분에 힘을 잔뜩 주느라 고생을 한다. 신규 교사였을 때는 게시판에 타이틀 하나 만들어서 붙이면 퇴근 시간이 되곤 했다.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컴퓨터로 원하는 문구를 출력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오려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대충 할 줄 아는 능력이 없었던 게 문제였다. 그때의 나는 출력한 글자를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오리려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위질을 했다. 느리고 조용한 가위 소리만이 '스으으으윽 스으으으윽' 울렸다. 다 오리고 나면 게시판 길이부터 쟀다. 게시판 길이와 방금 오린 글자의 가로길이, 글자의 개수 등을 따져가며 몇 cm 간격으로 붙이면 좋을지 고민했다. 종이에 연필로 여러 숫자들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눈 뒤 적당한 간격을 구해냈다. 그다음에는 다시 자를 들고 게시판으로 가서 한 글자 한 글자 붙일 때마다 정확히 간격을 재며 붙였다.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고생한 만큼 보람이라도 있었으면 다행이었다. 다 붙이고 나서 오래 참았던 긴 한숨을 토해내며 멀리서 내가 만든 작품을 마주했는데, 맙소사! 가로 간격에만 지나치게 집중해서 붙이다 보니 세로 정렬이 반듯하지 못했다. 위아래로 물결치는 글자를 보며 속이 쓰렸다.
이제는 타이틀 대충 만들기에는 도가 텄다.(주의. '타이틀 만들기'에 도가 튼 게 아니라 '타이틀 대충 만들기'에 도가 튼 거다.) 가위 소리도 경쾌하게 '슥 슥 슥 슥 슥'으로 바뀌었다. 뚝딱뚝딱 오려내고 코팅도 한다. 코팅까지 해 놓으면 내년에 또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코팅한 글자를 다시 잘 오려, 게시판의 가운데인 것 같은 곳에 가운데에 들어갈 글자를 붙인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대충 적당한 간격에 글자들을 붙인다. 붙이다 보면 가위질이 살짝 어긋난 곳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간격도 잘 안 맞다. 하지만 1년 동안 그걸 자세히 들여다볼 일은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는 걸 안다. 대충 만들었지만 정확한 가로 간격에 집착하느라 세로 정렬이 물결칠 때보다 훨씬 깔끔한 결과물이 나온다. 대충 만드느라 남게 된 시간에는 더 중요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나도 이제 짬바가 생긴 거다.
박막례 할머니는 비빔국수를 만들면서 "대충 하는 것이 비법"이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대충 만들어도 맛있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충 하는 것도 비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긴장을 풀고 부담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충 해야 잘 되는 일들이 있다. 잘하려고 마음먹을수록 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대충 하는 게 더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대충 하는 게 비법이다. 대충 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